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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3. 2022

'포크 음악으로 이끈 반전운동' 밥 딜런

 1960년대 들어 미국 사회는 격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성세대들에게는 국가를 위해 기꺼이 전쟁에 참여하고,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과 달리 1960년대 젊은이들은 반전 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흑인들은 차별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1950년대 말부터 흑인들 사이에서는 ‘싯인운동’이 유행했다. 싯인운동이란 백인 전용식당에 흑인이 들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음식을 주문하는 일종의 비폭력 시위였다. 1960년 2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 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싯인운동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흑인들이 거리에 나와 그들의 권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흑인 운동의 절정은 1963년 8월 28일 열린 워싱턴 대행진이었다. 이날 25만 명의 시위대가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 앞에 모여 인종차별 철폐를 외쳤다. 행진에 참여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옛 노예의 아들과 옛 주인의 아들이 함께 식탁에 앉는 꿈입니다”라는 역사에 남을 연설을 남겼다.  

   워싱턴 대행진에는 사회운동가뿐 아니라 많은 음악가들도 함께했다. ‘가스펠의 여왕’ 마할리아 잭슨을 비롯해 마리안 앤더슨, 피터 폴 앤 메리, 존 바에즈 그리고 밥 딜런이 행진에 참여해 노래를 불렀다. 흑인인 마할리아 잭슨과 마리안 앤더슨의 참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포크 음악가인 피터 폴 앤 메리, 존 바에즈, 밥 딜런은 모두 백인이었다. 1960년대 포크 음악은 인종과 관계없이 사회적 약자라면 누구나 외칠 수 있는 저항음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밥 딜런은 이런 포크 음악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당시 포크 음악은 대부분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보컬 정도로 이루어지는 소박한 음악이었다. 딜런의 음악도 소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가사에는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딜런의 음악이 유명세를 탄 것은 아니었다. 1962년 3월 발매된 그의 첫 앨범 《Bob Dylan》은 겨우 수백 장만 팔리는 부진한 기록을 남겼다.  

   이듬해 발매된 두 번째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이 발매되자 대중들은 환호했다. 앨범 커버는 딜런과 그의 당시 애인 수즈 로토로가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 그런가 하면 음악은 평범하지 않은 정치적인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전세계 사회적 약자들이 딜런의 음악을 들으면서 저항의 움직임을 보였다.  

 
 

  ‘사람은 얼마나 많이 걸어야 사람으로 불릴 수 있을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항해해야 모래 위에서 잘 수 있을까. 포탄은 얼마나 많이 날아가야 영원히 금지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서 날아가고 있어. 대답은 바람 속에서 날아가고 있어.’ - <Blowin' in the Wind>  

 
 

   딜런은 1963년 7월 학생비폭력실천위원회(CNCC)의 흑인 투표권 등록 집회 현장에 참여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딜런의 앨범이 성공을 거뒀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전국적 유명인사가 아니었고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도 크게 알려진 존재가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The Freewheelin' Bob Dylan》에 환호하자 딜런도 이에 화답하며 그들의 움직임에 동참한 것이다. 사실 딜런이 수십 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하면서 사회운동 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은 많지 않다.  

   딜런이 젊은이들을 막 움직이기 시작한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40대 젊은 대통령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를 지지했던 젊은이들이 선장 잃은 선원처럼 우왕좌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중들은 케네디 대통령을 잃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사회의 변화를 이끌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1964년 3월 발매된 딜런의 세 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은 그런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 앨범에서 인종, 빈곤 등 사회의 부정적 이슈를 다루면서 대중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젊은이들은 딜런의 음악을 들으면서 앞날을 논의했고, 딜런의 가사를 보면서 집단행동을 벌였다. 그들에게 딜런의 가사는 젊은이들의 지향점 그 자체였다.  

 
 

  ‘펜으로 예언하는 작가와 비평가들이여 모여라. 눈을 크게 떠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바퀴는 여전히 돌고 있으니 섣부르게 말하지 마라.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패자가 나중에는 승자가 될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딜런은 가수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로버트 짐머만으로 밥 딜런은 시인 딜런 토마스로부터 따온 예명이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비교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존 바에즈, 피터 폴 앤 메리 등 다른 포크 음악가들도 딜런과 함께 정치사회적인 가사를 썼고, 특히 바에즈는 딜런과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들은 포크 음악이 사회운동에서 일정 역할을 할 때마다 자부심을 느꼈고, 희망찬 내일이 올 것으로 믿었다. 

   실제 포크 음악이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1964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UC버클리)는 학생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학칙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일명 ‘자유언론운동’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집회를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은 집회 현장에서 포크 음악을 불렀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도 포크 음악이 울려 펴졌다. 1965년 3월 7일, 흑인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대 약 600명이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87km를 행진하려 했지만 경찰의 제재로 행진은 중간에 멈춰야만 했다. 이틀 후인 3월 9일, 약 2500명의 시위대가 다시 행진을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행진을 방해해 끝내 행진을 진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위대들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3차 행진을 강행했다. 3월 21일 출발한 2만 5000여 명의 시위대는 3월 25일 몽고메리주 의사당에 입성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행진을 계속하던 3월 24일 밤, 시위대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작은 공연을 열었다. 이날 공연에는 피트 시거, 해리 벤라폰테, 피터 폴 앤 메리, 존 바에즈, 차드 미첼 트리오 등 포크 음악가들이 함께했다. 이밖에 토니 배넷, 프랭키 레인,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니나 시몬 등 다양한 음악가들도 참석했다.   

   이 시기 <Blowin' in the Wind>와 더불어 시위대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We Shall Overcome>이다. 본래 찬송가였던 이 곡은 1948년 피트 시거가 출판한 악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특유의 가사 덕에 집회 장소에서는 항상 <We Shall Overcome>을 들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이름으로 번안돼 1970년대 학생운동 현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포크 음악은 국가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딜런을 향한 대중들의 관심은 뜨거웠지만 딜런의 생각이 대중들과 꼭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대변인이 되기보다는 음악가이기를 원했다. 가사보다는 음악성으로 평가받기를 원했고, 음악 외적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런 딜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963년 12월, 좌파단체 긴급시민비상위원회(ECLC)는 시민운동에 노력한 공로로 딜런에게 톰 페인 상을 수여했다. 딜런은 상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감을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저에게 더 이상 흑인과 백인, 좌파와 우파는 없습니다. 위아래만 있고 아래는 땅과 매우 가깝습니다. 저는 정치와 같은 하찮은 것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자 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일반인들이 언제 상처를 입는지 생각합니다. 저는 ECLC로부터 톰 페인 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저는 제 이름을 상에 새기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흑인 집단 등 다른 집단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습니다” 

   음악적 욕구가 강했던 딜런은 대변인의 역할보다 음악 창작이 우선이었다. 1964년 8월 딜런이 비틀즈를 만나면서 그의 음악적 욕구는 더 강해졌다. 비틀즈가 딜런의 가사를 보고 감탄했다면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성과 연주에 감탄했다. 더 이상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현실적으로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로 보여줄 수 있는 음악에도 한계가 있었다. 

   1965년 7월, 미국 뉴포트에서 포크 음악 대축제인 『Newport Folk Festival』이 열렸다. 전국 규모의 포크 축제인 만큼 헤드라이너는 당연히 딜런의 몫이었다. 이날 딜런은 가죽잠바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비틀즈 스타일로 나타났다. 그가 무대에 들고 올라온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가 아니라 펜더 일렉트릭 기타였다. 뿐만 아니라 알 쿠퍼가 오르간에 앉았고, 마이크 블룸필드가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딜런 옆에 섰다. 이날 딜런이 연주한 음악은 그간 포크 팬들이 봐온 어쿠스틱 사운드가 아닌 일렉트릭 사운드의 음악이었다. 

   이를 지켜본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사회를 본 피트 시거는 욕설을 하며 전깃줄을 끊으려 했다. 포크 음악가들에게 어쿠스틱 사운드는 순수성의 상징이었고, 일렉트릭 사운드는 상업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딜런의 공연이 포크 애호가들에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황한 공연 관계자들은 딜런에게 어쿠스틱 사운드를 요청했고, 마지못한 딜런은 <It's All Over Now, Baby Blue>를 불렀다. 하지만 관중들에게는 이 노래마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무언가가 너를 부르고 있어. 디딤돌은 내버려둬. 네가 버린 죽은 사람들은 잊어. 그들은 너를 따르지 않아. 네 문을 두드리는 방랑자는 네가 입었던 옷 속에 서있어. 새로운 걸 시작하자. 다른 경기를 하자. 이제 다 끝났어. 베이비 블루.’ - <It's All Over Now, Baby Blue> 

 
 

   딜런이 1965년 8월 발매한 앨범 《Highway 61 Revisited》에서도 어쿠스틱 사운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포크 음악가 딜런의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딜런을 떠났다. 그렇지만 딜런은 이대로 추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딜런은《Highway 61 Revisited》 발매 이틀 전 포레스트 힐스 테니스 경기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과 마찬가지로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섰지만 이날 공연에서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일렉트릭 사운드와 결합한 포크 음악에 관중들의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록 음악 팬들이 딜런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록 음악은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록 팬들에게 딜런의 메시지가 신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딜런의 음악은 포크록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해 대중음악 주류에 들어섰다.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시작하면서도 포크의 기본 정신까지 포기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딜런의 핵심은 여전히 저항정신이었다. 딜런의 대표 곡으로 꼽히는 <Like a Rolling Stone>도 《Highway 61 Revisited》에 수록된 곡이다. 뒤이은 앨범 《Blonde on Blonde》도 빌보드 차트 9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이때가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딜런의 최전성기였다.  

 
 

  ‘가진 게 없으면 잃을 것도 없어. 너는 이제 투명인간. 숨길 비밀도 없어. 기분이 어때? 집으로 가는 길도 잃고, 완전히 잊혔어. 스스로 서는 게 어때. 구르는 돌처럼 말이야.’ - <Like a Rolling Stone>  

 
 

   1966년 7월, 딜런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 사고를 계기로 딜런은 휴식을 취하면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앞서 1965년, 딜런은 플레이보이 클럽 버니 출신인 세라 로운즈와 결혼했다. 지금까지 음악을 통해 명성을 얻는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휴식을 취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딜런은 훗날 자서전 『Chronicles : Bob Dylan』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이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외부에서 보는 내 이미지가 좀 더 혼란스럽고 평범한 것이어야 했다. 제거해야 할 것은 어떠한 형태의 예술적인 자기표현이었다. 예술은 삶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딜런은 1967년 12월 앨범 《John Wesley Harding》을 통해 복귀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전통 포크도 아니고 포크록도 아닌 또 다른 음악이었다. 사운드는 어쿠스틱 사운드였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다. 물론 딜런 특유의 비판적인 사고는 어디가지 않았고, 빌보드 차트 2위, 영국 차트 1위를 거두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1969년 발매한 컨트리풍 앨범 《Nashville Skyline》 역시 빌보드 차트 3위, 영국 차트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차트 성적과 관계없이 딜런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더 큰 자극과 급진적인 모습을 원했지만 이제 딜런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대신 딜런은 세대와 아우르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에도 딜런의 앨범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고 그의 공연은 늘 만원이었다. 딜런 개인적으로도 영역을 넓혀 영화에 진출하는가 하면 흑인 문화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딜런이 포크 본연의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1982년 탈핵을 촉구하는 『Peace Sunday』 공연에 참여했다. 캘리포니아 로즈 보울 경기장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약 8만 5000명의 관중이 들어섰다. 이날 딜런은 존 바에즈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불렀다.   

   1985년에는 밥 겔도프가 기획한 <We Are the World> 녹음에 참여했다. <We Are the World>는 대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돕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곡으로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폴 사이먼, 신디 로퍼 등 유명 음악가들이 함께했다.  

 
 

   어떻게 보면 딜런이 사회운동 최전선에 섰던 건 아니다. 사실 그가 집회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별로 없었다. 일각에서는 딜런의 매니저 알버트 그로스맨의 홍보 전략이 맞아 떨어졌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딜런의 거친 목소리, 시적인 가사 등을 내세우고 인터뷰는 최소화하면서 일명 신비주의 전략을 썼다는 것이다.  

   1966년 딜런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목이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오히려 단순히 오토바이에서 균형을 잃어 넘어졌을 뿐이라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사고 당일 인근 병원에서 구급차가 출동했다는 기록도 없다. 딜런 스스로도 2000년대 이후로는 본인의 부족함을 수차례 인정했다.  

   하지만 딜런의 행보가 진심이었든 홍보 전략이었든 대중이 그에게 열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집회 현장에서 딜런의 음악이 흘러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포크 음악은 격변의 1960년대를 지낸 대중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고, 그 중심에 선 딜런의 역할은 미국 현대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딜런의 영향을 받은 가수도 한둘이 아니다. 딜런이 포크록을 시도한 후 버즈, 사이먼 앤 가펑클, 소니 앤 셰어, 마마스 앤 파파스, 도노반 등 여러 가수들이 포크록을 연주해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딜런의 영향을 받은 덕인지 반전운동에 앞장섰고 소수자를 응원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딜런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다른 가수들이 그의 뜻을 세상에 대신 전달한 셈이다. 포크록의 대표적인 반전 곡으로는 버즈의 <Draft Morning>, 사이먼 앤 가펑클의 <Scarborough Fair>와 <7 O'Clock News/Silent Night>, 도노반의 <The War Drags On> 등이 있다.  

   딜런은 누구보다 팬들을 사랑하는 음악가였다. 그는 1988년부터 2019년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Never Ending Tour』라는 이름의 세계 순회 공연을 다녔다(2020년은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않았다). 2010년과 2018년 『Never Ending Tour』에는 한국도 포함됐다. 2016년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유도 단순히 그의 가사가 예술적이어서가 아니다. 미국 시사 주간지 『Time』의 평을 들어보자.  

 
 

  ‘딜런의 노래는 시민운동의 중심을 관통하면서 정의의 원동력이 됐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의 시위대들은 딜런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딜런의 노래는 워싱턴 대행진 당시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서두에도 등장했다. 이러한 영향력이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었다. 2016년 노벨상은 비범한 삶의 최고의 성과라 할 수 있다.’ - 2016년 12월 10일『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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