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에 찾아온 첫 번째 겨울의 조각
겨울밤이면 언제나 가습기를 틀었다.
그해의 달력이 몇 장 남지 않은 날부터 거실에는 무식하게 큰 회색 가습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딸만 셋, 엄마까지 도합 여자가 넷인 집의 겨울은 감기가 한 번 돌면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갔기 때문에 아빠는 초저녁부터 가습기의 물을 빵빵하게 채웠다. 짙은 회색의 가습기는 밤새, 겨울 내내 퐁글퐁글 습도를 뱉어냈다. 가열식 가습기는 몽글몽글 하얀 김을 밤새 쏟아냈는데, 따뜻한 방바닥의 온도와 세 자매의 부산스러움이 합해져 거실 창은 항상 부옇게 김이 서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겨울이 빚어낸 성에인지, 가습기가 뱉어낸 김이 서린 건지 따끈따끈한 온도가 그대로 만져질 만큼 희부연 풍경을 만들었다.
세 자매의 취침 시간은 9시였다. 엄마는 세상이 끝나는 시간을 9시로 정해놓고 세 자매를 이부자리로 몰아넣었으나 호락호락 잠드는 애가 하나도 없었다. 첫째가 둘째랑 속닥이다 혼나고 둘째가 잠드는 셋째를 흔들어 깨우다 혼나는 식이었다. 첫째는 이부자리에 심드렁하게 누워서 둘째나 셋째에게 불을 꺼라, 물을 떠 와라 등의 K-장녀식 갑질을 틈틈이 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9시에 세상이 끝나면, 까만 어둠 속에서 따끈한 바닥을 손등으로 만지며 노곤 노곤 잠에 들었다. 자고 싶지 않다고 속살거리며, 미래에 어떤 어른이 될지 예상도 못 한 채 웅크리고 또 웅크렸다.
머리맡에는 동생이 하루 종일 먹은 귤껍질이 산처럼 쌓여 있을 때가 있었는데, 그래서였는지 동생에게서는 겨울 내내 귤 냄새가 났고 손발은 예쁜 노란색이었다. 한겨울에도 손이 따뜻했던 나는 가끔 잠든 동생의 찬 손바닥을 가만 쥐었다 놓았다. 끌어안고 잘 만큼 친한 사이는 절대 아니어서, 그러나 이따금 너무 작은 동생이 애틋하고 짠할 때가 있어서 차가운 손바닥을 가만 쥐었다 놓곤 했다. 위로 언니가 둘인 막둥이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어른이 되었으며,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영어 아티클을 한국어처럼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이불에 둘러싸여 희부연 연기나 얼굴로 맞는 장난이나 치며 잠들었던 아이들이었다.
평온하고 지루했던 그 겨울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방바닥에서 달큰하게 올라오던 바닥의 온기에 뺨을 비비며 늦잠을 몰아내고, 엄마에게 어린양을 하며 밥을 먹여달라고 하던 어린 짐승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시간이 무상하다고 생각한다. 결코 풍족한 시간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해직 교사 부부가 아이 셋을 기른다는 건 불가능한 챌린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는 철없게도 그 겨울 내내 늘 출근하던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아빠가 노조 사무실에서 월에 50만 원을 벌어오면 엄마는 천재적인 야무짐으로 삶을 꾸렸고, 되돌아봤을 때 그 겨울 배가 고프다거나 부족했던 기억이 하나도,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저 스팀다리미처럼, 노천 온천탕의 온기처럼 평온했던 추억뿐이다.
나이를 먹으니 조금은 알겠다. 그 안온한 겨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엄마와 아빠는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과 불안으로 지새워야 했을지, 지친 등을 새우처럼 말고 낮잠을 자던 엄마는 얼마나 피곤했을지. 감히 짐작해 보지만 도저히 그렇게 살아갈 자신은 없다.
요새도 거대한 가습기를 보면 그때의 투박한, 가열식 가습기가 떠오른다.
딸 셋은 장성하여 첫째는 결혼해 예쁜 알파카 같은 딸 둘을 낳았고 둘째는 하루가 멀다고 야근하며 삶을 싸워내고 있으며 막내는 이역만리 타지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막내는 겨울이면 귤을 까던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이제 맥주 캔을 딴다. 세월이 무상함을 느낀다. 그러나, 무상한 시간이 흐르고 내가 남아 우리를 기억하고, 내 어린 날을 거울처럼 들여다본다.
잔병치레가 심하고 마음이 너무도 유약해 엄마가 등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둘째는 이제 170 넘게 자라 회사에서 팀을 이끌고 주말마다 술을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겨울이 품어낸 아이들은 각자의 삶을 빠르게 살아낸다. 10년 뒤의 나는 또 올해 겨울을 추억하며, 그때 참 힘들고 좋았다고, 되새기게 될 것이다. 시간이란, 지나간 장면이란 늘 그렇게 기억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