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하나 짜리 아파트먼트에 유학생 신혼부부의 소꿉 같은 살림이 단출하게 차려졌다.
분명 뭐가 많았는데 칸칸이 제자리를 찾아주고 보니 휑했다. 집들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부를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없으니.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3 수험생을 방불케 하는 대학 캠퍼스 생활 1년 차에 들어갔고 나는 주로 집에 혼자 남아 지냈다.
깨우는 사람도 없으니 느긋하게 일어나서 주섬주섬 하루를 시작했다. 창 밖에는 나무로 지어져, 조금 과장하자면 상자 곽 같은 네모진 집들이 바둑 판 도로 위에 심심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캘리포니아는 지진대여서 나무로 집을 짓는다고 했다.
땅이 넓어서인지 모든 게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있어서, 가까운 주변 마켓에 갈 때에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지라 동네에서 사람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없었지만 이따금 씩 들려오는 이웃들의 영어와 스페니쉬 말소리는 정말 내가 낯선 이국에 뚝 떨어져 와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언젠가 외국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직감했던 걸까? 그때까지 나는 굉장히 꾸준히 영어를 공부해 왔다.
제일 처음 영어를 배운 것은 중학교 때. 첫 영어 수업을 위해 선물 받은 시사영어 카세트테이프를 애지중지하며 닳고 닳도록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이야 각종 시청각 영어 콘텐츠들이 내 손 안에서 펼쳐지고 외국인 튜터들과 어디서든 화상으로 수업을 받을 수 있지만 그때는 어학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무척 귀했다. 마그네틱 테이프가 재생해 주는 이국의 언어가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입시를 거치면서 엄청 난 양의 단어들을 기계처럼 외워야 했고 어느 순간 배운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영어 독해들을 감당해야 했다. 또 미국으로 떠나기 2년 전부터는 한 때 유명했던 강남의 모 어학원에서 원어민과 함께 하는 새벽 강의를 듣고 출근을 할 정도로 나는 영어에 진심이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듣는 언어는 분명 소리도, 속도도, 실린 감정도 아주 생소한 다른 언어 같았다. 그때까지 단어 암기, 듣기, 읽기, 약간의 말하기를 따로따로 하고 있었던 나에게 현지의 영어는 마치 2D에서 3D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제 껏 익힌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연극 대사처럼 내 안에서 계속 리플레이되고 있었지만 슬프게도 극과는 상관없는 잘못된 대본을 대뇌는 것처럼 영 쓸모가 없어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다소 안전한 언어 영역에 머무는 법을 터득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사러 상점에 들어갔는데 점원이 웃으며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가 물어보면 "no"라고 짧게 대답하는 것이다. 표정을 최대한 무표정하게 유지해야 말이 길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thanks를 붙이는데 이게 참 가성비가 좋은 말이다. "고맙지만 괜찮아요"라는 부드러운 거절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상황과 상관없이 튀어나와서 곤란할 때가 있었지만 대체로는 그랬다. 대신 나는 무척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적어지니 성격도 바뀌는구나 싶었다. 내가 바라고 상상했던 외국 생활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지만 모든 게 바뀐 환경 속에서 면피할 수 있는 얼마간의 방어기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외부 소리와 티브이, 라디오 소리 등은 일방적인 출력이라 못 들어도 어쩔 수 없고 꼭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좀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처럼 쌍방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해야 하는 대화의 상황은 늘 가슴을 졸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최고 난도는 단연 전화 통화가 아닐까 싶다.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재빠르게 판단을 한 뒤 그에 응하는 대답을 어색하지 않은 타이밍에 또렷한 말로 송신해야 매끄럽게 진행되고 끝이 난다. 또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추측할 기회도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순발력과 집중력을 상당히 요하는지라 정말이지 매번 테스트를 보는 느낌이었다. 광고성 전화는 왜 그리 자주 오는지..... 어떤 때는 집중이 딸려서 질문은 듣지도 않고 아무 생각없이 "yes"와 "no"를 번갈아 송신하곤 했는데 요행히 잘 흘러가다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듯 정적이 흐르곤 했다.
과연 나는 레벨 없는 이 커리큘럼을 잘 따라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