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의 미션. 첫 번째
돌려주다의 사전적 의미는 "빌리거나 뺏거나 받거나 한 것을 주인에게 도로 주거나 갚다."이다.
어린이에게 자연을 빼앗다니 누가 언제 그랬는가?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박완서의 소설. 어릴 적 박적골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는가?>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서울의 아이들이 장난감보다
자연의 경이가 훨씬 더 유익한 노리감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호들갑일 뿐 그 또한 정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 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어린이는 본래 자연의 일부였고 자연 안에서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자연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연은 정말 치열하고 변화무쌍하며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안에서 반응하고 생존하는 다양한 생물들의 역동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고통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자연이라는 의미는 단순한 힐링과 휴양 차원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전체성을 내포한다. 어린이는 자연의 일부로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완벽한 유기체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뛰어노는 것 살아 숨 쉬는 것, 도토리와 열매를 주우러 다니는 것, 흙을 파는 것, 여름 물가에서 멱을 감는 것 소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 등등 지금은 대부분의 자연 활동이 체험교육활동으로 대치되고 있지만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에서 일은 엄연한 제 역할을 하는 살아있는 어린이의 일이었다. 박적골의 아이들처럼 모여서 제 밭에서 분변을 싸는 일조차도 무언가 집안 농사에 기여를 하는 듯한 뿌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행위였다.
심심함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비교적 현대에 발명된 단어이다. 자연의 일부로 사는 삶은 지루함을 모른다. 빈둥이 주장하는 자연은 단순히 친환경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화 안에서 사는 본래의 감각을 회복하자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빈둥이 주장하는 자연은 단순히 친환경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화 안에서 사는 본래의 감각을 회복하자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조도와 시력의 관계
안과 학회의 자료에 의하면 최근 10대 청소년의 근시 비율이 급격히 늘어났다. 10대 근시질병률은 80%이다. 그 원인은 지나친 스크린 노출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디어 스크린은 여러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고 좀 더 근본적인 환경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몽고 사람들의 높은 시력은 초원에서 멀리 보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력과 태양과 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실내 밝은 형광등 아래 조도(빛의 광량)는 1000룩스 내외이다. 반면 맑은 날 직사광선 아래 태양광의 조도는 100000룩스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하루종일 밝은 형광 등 아래 살더라도 태양광에 비하면 1/100에 불과한 조도 아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소위 육체노동보다 나은 삶, 지식노동자의 삶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검게 그을린 농부의 피부와 몽고 유목민의 그을린 피부, 인디언의 갈색 피부를 보면서 어떤 기호로 읽는가? 이 기호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어린이에게 넓은 대지를 돌려주자"라는 표어에 대한 해석이 갈라지게 된다.
우리는 본래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안에서 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어린이가 야외에서 노는 일이 언제부터 거북해졌을까? 구제적으로 어린이 청소년 교육기관의 담당자과 책임자분들이 어린이를 데리고 야외로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라고 질문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어린이에게 살아있는 현장 체험을 주고 싶어서 설레는 기분으로 나가는 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교육현장 담당자분들을 야외 활동을 나가게 되면 바짝 긴장하게 되어 있다. 사건 사고와 민원과 송사 때문이다.
거북함. 도대체 그 거북함은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언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의 야외 활동은 관리해야 할 골칫덩이가 되었을까?
2023년 여름 현재. 교권 침해 사건, 학부모 갑질사건으로 온 사회가 흉흉하다. 개별사건의 시시비비를 논하는 글은 아니니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부모들은 아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등교를 시키고 그리고 교사들은 개념 없는 부모들과 불합리한 교육행정 시스템을 원망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불신하고 있는 대치 상황은 분명해 보인다. 무언가 크게 어긋나 있고 잘못되어 있다.
아이가 귀하다는 이 시대 아이를 다 키운 어르신들은 다자녀를 낳으면 애국한다고 고생한다고 칭찬을 하신다. 한편으론 억대 고액 연봉의 맞벌이 부부조차도 아이 한 명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하나를 더 낳느냐고 말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낡은 사회 시스템과 커리어 우먼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유리천장, 고물가. 초고도, 초격차 경쟁 시스템 속에서 사랑의 결실인 자녀를 한 명도 건사하기 힘든 시대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슈퍼맨-우먼의 등장만 바라고 있을 것인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면 어린이를 기르는 일과 그리고 넓은 대지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일은 왜 거북한 일이 되었을까? 성실하게 자기 삶을 열심히 살뿐인 착한 어른들도 어린이로 인해 서로 고통받고 고통을 주며 의심하고 원망하며 폭탄을 돌리기처럼 아이들을 돌리고 책임 돌리며 서로 어린이를 돌보길 원치 않는 듯한 인상으로 일로써 대하고 있을까?
'기르다'라는 말의 본질은 무엇일까?
무엇이 어린이와 청소년으로부터 자연을 빼앗아 갔을까? 어린이 청소년에게 호안 마마, 본드 흡입, 비행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자연자체가, 바깥세상 자체가 위험해졌다. 무엇이 우리를 두려움과 불능의 상태로 내몰았는가? 도대체 누가 자연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