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양육환경과 놀이실험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 보고서
돌이 되어가면서 양평 지역의 장점뿐만이 아니라 단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2018년에 태어난 넷째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넷째가 돌이 되어가면서 양평 지역의 장점뿐만이 아니라 단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모두가 시골을 꺼리는바로 그 이유였다.
첫째 인프라가 부족했다. 이주민들은 서울에서 편리한 삶의 방식이 그리울 때면 정기적으로 하남의 스타필드나 코스트코까지 정기적으로 순례를 다녔다. 양평읍에도 시장과 큰 마트들이 있지만 비교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앙평에는 쿠팡의 로켓 배송이 안 되었다. (2024년부터 로켓 배송이 시작되었다.)
촌 동네 지수를 평가할 때 우스갯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그 동네의 롯데리아 숫자에서 맥도널드+ 버거킹 숫자를 뺄 샘을 해서 양수 이상이면 촌동네라는 썰이다. 지방도시 및 군 단위에는 롯데리아가 빠짐없이 다 있는데 맥도널드는 없다는 점을 빗대어 우스갯으로 하는 말이다. 양평은 롯데리아가 총 2개가 있었고 버거킹은 1개 맥도널드는 0개였다.
각기 흩어져 있는 군락들은 차량이 아니고서는 이동할 수 없었다.
첫번째 단점은 사실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도리어 쇼핑을 위한 나들이를 조금 덜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두 번째로 좀 더 심각하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 양평군의 면적은 서울에 이어 전국 지자체 도시 중에서 3위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지역이 산이고 인구는 서울의 100분의 1, 즉 12만 명 정도였다. 그러므로 각기 흩어져 있는 군락들은 차량이 아니고서는 이동할 수 없었다. 도서관을 한 번 이용하려 해도 차량을 이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적절한 밀도와 휴먼스케일이 적용되지 않아 많은 전원주택 생활 하는 사람은 도리어 도시에 살 때보다 더욱더 걷지 않게 되었다. 어린이들이 근린에 걸어서 갈만한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았다. 방과 후 많은 초등학교 아이들은 바로 앞의 피아노 태권도 학원으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차량을 타고 모두 각자 프로그램을 위해 이동했다. 더 멀리 있는 영어 수학 합기도 검도 학원으로 흩어졌다.
우리 아이들이 논밭에서 뛰어놀 길 기대하며 시골로 이사 왔지만 친구는 점점 없어졌고 방과 후에 운동장에 남아 있는 아이가 우리 집 아이 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내 어릴 적처럼 방과 후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밥 먹기 전에 들어와라라고 아들과 딸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될 일이었다. 일단 함께 놀 친구가 운동장에 없었다. 더 나가 대부분 다른 엄마가 운동장에서 아이를 지키고 있는다가 데려가는데 같이 그 자리에서 함께 지키고 서 있는 것이 기본 예의 이기도 했다. 뭐지? 생각처럼 잘 안 되는 이 분위기는?
결국 서울을 탈출해서 왔지만 이곳도 서울과 같은 곳이었다.
결국 양육 태도에 있어서 우리 가족, 아내와 나의 생각이 중요한 것뿐만 아니라 사회와 이웃과 생각과 분위기에 따라 아이의 양육 환경이 결정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서울을 탈출해서 왔지만 이곳도 서울과 같은 곳이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근린을 활보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놀이와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열어 줄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엄청 새롭고 대단한 일을 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초등 2학년-5학년때 지방 도시에 살면서, 부모들의 간섭 없이 이 집 저 집, 동네를 활보하면서 놀았던 기억을 우리 아이들도 당연하게 경험하길 바랄 뿐이었다. 방과 후에 친구들끼리 팀 짜서게임하고 운동하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밥 먹으러 집에 들어가던 그 생활방식을 지금은 왜 구현할 수 없는가? 유년시절 나는 눈에 보이지 않은 도시와 이웃과 어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놀랍게도 아주 어릴적부터 자치적인 프로그램을 경험한 것이었다.
친절하신 친구의 엄마는 내가 허구한 날 방과 후에 그 집에 놀러 가도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종종 친구들의 집에는 엄마가 집에 안 계셨다. 아마 일을 하러 가셨던 것 같다. 맞벌이하시는 집이라도 아이들의 프로그램을 본인 퇴근 때까지 빡빡하게 짜놓지 않았다. 여백이 있었다. 초등 1학년 이어도 누나와 함께 어른 없는 빈 집에 돌아와 엄마 아빠 퇴근할 때까지 자기들끼리 혹은 친구를 초대해 편하게 놀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의 누나와도 친하게 지냈다. 우리 집에는 겜보이와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었지만 친구들 집에는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집으로 돌아다녔다. 그런 식으로 나는 친구네 집에서 오목도 두고 누나들에게 공기놀이도 배우고 브루마블도 배우고 장기도 배웠다. 놀랍게도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자치적인 프로그램을 경험한 것이었다.
내 기억으론 방과 후 운동장은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5시까진 항상 어린이들로 붐볐었다. 한쪽에선 축구하고 한쪽에서 계주하고 한쪽에선 자전거 연습하고, 한쪽에선 구슬치기 하고, 피터 브뤼겔의 "아이들 놀이"라는 그림처럼 운동장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율적 영토였다.
오늘날 방과 후 학교 운동장은 썰렁한 잉여 자원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학교 방과 후 사용 금지라는 표지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학교장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데 종종 방과 후 어른의 보호 없이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거나 하면 책임을 학교에 묻는 몰상식한 부모들이 소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방과 후 학교 운동장은 썰렁한 잉여 자원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