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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WORK STUDIO 최형욱 Jan 26. 2023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우물 안 개구리의 반란

중도좌파나 중도우파나 사회가 증가한 부를 어떤 방식으로 분배할 것이냐에 대해 이견이 있어 왔다.

하지만 좌우 막론하고 한 가지 공통된 합의가  하나 있다. 생산된 재화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이 바로 '선'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화 시대에 어떤 식으로든 GDP를 늘리면 (분배 방식을 두고 서로 싸우겠자만) 어떻게든 그 부가 사회 곳곳에 흘러 들어간다는 합의이다.  애덤스미스부터 존 케인즈까지 현대 경제학의 최종 목적은 소비할 수 있는 재화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간과한 점이 있다. 사회 공동선에 기여하고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들은 대부분 GDP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익명의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것, 시골에서 마을 청소하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을 감상하고 감탄하는 것, 아름다움을 보고  몸과 마음의 질서를 회복하고 힐링하는 것,  봉사로 주일학교 선생이 학생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 등 사회적으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들은 대부분 경제 지표로 측정이 불가하다. 소비의 재화에만 주목한 나머지 사회구성원이나 생산자의 입장에서  공동체의 선에 기여한다는 의미는 간과되고 멸시받고 있다.


세금으로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주는 것은  단순히 국가 세수를 늘리는  목적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공동체가 어떤 일을 사회가 가치 있는 일로 여기고 어떤 일은 공동체에 해가 되는 일인지 암묵적인 합의를 나타내는 시스템적인 표현인 것이다. 예를 들면 도박이나 담배에는 죄악세를 매기고  금융소득은 세율을 낮게 해서 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로소득이나 부가세는 근로나 소비를 죄악시 여기기 때문에 페널티를 주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는 단순히 국가의 세수를 늘리기 위함이다.


여하튼 워런 버핏이 이야기했듯이  자신의 비서가 내는 근로소득 세율보다 자신이 내는 금융소득의 세율이 훨씬 낮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합의가 그러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암묵적인 공동체의 합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진다는 점이다.

도시의 청소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노동을 멈춘다면 사회에는 큰 혼란과 불행이 발생한다.

돌봄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노동을 멈춘다면 직장에 나가는 부모들은 멘붕이 온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에는 사회가 낮은 임금을 주기로 합의를 했다.

그에 반에 (일부) 약탈적인 금융회사가 주가를 단기로 올려서 기업을 인수하고 합병하고 매각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공동선에 기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왜일까라는 질문에 엘리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금융회사에서 기업인수 합병을 하는 사람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청소노동자와 돌봄 노동자는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니 그만한 대우를 못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바로 이 지점이 마이클 센델이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능력주의 사회가 말하는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능력 안에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핑크 빛 약속을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 지표를 근거로 들면서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능력주의'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고 보람 있는 일을 했느냐 그리고 그에 걸맞은 인간 존엄에 대한 대우를 해주느냐 보다 얼마나 금융공학의 시스템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소위 말하는 '파이프라인' 즉 일하지 않고도 소득이 지속적으로  들어오도록  똑똑한 사람들의 에너지와 온 관심을 쏟도록  만든다.


마이클 센델은  자신의 노동에 존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리고 변화가 빠른 기술혁신 시대에 자신의 구시대적 능력이 더 이상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다시 말해 정부의 복지 정책 혜택이 누구보다 절실한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  복지를 늘리는 정당에 투표하기보다 극우파 포풀리스트에게 투표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그들의 분노를 엘리트 정치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난한 백인들은 엘리트 지도자들이 능력주의와 금융 및 첨산산업과 외국인과 소수자들에게는 관대하면서  미국 중부의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구)의 백인 노동자와 미국 남부의 레드넥(햇볕에 목이 빨간 가난한 백인. 속칭 보수꼴통) 자신들을 멸시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분노가 투표로 표현된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들의 반란>

그동안 중도좌우 할 것 없이 모두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에 뛰어들어 큰 그림을 그려야만 성공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리고 공화주의의 이상에 따라 귀족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장미 빛 약속을 연료로 사회를 움직여 왔다. 역설적이에도 과거 귀족제 사회나 현대 공화정 민주주의사회에서나 가진 자의 비율과 없는 자의 비율은 일정하다. 하지만 없는 사람의 심리적 보호장치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 현대 능력주의 사회의 차이점이다. 과거 귀족정에서는 공작 아들이 부자가 된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운이 좋게 태어나서 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겉으론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었는데 여전히 가난하다면 그것은 오롯이 개인의 노력 부족을 탓하게 된다. 가난한 자들에게 자존심을 지킬 최소한의 심리적 보호장치가 사라진 것이다. 금수저 흙수저 담론은 과거 귀족정의 운명론을 닮아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낮은 자가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장치로 볼 수도 있다.


여러 과학적 통계를 들지 않아도 이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물론 예외적인 소수, 개천에서 용이 나고 자수성가 한 사람들의 신화는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그러나 이 신화에도 여전히 문제점이 있다.

개천에서 용이 되어야만 실개천 혹은 진흙탕물을 탈출할 수 있다는 신화는  개천은 살만하지 못한 곳 vs 드넓은 강과 바다는 선하고  마땅히 도전해야 할 넓은 세계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를 상정하고 있다.

왜 실개천은  꼭 흙탕물이고 지옥이어야 하는가?  실개천에서 꼭 용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냥 가자미 올챙이 물방개로서도 있는 그대로 나름 방식으로 존재로서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가?  꼭 바다까지 나가서  상어와 고래와 싸울만한 실력을 길러야 하는 가?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언급했듯이  용이 되어야만 한다는 능력주의의 강박은 사회를 피로사회로 내몰고 있다. 사람들은 그 강박을 내자화 하고 스스로 규범화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 결과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두 가지 현상으로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첫 번째는  지나치게 힐링 관련 메시지와 서적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상이다. 각종 심리강의 자존감 강의 저술 저서가 콘텐츠 시장의 윗 머리를 차지고 하고 있다. 관련 서비스와 강연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은 그 반대급부의 병폐가 많다는 반증이다.

두 번째는 어린이들의 놀 시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능력주의의 강박으로 학생들을 내모는 시점이 점점 아래로 앞 당겨지고 있다. 아이의 운명은 특목고에서 결정된다. 특목고는 중학교에서 결정된다.  중학성적은 초등 5학년에 갈린다.  영어는 초등입학 전에 마스터해야 한다. 영유아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니 태교부터 시작해야 한다. 죄송하지만 욕을 좀 하고 싶은 심정이다. 점점 미쳐가고 있다.


"이봐요 00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세상이 이런  어떻게 하겠어요? 살려면 환경에 맞추어 살아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에서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도구를 자기 몸을 변화시킴으로써 몸에 지니고 있지만 , 인간은 다른 포유류보다 상대적으로 신체가 나약하지만 생존에 필요한 도구를 주변 환경을 변화시켜 조형한다.


즉 환경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것과 환경을 변화 지켜  도구와 시스템을 만들어 생존하는 것이 인류세 등장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이러한 조형의지가 지나쳐서 공멸의 위기가 왔다는 병폐가 있지만 인류가 그동안 우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을 보호할 도구가 몸에 하나도 없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는데 다른 동물보다 그다지 유능하지 못하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환경을 도구와 시스템을 통해 새롭게 조형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이 지혜를 사용하기 멈추고 자신의 몸을 환경에 맞추기만 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생존과 멀어지는 길이지 않을까?라고 반문하고 싶다.


비극적인 환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능력 있는 용이 되어서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사실 이 방법은 개인과 가까운 친족에게는 유익하고 빠른 방법이지만 전체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차별과 병폐를 방치한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구시대적 시스템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제로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교훈을 보면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이는 전체적인 측면에서 스스로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개천에서 가자미도 올챙이도 붕어도 물방개도 함께 즐겁게   있는 방향으로 전환은 상사가 부하직원을 부모가 자녀를 스승이 제자를 피로와 강박으로 내몰지 않고 서로의 성장을 도모하고 함께 사회 공동선에 기여하고 이에 정당한 대가와 존중을 주는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할  있지 않을까? 문제는 시대와 상이 아니라  현상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이다. 우리의 방향이 과거를 향하고 있느냐  나은 미래를 향하고 있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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