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드풀> 은 마블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히어로 무비로는 드문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다. 2016년에 데드풀 1편이, 2018년에 2편이 나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2편은 청소년들도 볼 수 있는 데드풀 2: 순한 맛 버전을 따로 내기도 했다. 3편의 시리즈로 약 700만 명의 관객을 모은 데드풀 시리즈는 다른 히어로 영화들에 비해 더 매니아적인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대체 데드풀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이토록 휘어잡는 것일까?
솔직함과 해학
제작: 개허접 필름 / 출연: 신이 내린 또라이 / 제작비 지원: 호구들 각본팀: 우리가 진짜 영웅들이지 / 감독: 돈만 많이 처받는 초짜
인터넷 상에서 떠돌아다니는 댓글이 아니다. <데드풀> 공식 영화의 크레딧이다. 영화 데드풀의 특징 중 하나는 영화 전체가 캐릭터 데드풀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데드풀은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캐릭터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크레딧은 우리가 속으로나 생각했을 법한 것들을 영화에 여과 없이 내보내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데드풀에서 위엄이나 근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감독이나 제작사도 예외가 아니다.
솔직함은 곧 욕망과 본능, 때론 그걸 넘어서 위악으로까지 이어진다. 데드풀은 시도 때도 없이 성적인 또는 과한 농담과 욕설을 하고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영화도 그걸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전시한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위즐도 마찬가지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데드풀에게 호러 영화를 찍으면 되겠다느니, 네 얼굴 때문에 가위가 눌릴 것 같다느니 어떻게 보면 저게 친구 맞나 싶을 정도로 심한 말들을 서로 주고받고, 매주 어떤 사람이 죽을지 내기를 걸 정도로 정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같은 세계관인 엑스맨의 콜로서스가 데드풀에게 항상 슈퍼 히어로답게 행동하라며 경고하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콜로서스가 답답하기만 하다. 사실 콜로서스의 행동이 보통의 슈퍼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설정과 여러 상황이 우리가 데드풀에게 감정을 이입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도 내면에 감춰왔던 자신의 숨겨진 욕망과 대면하게 된다. 최근 많은 영화들에 정치적 올바름을 뜻하는 PC주의가 반영되고 있는 와중에 데드풀의 많은 팬들이 이 영화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며 억눌린 자신의 욕망을 대리 해소한다.
자학과 냉소
데드풀 자신이 슈퍼이긴 하지만 히어로는 아니라고 직접 말했듯이, 자신도 자신의 정체성을 히어로가 아닌 나쁜 놈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그가 실제 하는 행동도 히어로에 가깝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전체와 인물의 바탕에는 자학 의식이 깔려있는데, 이건 데드풀의 탄생과 함께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DNA 조작으로 모든 세포가 치료되는 능력을 지니게 되지만 얼굴을 포함한 온몸이 끔찍한 형태로 변해버린, 그로 인해 사랑을 잃어버린 데드풀에게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 역시 보통 대의가 아닌 자신의 감정에 의할 때가 많다 (물론 2편에서는 개인적 감정에서 올바른 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여줬다). 엑스맨 사단에 들어가길 꺼려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며 데드풀의 배우인 라이언 레이놀즈까지 자학의 양상에 끼어들게 만든다. 과거 영화 <엑스맨>에서 데드풀 역할로 출연했던 자신을 소재 삼아 웃기기도 하고, 블록버스터였지만 망한 영화 <그린랜턴>의 계약서에 사인하는 자신을 데드풀이 죽이기도 한다.
자학은 자기 객관화가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중립적인 입장이 되어보려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을 너무 좋게 생각하면 자만이 되고, 그 반대라면 자기 연민이 된다. 자학은 그 자만과 자기 연민의 중간지대에 있다. 이 방식이 우리에게 와 닿는 이유는 현재의 시대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 예전 세대라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깎아내리냐며, 너 자신을 사랑하라며 눈살을 찌푸렸을 개그들이 지금 세대에게 통하는 건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직접 보고 겪은 것들을 종합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나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내가 미워진다. “난 왜 이럴까? 난 왜 저렇게 못하지?” 와 같은 질문들은 “난 안 되네” 등의 확답형으로 바뀌어가고 자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마냥 자기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세대의 자학은 곧 세상에 대한 불평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방식은 동시에 세상에 대한 냉소도 동반하며, 이 냉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저항의 형식 중 하나다.
어떤 이들은 그깟 냉소로 무슨 저항을 할 수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세상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사리분별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분간은 올바른 행동의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대개 그런 자들은 무언가를 시험 삼아 대충 한번 해보고 포기해본 사람들이 아니다. 자학과 냉소는 자신들이 어떤 일에 관하여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실패해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다. 그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기 연민과 무조건적인 비관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자학하는 자들은 다시 일어선다. 또다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절망하고 비웃음으로써 세상에 저항한다. 영화 <그린랜턴>으로 망했던 라이언 레이놀즈지만, 거기서 멈췄다면 데드풀은 없었을 것이다. 데드풀이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 그대로 체념해버렸다면 자신의 사랑 바네사를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심한 폭력에 못 이겨 결국은 폭주해버린 어린 엑스맨을 데드풀이 그냥 포기해버렸다면 한 아이의 인생은 비극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절망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절망을 딛고 어떻게 나아가느냐, 그 태도가 냉소로 점철된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동력이다. 데드풀은 이런 삶의 방식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고 함께 하자며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다른 방법이 있나, 이렇게 멋진 애가 손을 내밀면 잡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