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필모어 오디토리엄에서 공연이 열렸다. 이날 공연의 시작은 R&B 그룹 영 래스컬스가 장식했고, 이어 사이키델릭 그룹 소프위드 카멜의 연주가 이어졌다. 세 번째 무대에는 도어즈라는 그룹이 등장했다. 도어즈는 막 첫 앨범 《The Doors》와 첫 싱글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를 발매한 신인 그룹이었다. 당시 공연 마지막 순서는 가장 급이 떨어지는 음악가가 나오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이날 가장 관심을 끌었던 그룹은 단연 도어즈였다. 도어즈는 첫 곡으로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를 연주해 관객을 사로잡았고, <Light My Fire>라는 곡으로 관객들을 홀려버렸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도어즈에 대한 소문은 샌프란시스코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일주일 후 필모어 오디토리엄은 다시 도어즈를 초대했다. 이번에도 도어즈는 그레이트풀 데드, 주니어 웰스 시카고 블루스 밴드에 이어 세 번째 순서였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당시 큰 인기를 구사하던 사이키델릭 그룹이었지만 이날도 최고의 인기는 도어즈의 차지였다.
도어즈의 음악은 기타리스트 로비 크리거와 키보디스트 레이 만자렉의 몽환적인 연주 그리고 보컬 짐 모리슨의 독특한 창법이 섞인 사이키델릭 음악이었다. 1960년대 중후반은 사이키델릭 음악이 대세였던 시기로 비틀즈, 롤링 스톤즈, 비치 보이즈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도 사이키델릭을 연주했다. 도어즈는 차트 성적으로 이들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모리슨의 반항끼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지금도 1960년대 후반 최고의 반항아를 꼽으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리슨을 택한다.
데뷔 전 모리슨은 시를 좋아하던 대학생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술을 마시며 온갖 말썽을 부리는 등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1962년 세인트 피터스버그 주니어 칼리지에 입학해 1963년 플로리다주립대학에 편입했다. 1964년에는 평소 동경했던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로 다시 적을 옮겼다. 그는 UCLA에서 평생을 함께할 친구 만자렉을 만나 밴드를 조직했고, 이후 만자렉이 드러머 존 덴스모어와 크리거를 영입해 지금의 도어즈가 만들어졌다.
여느 밴드가 그렇듯 도어즈도 처음에는 동네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했다. 클럽 사장들은 이들의 노골적인 가사와 외설적인 행동에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늘 불안해했지만 관객들은 도어즈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이를 눈여겨본 일렉트라 레코드가 도어즈와 정식 계약을 맺었고, 첫 앨범 《The Doors》가 발매됐다. 앨범 홍보 과정에서 모리슨이 작성한 소개글은 그와 도어즈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저는 혁명, 무질서, 혼란에 흥미를 느낍니다. 특히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있는 것 같거든요. 외부의 혁명은 내부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길입니다”
1960년대 중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건 일종의 유행이었다. 그 당시 히피들은 평화를 외치는 한편 온갖 마약을 해대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즐겼다. 모리슨은 히피 정신을 충실히 따르는 인물이었고 히피들도 그런 모리슨을 동경했다. 반면 기성세대들은 도를 넘은 모리슨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도어즈의 가사만 봐도 당시 기성세대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킬러는 새벽이 오기 전에 일어났어. 그는 부츠를 신고 고대 미술관으로부터 고개를 돌렸어. 그리고 복도 아래로 걸어 내려갔어. 그의 여동생이 사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남동생을 만났어. 그리고 복도 아래로 걸어 내려갔어. 문 앞에서 안을 쳐다봤어. 아버지? 그래 아들아.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어머니? 나는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어요.’ - <The End>
모리슨은 반항아 기질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무대 위에서 날뛰었고, 마이크를 집어던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리슨의 모습이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다른 가수들의 들러리로 시작했던 도어즈는 어느새 공연 헤드라이너로 대접 받았다. 당시 모리슨의 일과는 밤새 술 먹고 늦잠을 잔 후 산책을 하다가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 망나니와 같은 삶이었지만 자극을 원하는 젊은이들은 그런 모리슨의 모습에 열광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모리슨은 언론에 부정적인 기사가 나가도 개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언론을 활용했다. 그는 공연 전에 항상 어떤 기자가 왔는지 살펴보고 그들이 쓰는 기사의 주요 독자층을 파악했다. 모리슨의 인터뷰는 진지할 때도 있었고, 미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평소 시를 좋아한 덕분인지 인터뷰를 할 때 인용구를 자주 사용했고, 언론도 모리슨의 발언을 헤드라인으로 자주 사용했다. 일종의 상부상조 관계였다.
모리슨이 밑도 끝도 없이 반항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반전운동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곡이 <The Unknown Soldier>로 도어즈는 이 곡에서 뮤지컬처럼 노래를 부르며 연극을 해댔다. 단순히 반전만 외치는 게 아니라 가사에 기승전결을 표현한 모리슨다운 곡이었다.
<Five to One>은 이보다 더 심오한 곡이었다. 모리슨 본인은 이 곡에 대해 언급한 적이 많지 않지만 언론과 비평가들은 갖가지 해석을 했다. 대표적인 해석이 미국 내 백인과 흑인의 비율이 5 대 1이라는 것. LA 시민들은 5 대 1의 비율로 마리화나를 피운 다는 것 등이다. 해석이야 어떻든 모리슨은 <Five to One>에서 “그들은 총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다수야”라고 외치며 자신이 히피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그러면 우리는 둘 다 나이가 들 거야. 이름 모를 군인이여. 뉴스를 보면서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먹이면서 TV를 봐. 태어나지 않은 삶, 삶과 죽음. 총알은 헬멧을 쓴 머리를 관통해. 모든 게 끝났어. 이름 모를 군인이여.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중대 섯. 받들어 총.’ - <The Unknown Soldier>
모리슨의 음악은 반항의 음악이면서 분노의 음악이기도 했다. 그의 일상 자체가 분노였고 무대 위에서 그 분노를 거침없이 표현했다. 1967년 12월, 모리슨은 여느 때처럼 무대 뒤에서 여자와 밀회를 즐기다가 그만 경찰에게 들키고 말았다. 모리슨은 무대 바깥으로 나가라는 경찰의 요구에 불응했고 결국 싸움으로 번졌다. 그날 모리슨은 무대 위에서 “조그만 파란 모자를 쓴 조그만 파란 놈. 조그만 파란 돼지 같은 놈”이라며 경찰을 욕했고, 결국 그는 무대 위에서 체포당해 1500달러를 내고 나서야 풀려났다.
1968년 1월에는 한 주차장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지나가는 경비원을 놀려댔다. 당연히 싸움으로 번졌고,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꼼짝없이 체포됐다. 이번에는 친구들이 보석금을 내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모리슨은 경찰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파티장으로 향했다. 이날 파티에는 가수 존 데이비드슨과 재니스 조플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니스 조플린과 짐 모리슨 그리고 지미 헨드릭스는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히피 음악가들로 이른바 3J라고 불린다. 조플린과 헨드릭스는 모리슨 못지않은 특이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날 파티에서 모리슨은 조플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놀았고 조플린은 위스키 병으로 모리슨의 머리를 때렸다. 본인들끼리는 장난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심각하게 바라보며 그들을 떼어 놓았다.
1968년 3월에는 모리슨과 조플린, 헨드릭스 3J가 모여 잼 세션을 펼쳤다. 다들 평범하지 않은 성격이었지만 정상의 실력자들이 모였으니 그만큼 주변인들의 기대도 컸다. 그렇지만 모리슨의 정신세계는 다른 두 사람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모리슨은 가사를 자기 맘대로 지껄이며 뛰어다녔고 헨드릭스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지켜봤다. 이 때문인지 헨드릭스는 공연을 함께 하자는 모리슨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1968년 전후로 모리슨은 공연 현장에서 반전 메시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강조라기보다 관객들이 반전을 외치도록 선동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수도 있다. 그가 반전 문구를 외치면 관객들은 그대로 따라했고, 그가 무대에서 구르면 관객들은 각자 자기들의 자리에서 굴러댔다. 특정 마니아들만 모리슨을 따른 것도 아니었다. 1968년 6월 발매된 싱글 <Hello, I Love You>와 7월 발매된 앨범 《Waiting for the Sun》은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대중적 인기도 정상급이었다. 특히 《Waiting for the Sun》은 선주문만 50만 장을 기록할 정도였다.
도어즈의 공연은 하나하나가 이야깃거리로 남는다. 1968년 8월 뉴욕 싱어 볼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단체로 무대 위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들이 제지하자 이번에는 무대 아래 관객들이 의자를 집어던졌다. 소동은 한 시간 넘게 이어졌고 결국 공연은 중단됐다. 이날 병원에 실려 간 사람만 수백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9월에는 암스테르담 공연이 잡혀있었다. 네덜란드에 오기 전, 모리슨은 독일 팬으로부터 해시시(인도산 대마초로 만든 마약)를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해시시를 들고 입국하면 세관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리슨은 입국 직전에 해시시를 죄다 먹어버렸다. 그런데 네덜란드에 입국한 후에도 팬들이 모리슨에게 해시시를 가져다줬고, 안 그래도 술과 약물에 취한 모리슨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공연 첫 무대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이 장식했다. 이때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한 모리슨은 밴드를 구분하지 못하고 제퍼슨 에어플레인 무대에 올라가버렸다. 그는 무대에서 알 수 없는 몇 마디를 지껄인 후 쓰러져버렸다.
그해 11월 미국투어는 더 가관이었다. 관객들은 이날 공연에서 도어즈가 평소 보다 블루스 곡을 많이 부른다는 이유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매 공연마다 부상자가 발생한 건 물론이고 적지 않은 관객들이 체포되는 등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모리슨은 평화를 외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공연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광기의 절정은 1969년 3월 마이애미 공연이었다. 이날 모리슨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간단하지만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해댔다. 모리슨은 무대 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만취한 상태에서 한 이야기였다.
“나는 혁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시위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야. 즐겁게 노는 걸 이야기하는 거야. 춤추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거야. 사랑, 사랑,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 네 빌어먹을 친구를 잡고 사랑하라고”
이 말을 외친 후 모리슨은 셔츠를 벗어 관객들에게 집어던졌다. 만자렉은 <Touch Me>를 부르려고 했지만 모리슨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모리슨은 욕을 하더니 별안간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사태를 파악한 경찰들이 무대 위로 올라갔지만 이미 모리슨은 바지를 벗어버린 상태였다. 다만 향간에 알려진 무대 위 자위행위는 실제로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하튼 마이애미 공연 후 모리슨은 외설행위, 성기노출, 만취, 모독 등의 죄목으로 기소됐다.
모리슨 개인은 5만 달러를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날 이후 도어즈에게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공연 프로모터들은 도어즈의 공연을 취소했고, 라디오에서도 도어즈의 음악을 빼기 시작했다. 모리슨에 우호적이었던 언론도 등을 돌렸다. 보통 사람이면 반성하거나 당황할 법도 하지만 이때 모리슨은 개인적 삶을 즐겼다. 평소 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시집『The Lords』와 『The New Creatures』를 출판했다.
1969년 7월 도어즈는 앨범 《The Soft Parade》를 발매했지만 모리슨의 관심은 온통 시에만 쏠려있었고 이전처럼 앨범 작업에 열심히 참여하지도 않았다. 물론 모리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The Soft Parade》는 빌보드 차트 6위에 오르는 괜찮은 성적을 거뒀고, 싱글로 발매된 <Touch Me>는 빌보드 3위를 기록했다.
모리슨의 관심이 음악에서 시로 옮겨갔지만 이것이 자숙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969년 11월 모리슨은 롤링스톤즈 공연을 보기 위해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로 향했다. 모리슨은 이날 비행기에서 샌드위치와 컵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고 결국 착륙 후 FBI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번에도 모리슨은 2500달러를 보석금으로 내고 구속 신세를 면했다.
그런 와중에도 도어즈의 음악적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1970년 2월 발매된 앨범 《Morrison Hotel》은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르면서 여전한 인기를 보여줬다. 다만 이후 공연에서 예전과 같은 대형 사건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모리슨의 광기도 한풀 꺾였다.
도어즈는 1970년 중반을 공연 활동으로 보내고 후반부터 앨범 《L.A. Woman》 녹음 작업에 들어갔다. 1970년은 비틀즈가 해체되고 헤비메탈이 태동하는 등 대중음악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다. 당연히 도어즈의 입지도 예전 같지 않아 고전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L.A. Woman》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호평 받는 앨범이다.
모리슨은 《L.A. Woman》 작업이 끝난 후인 1971년 그의 애인 파멜라 커슨과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모리슨은 시 못지않게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예술의 도시 파리는 모리슨에게 매력적인 곳이었다. 물론 그 성격 어디가지 않아서 술 먹고 난동부리는 건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면도하고 살도 빼는 등 아주 막장인 삶은 아니었다.
그렇게 파리에서 조용히 지내던 1971년 7월 3일, 짐 모리슨은 사망했다.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통사고도 아닌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사망 소식에 전세계 젊은이들은 당황했고, 자연스럽게 음모론이 이어졌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모리슨이 사망 전날 밤 피를 토했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목욕을 하러 갔다가 그대로 욕조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슨은 경찰을 부르지도 않았고, 사체 부검도 하지 않았기에 각종 의혹이 불거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리슨 사망 직후 관계자들은 관련 소식을 최대한 은폐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러기에 모리슨은 너무 거물이었다.
‘모리슨의 죽음은 비밀로 부쳐졌다. 그러나 지역 나이트클럽 DJ들이 관련 내용을 취재해 세상에 알렸다. 소문은 바로 그날 밤 런던에 전해졌고,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이 파리에 몰려들었다. 미국 대사관은 월요일(1971년 7월 5일)까지 관련 소문을 듣지 못했다. 마침내 파멜라 커슨이 모리슨을 ‘제임스 모리슨, 시인.’이라고 명명하며 그의 죽음을 확인해줬다. 대사관은 금요일(1971년 7월 9일)까지도 상황을 깨닫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모리슨의 죽음이 언론을 타고 있을 때였다.’ - 1971년 8월 5일 『Rolling Stone』
모리슨 사망 후에도 도어즈 멤버들은 1971년 앨범 《Other Voices》와 1972년 앨범 《Full Circle》를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모리슨 없는 도어즈가 흥행할 리 없었고, 결국 1973년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모리슨의 콤비 만자렉은 솔로 음악가로 활동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만자렉은 모리슨이 과거 썼던 스토리에 본인의 창작을 덧붙여 영화 『Love Her Madly』를 제작하는 등 모리슨 사후에도 그를 잊지 않았다.
모리슨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모습으로 팬들을 사로잡았지만 어쩔 때는 한없이 진지했다. 평화를 외쳤지만 그 자신은 누구보다 폭력적이었다. 젊은이들의 우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도를 넘는 행동이 너무 많았다. 모리슨의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을까. 적어도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리슨은 《L.A. Woman》을 작업할 당시 잡지 『Cream』의 기자에게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J. 모리슨”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모리슨 역시 여느 히피들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했고,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리슨은 광기로 유명하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음악성과 사회성은 잊혀지곤 한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중후반 대세였던 히피의 지도자나 다름없었고, 그의 몽환적인 음악은 히피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히피 문화를 이끈 장본인이 바로 모리슨이다. 모리슨이 사라진 1970년대 들어 히피 문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후 젊은이들도 1960년대만큼의 파워를 보여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