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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3. 2022

'화려한 음악의 종합 예술가' 데이비드 보위

   2020년 들어 한국 연예계에서는 일명 부캐 열풍이 불었다. 부캐는 부캐릭터의 약자로 본인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컨셉을 잡아 별개의 활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부캐의 대표적인 예로는 가수 ‘유산슬’로 데뷔한 개그맨 유재석 씨가 있다. 

   사실 부캐는 연예계에서 생긴 열풍이라기보다 인디 음악계에서 유행한 ‘멀티 페르소나’가 연예계에 퍼진 것에 가깝다. 멀티 페르소나란 다중 자아라는 뜻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든 후 상황에 따라 본인 대신 해당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이다. 인디 음악계에서는 다른 장르를 연주하거나 혹은 작곡 등 아예 다른 작업을 할 때 멀티 페르소나를 활용하곤 한다. 

   멀티 페르소나를 최초로 활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멀티 페르소나를 활용한 유명 음악가로는 단연 데이비드 보위가 꼽힌다. 보위가 수십 년 후의 한국을 예상하고 멀티 페르소나 활동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까지 생소한 개념의 멀티 페르소나를 널리 알린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멀티 페르소나는 일부일 뿐 보위는 뮤직비디오, 패션 심지어 영화와 미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합 예술가였다.   

   보위는 음악적으로 글램 록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동시에 소울, 일렉트로니카, 헤비메탈, 재즈에 이르기까지 각종 장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예술 외적으로는 냉전 시대의 비극을 고발하면서 평화와 화합을 호소했다. 일각에서는 독일 통일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보위를 뽑을 정도다. 


   194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보위는 어릴 때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가족들도 음악에 관심이 많아 보위에게 색소폰을 사주는 등 음악 활동을 적극 지원해줬다. 덕분에 보위는 1962년 15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콘래드, 킹 비스 등 여러 밴드에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고, 1964년에는 킹 비스 명의로 싱글 <Liza Jane>을 발매했다. 딱히 상업적 성공을 거둔 건 아니었지만 동년배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데뷔였다. 

   데뷔가 빨랐다고 성공도 빨랐던 건 아니었다. 그는 이후 솔로로 독립해 <Do Anything You Say> <I Dig Everything> <Rubber Band> 등 여러 싱글을 발표했지만 차트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 1967년에는 첫 앨범 《David Bowie》를 발매했지만 이 역시 영국 차트 125위로 딱히 대단한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보위 음악의 기반은 사이키델릭이었지만 당시 워낙 쟁쟁한 사이키델릭 음악가가 많았기에 남들과의 차별화 없이는 눈에 띄기 어려웠다. 

   이때 보위가 만난 사람이 안무가 린제이 켐프였다. 켐프는 춤 외에도 배우로도 활동하며 1970년대부터는 영화에도 여럿 출연했다. 1960년대 후반 보위는 켐프로부터 춤과 연극을 배우면서 예술 전체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고, 기타와 시를 섞은 당시로는 생소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게 보위는 예술적 감각을 기초서부터 길렀고 이는 1969년 싱글 <Space Oddity>와 앨범 《David Bowie》(1집 앨범과 이름이 같다)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Space Oddity>가 발매될 때는 마침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던 때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제목과 가사였다. 

   <Space Oddity>의 성공 후 보위는 외계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1970년 보위는 그의 백밴드 이름을 ‘화성에서 온 거미들(The Spiders from Mars)’로 명명하고, 본인 스스로도 붉은 머리에 높은 굽의 신발, 반짝거리는 목걸이 등을 착용하는 파격적인 패션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보위는 1972년 외계인 컨셉 효과를 극대화한 앨범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를 발매했다. 영국 차트 5위에 오르는 등 상업적인 성공은 물론이고 글램 록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개척해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글램 록은 화려한 의상과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에도 글램 록을 시도한 음악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글램 록으로 성공을 거둔 건 사실상 보위가 처음이었다. 

   보위의 페르소나인 지기 스타더스트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지기 스타더스트는 즉흥적으로 생긴 것이 아닌 보위의 철저한 연구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보위는 1993년 『Q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가 하는 음악이 개성을 상실한 시대의 음악이라고 본다. 나는 상실한 시대로부터 폭력과 무정을 빼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위는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복장을 한 동시에 온갖 난해한 가사와 몽환적인 음악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하늘에서 기다리는 우주인이 있어. 그는 이곳에 와서 우리를 만나고 싶지만 우리의 마음을 날려버린 것으로 생각하나봐. 하늘에서 기다리는 우주인이 있어. 그는 우리에게 날리지 말라고 해. 왜냐면 그 모든 게 가치가 있다는 걸 그는 알거든.’ - <Starman>   

 
 

   보위는 이후 『Ziggy Stardust Tour』 공연을 다니면서 존재감을 확실히 알렸고, 1973년 일본 공연의 흥행을 계기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Japan Times』는 “비틀즈 해체 이후 보위는 음악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음악가”라며 “그의 연극적인 모습은 팝 음악 장르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연자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1973년 4월 발매한 후속 앨범 《Aladdin Sane》에서도 지기 스타더스트의 캐릭터를 이어갔다. ‘미국으로 간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컨셉의 새로운 페르소나 알라딘 세인을 선보인 것. 알라딘 세인의 특징은 얼굴에 번개무늬를 그린 것으로 《Aladdin Sane》 앨범 커버도 번개무늬를 그린 보위의 얼굴로 장식했다. 보위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번개무늬를 그렸다.  

   페르소나를 통해 큰 인기를 얻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지기 스타더스트나 알라딘 세인이 보위 본인보다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보위 입장에서 지기 스타더스트는 공연용 캐릭터일 뿐, 보위 본인의 인생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정체성을 고민하던 보위는 1973년 7월 공연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공연은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지막 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지기 스타더스트의 은퇴를 선언했다. 보위는 이듬해인 1974년 돌연 미국으로 이사를 가면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보위가 미국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다름 아닌 소울 음악이었다. 1975년 발매한 앨범 《Young Americans》와 1976년 앨범 《Station to Station》에서는 보위의 몽환적인 목소리나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피아노와 색소폰을 적극 사용한 재즈풍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당시 보위는 지기 스타더스트의 뒤를 이을 새로운 페르소나 ‘씬 화이트 듀크’를 구상했다. 씬 화이트 듀크는 흰색 셔츠에 멋진 조끼를 입은 단정한 차림으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씬 화이트 듀크는 《Station to Station》 수록곡 <Station to Station>에서 처음 언급됐고, 보위도 씬 화이트 듀크라는 이름으로 각종 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씬 화이트 듀크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보위의 흑역사로 남았다. 보위는 1975년 4월 『Playboy』와의 인터뷰에서 “말 할 필요도 없이 텔레비전은 가장 성공적인 파시스트다. 록 스타들도 파시스트다. 아돌프 히틀러는 초창기 록 스타 중 하나다”라며 “사람들은 자유를 원한 다지만 그 기회를 얻었을 때 니체 대신 히틀러를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6년 4월에는 스웨덴 공연에서 “나는 영국이 파시스트 리더로부터 많은 득을 볼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파시즘은 진정한 국가주의다”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훗날 보위는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수차례 사과해야만 했다. 사실 보위는 당시 ‘인종차별 반대 록(RAR)’에 참여하는 등 극우 인사로 분류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워낙에 문제가 되는 인물이었던 만큼 나중까지도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보위는 마약에도 중독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상황이었고, 이에 1976년 말 독일 베를린으로 이사해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보위는 1977~1979년 일명 베를린 3부작이라고 불리는 앨범 《Low》 《"Heroes"》 《Lodger》를 발표했다. 그는 페르소나를 앞세운 지금까지의 음악에서 벗어나 음악 자체에만 집중했고, 대중들과의 만남도 최소화했다. 그 결과 일렉트로닉, 아트 록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된 보위만의 예술적 작품이 탄생했다. 특히 《"Heroes"》는 『New Musical Express』가 선정한 1977년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는 등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보위가 냉전 시대를 비판한 것도 이때부터다. 보위는 베를린 한자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베를린 장벽 앞에서 한 커플이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보위는 그 장면에서 영감을 떠올려 동독인과 서독인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사랑을 나누는 노래 <"Heroes">를 만들었다. <"Heroes">는 지금까지도 분단된 독일을 상징하는 노래로 꼽힌다.  

 
 

  ‘나는 벽 옆에 서있었을 때를 기억해. 총이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니고 우리는 키스했지. 마치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부끄러움은 다른 쪽에 있어.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있어 영원히. 우리는 영웅이 될 거야. 단 하루만이라도.’ - <"Heroes">  

 
 

   따지고 보면 독일이라는 국가의 분단은 비극이지만 보위는 최대한 밝은 분위기로 《"Heroes"》를 이끌었다. 사회에 대한 분노보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우선적으로 다뤘다. 덕분에 보위는 일반 시민들의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복잡한 정치 논리가 아닌 당장 어려운 사람들을 지켜주는 따뜻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통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 이끌어줄 사람이 당연히 필요하고, 때로는 돌봐줄 사람도 필요하다. 보위는 1977년 10월 『Melody Maker』와의 인터뷰에서 “《"Heroes"》에는 연민이 담겨있기를 희망한다. 스스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다. 우리들 역시 스스로 절망적 상황에 빠져있다”며 “알다시피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위는 베를린에서 머물며 혁혁한 음악적 성과를 이뤄냈고 마약 중독에서도 벗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보위는 베를린을 떠나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새로운 음악을 하고자 했다. 1980년 2월, 보위가 아내 메리 안젤라 바넷과 이혼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계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1980년 발매한 앨범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와 싱글 <Ashes to Ashes>는 모두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1970년대 못지않은 인기를 유지했다.  

   보위는 대중들과의 만남도 늘려가면서 간만에 그의 페르소나도 들고 나왔다. 바로 <Space Oddity> 가사에 등장했던 우주인 ‘메이저 톰’이다. 보위는 <Space Oddity>에서 우주 비행 중인 메이저 톰이 회로 오작동으로 지구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을 노래했다면 <Ashes to Ashes>에서는 메이저 톰을 마약 중독자로 규정해버렸다. 메이저 톰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메이저 톰을 통해 보위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노래 분위기가 어둡거나 우울하지는 않았다.  

   <Ashes to Ashes>는 당시 영국의 뉴로맨틱 운동과 관계가 깊다. 뉴로맨틱은 펑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회의 긍정적인 부분을 찾고자 했으며 자극과 쾌락을 추구했다. 1970년대 후반 영국 경제가 악화하면서 대부분 젊은이들이 펑크에 열광한 게 사실이지만 뉴로맨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뉴로맨틱 음악은 글램 록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어찌 보면 보위는 뉴로맨틱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이때부터 보위도 런던 뉴로맨틱 클럽 블리츠를 방문하는 등 뉴로맨틱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Ashes to Ashes>는 뉴로맨틱의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보위는 이어 디스코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디스코도 뉴로맨틱과 비슷한 개념으로 복잡한 사회문제 대신 춤추고 노는 것에 중점을 둔 음악이다. 일각에서는 디스코를 의식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했지만 복잡한 미국 사회에서 탈출구를 제공한 음악은 단연 디스코였다. 보위가 1983년 발매한 디스코 앨범 《Let's Dance》는 디스코 열풍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등 상업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디스코 음악이 대체로 그렇듯 상업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1980년대 초반은 이미 디스코 열풍 막바지였기에 보위의 디스코도 반짝 인기를 누렸을 뿐이었다. 댄스 가수의 최고봉 마이클 잭슨까지 등장하면서 보위의 존재감은 점점 약해졌다.  

 
 

   이 시기 보위를 살펴보면 그저 춤추고 노는 한 음악가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당시 인종차별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흑인 인권과 동서양 화합에 힘썼다. 보위는 1983년 『MTV』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몇 달 동안 『MTV』를 봤는데 튼튼한 기업이었고 좋은 점도 많이 있다”면서도 “소수의 흑인 음악가만 방송해주는 사실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MTV』와의 인터뷰에서 『MTV』를 비판했다는 점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인터뷰는 2010년대 후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벌어지면서 재조명됐다.  

   음악적으로는 1983년 싱글 <China Girl>을 통해 아시아인들이 받는 차별을 표현했다. <China Girl> 뮤직비디오에는 제복을 입은 서양인이 동양 여자의 머리를 잡는 일종의 백인우월주의를 보여줬다. 아이러니하게도 <China Girl> 뮤직비디오는 보위가 비판한 『MTV』로부터 최고의 남성 비디오상을 받았다.  

   보위의 진심이 통한 것인지 공산권 국가에서도 보위의 음악은 큰 인기를 끌었다. 1987년 5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된 『Glass Spider』 투어는 보위의 인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때만 해도 공산권 국가에서의 공연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동유럽 국가들은 투어 장소에 포함되지 못했다. 동독 공연을 원했을 법한 보위는 베를린 공화국 광장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보위를 향한 동독 국민들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 공연이 열린 공화국 광장은 베를린 장벽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동독 국민들은 보위의 음악을 듣고자 베를린 장벽 반대편에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새 그 숫자는 수천 명으로 늘었고 결국 경찰이 최루 가스까지 뿌려가며 관중을 해산시켰다. 이 공연은 독일 분단 후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Heroes"가 절정에 달하자 독일 관객들은 소리지르고 노래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밀어댔다. 그들은 ‘장벽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인민 경찰을 향해 병을 던지거나 욕설을 뱉었다. 시위도 순간적으로 같이 벌어졌다. 무대에서는 보위가 반대편의 응원을 들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 2014년 2월 1일『The Financial Times』   

 
 

   보위의 공연이 있고 2년 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은 마침내 붕괴됐다. 보위 덕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보위는 독일에서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다. 2016년 6월 보위가 1970년대 거주하던 베를린 주택에 보위 기념 명판이 들어섰고, 미하엘 뮐러 당시 베를린 시장은 “보위는 베를린에 속해있고, 보위는 우리에게 속해있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에도 보위의 음악적 실험은 계속됐다. 1993년 앨범 《Black Tie White Noise》에서 아트 록과 애시드 재즈 음악을 보여줬고, 1995년 앨범 《Outside》는 인더스트리얼 록을 도입했다. 1997년 앨범 《Earthling》에서는 일렉트로니카의 한 종류인 드럼 앤 베이스 사운드까지 들을 수 있다. 최신 트렌드에 맞춰가려는 보위의 노력이 돋보였지만 아무래도 젊은 음악가와의 경쟁에서 이기긴 어려웠기에 상업적 대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보위의 2000년대는 조용한 편이었다. 2003년 앨범 《Reality》 이후 오랜 기간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고, 공연도 월드 투어 대신 자선공연이나 지역 축제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Reality》 수록곡 <New Killer Star>와 <Fall Dog Bombs the Moon>에서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등 사회 참여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워낙 난해한 가사라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크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보위의 공식적인 공연도 2007년 5월 19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하이 라인 페스티벌 무대가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2013년 1월 보위는 뜬금없이 싱글 <Where Are We Now?>를 발매했고, 같은 해 3월에는 앨범 《The Next Day》를 발매했다. 앨범 발매만 했을 뿐 투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팬들에게는 충분히 기쁜 소식이었다. 보위가 따로 홍보한 적도 없었음에도 《The Next Day》는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2위를 차지하는 등 나이 60이 넘어서도 보위의 인기는 여전했다. 2016년 1월 8일에는 또 다른 신작 《Blackstar》를 선보였다. 《Blackstar》는 재즈 스타일이 묻어나는 앨범으로 여전히 새로운 장르 개척을 꿈꾸는 보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틀 후인 2016년 1월 10일, 팬들은 보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보위는 간암 투병 중이었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Blackstar》 발매 이틀 후인 2016년 1월 10일 보위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뜻에 따라 장례식은 치루지 않았고, 유해는 화장 후 인도네시아 발리에 뿌려졌다.  

   보위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상징 같은 존재였기에 당연하게도 각국의 정치인들이 보위를 추모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난 데이비드 보위를 듣고 보면서 자랐다. 그는 재발명의 달인이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독일은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보위는 영웅 반열에 올랐다. 베를린 장벽을 부수는 데 도움을 줘 감사하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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