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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ul 03. 2024

선생님은 시험관이 안된다고 하셨어 1

“일 년 지나고 오세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서른아홉에 결혼을 했다. 결혼이 늦었지만 딩크족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아이는 꼭 낳고 싶었다. 늦은 나이에다가 주말부부였으니 자연임신을 기다리기가 답답했다. 결혼하고 석 달쯤 지나 유명하다는 난임병원을 찾아갔다. 시험관 시술을 바로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했다. 시험관 시술은 난임이 확정돼야 가능하고, 그러려면 결혼 후 일 년이 지나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갔을 때 이미 마흔이었다. 생체시계의 가임기간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내게는 한 달이 천금같은데 일 년이나 지나고 오라니. 마흔이라는 나이를 들먹이며 그냥 바로 시험관 시술을 해 달라고 졸랐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이 때 다른 병원을 찾아가서 배란유도제라도 맞았더라면 임신이 좀 더 빨랐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내돈내산으로 시험관을 하겠다는데 그마저도 안된다니 속상해서 병원 대기실에서 엉엉 울다가 집으로 왔다.


그리고 한 달 뒤,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주말부부 생활은 접고 남편이 있는 세종시로 내려갔다. 이제 나의 모든 관심과 노력을 임신과 출산에 쏟으리라 생각하며. 전업주부가 되면 편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1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에 있으니 뭔가 자존감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퇴직금이 있어도 월급이 없으니 마음이 불안해졌다. 자유시간이 있다는 것,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보다 내 명함이 없다는 것, 내 일이 없다는 것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 옷은 거의 다 출퇴근용이라 동네 마실용으로 다니기에는 너무 포멀했다. 출퇴근이 하고 싶었고, 사람들과 업무 얘기를 하고 싶었고, 문서 작업이나 회의를 하고 싶었다. 나는 요리에는 재능이 없고 내게 집안일은 재미가 없었다. 내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그 무언가가 이제는 임신이었다. 살아오며 뭐든 진득하게 하기보다는 벼락치기로 후다닥 해 왔는데 아기는 벼락치기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갑자기(?) 아기가 생기는 경우도 꽤 있지만 마흔에는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이었다.


시험관 퇴짜를 맞지 않았더라면 임신이 빨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건 그 퇴짜를 계기로 임신 대신 이직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일을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임신이 되지 않는 불안감을 다른 불안감으로 잠재워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퇴사를 만류하는 직장 상사분들, 동기들에게 임신준비를 하겠다며 당당히 회사를 나온 지 3개월 만에 나는 다른 회사의 합격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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