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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ug 17. 2023

<오펜하이머> 트리니티, 삼체문제 그 자체인 영화

물리학에서는 '삼체문제'라고 불리는 난제가 있다. 세 물체 간의 궤도운동과 중력작용에 대한 것인데, 두 개의 물체 간의 문제인 '이체문제'는 비교적 간단하나 '삼체'가 되면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에 예측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이 삼체문제는 물리학에서도 손에 꼽히는 난제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세계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하탄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하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지만, 그 사건의 이야기들을 마치 삼체문제처럼 세 개의 힘이 작용하는 이야기들로 구성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세계 첫 원자폭탄 실험은 오펜하이머에 의해 '트리니티 실험'으로 명명된다. 이에 대해 사실 오펜하이머는 별다른 중요한 언급은 없다. 다만 트리니티는 삼위일체라는 뜻으로, 나중에 오펜하이머가 회상하기를 중세 영국 시인인 존 던의 죽음과 부활을 노래한 시 <거룩한 소네트> 14장의 첫 구절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Batter my heart, three-person'd God(내 심장을 두드려라, 삼위일체의 신이여)'. 오펜하이머는 유대인이지만, 양자역학계의 물리학자로써 그다지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걸 생각하면, 삼위일체 - 즉 삼체가 가진 심오함을 비유해 짓지 않았을까?


그 당시의 사회, 국가 간의 힘, 오펜하이머 주변의 사람들, 오펜하이머 자신의 일 등은 모두 천재 오펜하이머라도 그만큼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교차편집의 달인답게, 세 가지의 사건을 시간과 소리와 영상을 뒤섞어서 만들어냈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혼란스러워도 그건 정상이라는 말이다. 보통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신의 영화 <프레스티지>처럼 두 개의 다른 시간대를 교차편집하는데, 여기서는 세 개의 사건을 한 번에 편집하고 있으니. 마치 영화 자체가 또 하나의 삼체문제인 것처럼.




영화를 구성하는 세 이야기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인생의 가장 큰 굴곡이라고 하면 단연 맨하탄 프로젝트(1943~1945)와 오펜하이머 안보 청문회(1954)다. 당시에는 핵이 쪼개지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낸다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로, 전쟁 중인 세계는 당연히 그것으로 폭탄을 만들 생각에 빠지게 된다. 맨하탄 프로젝트는 '나치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면 안 된다'라는 명제아래 미국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고 범국가적으로 과학자를 모아서 한 원자폭탄 프로젝트다. 연구소 소장이었지만 이 맨하탄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과 군인들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한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


오펜하이머 안보 청문회는 맨하탄 프로젝트 9년 뒤에 일어난 일이다. 2차 대전 종식 후, 세계의 위협은 이제 독일 나치가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가 되어있었다. 급격히 힘을 키운 소련은 그들이 정복한 동유럽권의 과학자들을 섭렵해 군사화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47년에는 소련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나치를 견제하기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했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위력이 센 수소폭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처음 개발된 핵폭탄인 원자폭탄은 중성자를 쏴서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깨트리는 핵분열 폭탄이고,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으로 수소 핵융합을 일으켜 폭발시키는 핵융합 폭탄이다. 따라서 수소폭탄을 만들려면 원자폭탄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위력도 원자폭탄의 수십~ 수백 배에 이른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텔러(베니 사프디)가 수소폭탄을 같이 개발하자고 했지만, 오펜하이머는 이를 반대한다. 따라서 수소폭탄을 개발하고 싶은 에드워드 텔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오펜하이머는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2차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의 대립이 심해지던 때에는 비공개 보안 청문회를 열어, 국민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의 공산주의 이력이나 불륜 등의 이력을 문제 삼아 사실상 그를 정치적으로 추락시킨다. 오펜하이머는 간첩과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오펜하이머가 복권된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다.


하지만 이런 오펜하이머의 성공과 추락 뒤에 감춰진 인물이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원자력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주목한다. 이 영화의 흑백화면은 스트로스의 시선이다. 스트로스는 1958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장관으로 내정되고, 그 임명 투표를 위한 상원의원들의 청문회가 시작된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가 그렇게 된 것에 자신도 타격을 받았다며, 오히려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음해하고 다녔다고 하소연한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맨하탄 프로젝트', '오펜하이머 안보 청문회', '스트로스 청문회' 세 가지의 사건을 삼체문제처럼 교묘하게 편집해 놓았다. 그 세 사건들은 시간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는 사건들이다. 세 가지의 사건들은 오펜하이머를 알 수 없는 미래로 데리고 간다.



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의 힘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세계는 세 가지의 힘이 대립하고 있었다. 파시즘의 나치로 가득 찬 독일, 공산주의로 뭉친 소비에트 연방,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이 그것이다. 세 가지의 큰 힘들이 충돌하는 세계는 삼체문제처럼 예측하기 힘들었다. 나치 파시즘의 독일에서는 유태인이 득실대는 미국과 서유럽이 악이었고, 평등을 가치로 삼는 공산주의에서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돈의 노예라며 적대시했다. 미국은 그들을 세계의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위협하는 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독재 파시즘과 싸우는 중에는 평등을 가치로 하는 공산주의가 꽃피울 시기였으므로, 미국에서도 노동운동을 하는 공산당 세력이 커질 때였다. 나치는 소련도 위협하고 전쟁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등 서방세력과 손을 잡고 독일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한시적으로나마 세 힘중 두 힘이 손을 잡았으니, 하나 남은 독일은 급격히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의 힘이 소련과 미국으로 양분되면서, 세계는 냉전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세계에 두 힘만 있다면 두 힘은 엄청난 견제와 싸움으로 날카롭게 대립하다 결국 폭발한다. 냉전시대에 세계는 언제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싸여있었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라는 말이 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제안한 계책으로, 천하를 삼등분해야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또한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왕의 세 가지의 힘 - 돈, 명예, 권력이 서로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세 다리가 있는 솥 정(鼎) 자에 비유했다. 세 다리 중 하나가 무너지면 솥이 엎어진다. 솥을 고친다는 뜻의 정혁(鼎革)이 혁명을 일으켜 새 왕조를 세운다는 뜻을 가진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에서도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권력기관을 세 곳으로 나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를 안정적인 국가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고 민주주의의 정치가 시끄러워지는 요인 중에 하나다.


결국 세 힘이 대립하면 예측할 수 없으므로 불안하기도 하지만, 가장 안정적이기도 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세 힘이 격정적으로 부딪히던 시기의 사람이다. 유대인인 그는 나치를 싫어했다. 하지만 부인과 동생이 공산당원이었고, 그 또한 노동운동을 한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군사력 1위가 되도록 만든 영웅이기도 하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격정적인 세 힘이 대립하며 혼돈에 빠진 세계를 잘 그려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오펜하이머의 삼각관계

오펜하이머에게는 두 여자가 있었다. 결혼 전 연인이자 심리학자였던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과, 그의 부인인 키티 오펜하이머(에밀리 블런트)다. 진이 오펜하이머와 결혼하기를 꺼리고 독특한 성적취향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키티와 결혼하게 된다. 키티와 처음 사귄 것도 키티가 결혼해 있을 때 저지른 불륜이었고, 진과도 불륜관계를 이어간다. 진이 죽고 나서는 같은 맨하탄 프로젝트에 있던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의 과학자문인 리처드 톨먼의 부인, 루스 톨먼과도 바람을 피웠다. 사실 오펜하이머의 주변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삼각관계는 끊임이 없이 유지되었다. 그의 사랑은 삼체문제 그 자체다.


그 중에서도 오펜하이머는 결혼 후에도 진과 계속해서 관계를 가지며, 그녀를 자신의 영감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특히 진과의 섹스 도중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읽게 하는 부분이 그것을 잘 드러낸다. 그 구절은 나중에도 오펜하이머가 스스로 인용하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그러니 진의 죽음은 오펜하이머에게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키티는 그런 그를 미워했지만, 계속해서 함께 그와 같이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는 그의 삼각관계가 키티에게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진을 사랑했고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사람들에게 벌거벗겨 모든 것이 까발려진 오펜하이머. 그만큼 그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에게 치욕적이었으며, 부인인 키티에게는 더한 수치를 주었다.


학생들이나 과학자들에게 인격적으로 존경받던 오펜하이머는, 여자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훌륭하지 못했다. 영화는 그런 그의 모습을 불편한 섹스씬 표현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무엇이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는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항상 불안정한 삼각관계를 원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그 불안정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끊임없이 불안정함을 갈구한다.



세 가지 정체성을 가진 오펜하이머

과학자로서의 그는, 핵분열로 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양자역학이 원자와 미시세계를 다루는 학문인만큼, 트리니티 실험은 그 세계를 한층 더 잘 이해하는 다시없을 실험인 것이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누가 이런 천문학적인 돈과 자원을 지원해 가며 마음껏 실험할 수 있게 하겠는가? 과학자로서 보자면 천혜의 기회인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유대인을 말살하는 나치에 대한 단죄하려는 생각이 컸다. 나치가 전쟁에 지고 나서도, 그는 아직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데에 동의한다. 그것이 전쟁에 나간 수백만의 미국 청년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끄는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역시나 그 역량을 보여준 후 그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후, 그는 과학자나 정치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오펜하이머가 된다. 자신이 수십만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원자폭탄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소폭탄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의 내면에 갇힌 미시세계에 대한 탐구심, 힘의 증폭, 양자역학의 불안정성원리와 실세계의 불안정성, 모든 것이 영화 내에 소리와 영상과 이미지의 어긋난 조합으로 그려진다. 그만큼 그의 내면에서는 그 불안정한 세 오펜하이머가 계속해서 삼체문제처럼 불안정하게 대립한다.


과연 오펜하이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것을 말할 때 오펜하이머의 이 세 가지 측면을 모두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의 안에서는 세 명의 오펜하이머가 계속해서 힘을 주고 받으며 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삼위일체, 트리니티 실험은 성공한 것일까?

트리니티 실험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도 세 가지였다. 폭탄이 터지지 않거나,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지거나, 대기가 연쇄반응을 일으켜 지구가 전부 불타버려 세상의 종말이 오거나. 오펜하이머는 마지막 결과를 두려워해서 아인슈타인에게 확인하러 간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이 수학을 못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웃기긴 하지만 사실이다. 그는 상대성이론의 식 완성을 자신의 친구 수학자에게 부탁했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수학을 잘하긴 한다.


아무튼, 오펜하이머는 계산결과 마지막 대기 연쇄반응이 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결정 내린다. 그리고 실제로 트리니티 실험결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훌륭한 폭탄으로써 성공적으로 실험을 마쳤다. 어디까지나, 실험 그 자체로 보자면 그렇다. 그러나 이 핵실험의 성공으로 이어진 결과들은, 그 방정식이 말하던 연쇄반응과도 같다. 이제 세상은 그 힘을 가지기 위해 싸울 것이고, 자신을 멸망시킬 힘을 가진 인류는 더욱더 큰 폭탄의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할 것이다. 양자역학은 확률의 학문이다. 핵실험의 결과가 세상의 종말이라는 결과는 제로에 가까웠으나, 이젠 점점 높아지고 있다. 확률이 높은 쪽으로 세상은 흐르게 되어있다. 그것이 열역학 제2 법칙이다. 트리니티 실험은 어쩌면 마지막 결과를 일으킨 것일지도 모른다.







*트리니티 핵실험이 생각보다 담백하게 그려져, 기대에 미치지 않았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그것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가 아닐까?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에 대해 가지는 죄책감으로 보면, 원자폭탄의 폭발이 엔터테인먼트 감성으로 소비되는 것을 최대한 절제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실화 사건을 다루는 영화들이 그 영화의 사고장면을 영화적으로 '즐길 수 있게' 연출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하다. 또한, 이 영화 자체를 편집을 통해 핵폭탄처럼 만들었으므로 CG없이 핵폭탄을 만들었다라는 말도 맞다.

*영화의 러닝타임 또한 정확히 3시간이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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