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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3. 2022

'레게 음악으로 평화를' 밥 말리

   2018년 11월, 유네스코는 자메이카 레게 음악을 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불의, 저항, 사랑, 인류문제 등 국제담론에 기여한 덕이다. 레게는 유네스코에서 인정할 정도로 자메이카를 상징하는 음악 장르지만 의외로 역사가 긴 편은 아니다.  

   1960년대 자메이카의 음악은 스카와 록스테디로 대표됐다. 스카는 미국의 재즈 형식을 따랐지만 중간 비트를 강조하고, 베이스 비중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이후 스카에서 관악기 대신 기타의 비중을 높이고, 템포를 낮춘 록스테디라는 장르가 탄생하며 자메이카 대중음악을 이끌었다. 자메이카는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고, 스카 역시 희망찬 내일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독립 후에도 자메이카의 경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높은 범죄율에 심각한 빈부격차 등 사회적 혼란은 여전했다. 당시 자메이카는 자본주의를 내세운 보수 성향의 노동당과 사회주의 성향의 인민국가당이 극심하게 대립했고(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때로는 폭력과 암살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독립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자메이카 사람들은 좌절했고, 한편으로는 음악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태동한 레게는 스카 리듬에 기반을 두면서도 느린 템포와 관악기·타악기 위주의 연주, 반복된 리듬을 보여준다. 레게의 다른 특징은 밝은 내일을 노래했던 스카와 달리 사회비판에 주력한 것이다. 혼란한 자메이카 사회에서 레게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훗날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음악가들이 레게를 시도하는 등 음악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비평가들이 레게를 논할 때 밥 말리를 빼놓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리가 최초의 레게 음악가는 아니지만 레게를 전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말리는 자메이카라는 변방 출신임에도 영국 차트나 빌보드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고, 각종 매체에서 위대한 음악가를 선정할 때도 말리가 순위에서 빠지는 일은 많지 않다.  

   1945년생인 말리는 영국군 장교 출신인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말리는 어린 시절 흑인 친구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았고, 그렇다고 백인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데다가 말리의 아버지 노발 말리마저 사망하자 말리의 가족은 1957년 세인트 앤에서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으로 이사했다. 1960년대 먹고 살기 어려웠던 한국인들이 뭐라도 해보고자 무작정 상경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꿈과 현실은 차이가 있듯 말리 가족이 킹스턴으로 이사한 후에도 가계에 큰 변화는 없었고, 말리의 어머니 세델라 말리가 가정부 일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말리는 지역 노래자랑 대회 출전을 계기로 음악에 전념했다. 그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조 힉스 밑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말리가 만난 버니 웨일러와 피터 토시는 음악적으로 잘 통하는 친구들이었다. 말리는 이들과 함께 기타 연주, 작곡 등 음악을 기초부터 배우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1963년에는 말리, 웨일러, 토시 등이 모여 웨일러즈라는 그룹을 조직했고, 당당히 오디션에 합격해 첫 싱글 <Simmer Down>을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Simmer Down>은 대성공을 거둬 웨일러즈도 자메이카 내에서 순식간에 유명 그룹 반열에 올랐다. 

 
 

   <Simmer Down>의 히트로 말리와 웨일러즈의 앞날은 밝을 것으로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스튜디오 원 소속이었던 웨일러즈 멤버들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여갔다. 그들은 스튜디오 원과 제대로 된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고, 심지어 출연료를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말리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스튜디오 원 편에 설 수도 없었다. 멤버들과 회사를 중재하는 것도 말리의 몫이었다.  

   웨일러즈는 1965년 첫 앨범 《The Wailing Wailers》를 통해 자메이카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여전히 빈털터리 신세였다. 폭발한 웨일러즈는 결국 스튜디오 원에서 나와 미국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미국에서 돈을 모아 음반회사를 차리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들은 청소, 주차장 안내, 접시 닦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버는 한편 틈틈이 작곡을 하며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시기 말리는 라스타파리교에 빠져 있었다. 라스타파리교는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흑인을 구원해줄 것으로 믿는 종교였다. 결과적으로 셀라시에 황제가 흑인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억압된 삶을 살아온 흑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당시 자메이카 정부는 라스타파리교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펼쳤다. 이에 라스타파리교를 믿는 자메이카 음악가들은 사회비판적인 가사와 느린 템포의 곡으로 답했다. 말리도 그 중 한명이었다.  

   자메이카로 돌아온 웨일러즈 멤버들은 웨일링 소울 레코드라는 회사를 차려 직접 싱글을 발매했지만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회사 경영은 무리였다. 방송국들마저 웨일러즈를 외면하는 나날이 계속됐고, 결국 웨일링 소울 레코드는 1967년 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후 웨일러즈는 레게 음악을 시도하며 영국에도 진출했지만 눈에 띌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웨일러즈는 반짝 인기로 사라지는 듯했다.  

   음악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은 웨일러즈는 영국을 오가며 음반 제작과 공연에 공을 들였다. 또 새로운 음반사들의 요구로 그룹 이름을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로 변경했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의 인기는 다시금 높아졌고, 《Soul Rebels》 《Soul Revolution》 등 꽤 괜찮은 앨범도 발매할 수 있었다.  

 
 

   1972년, 총선거를 앞두고 자메이카 사회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인민국가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말리는 마이클 만리 인민국가당 당대표의 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만리는 셀라시에 황제의 자메이카 방문을 주선했고, 셀라시아 황제는 만리에게 지팡이를 선물한 적이 있었기에 라스타파리교 신도들이 만리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메이카 음악가들은 각자의 정치적 견해가 있었겠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직접적으로 선거 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말리 역시 처음에는 선거 운동 참여를 망설였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내 만리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는 다수당의 당대표가 국가 수상으로 취임하는 구조이므로 인민국가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만리는 수상이 될 수 있었다. 만리도 말리의 유명세를 적극 활용해 선거 유세에 두 사람이 같이 다니곤 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동당이 이를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인민국가당을 지지하는 노래를 방송에서 금지시키는 등 언론 통제를 하기에 이르렀다. 말리는 자메이카 공연이 어렵다면 해외 공연을 통해 자메이카의 현실을 알리려 했다. 이 시기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새로운 팬을 만들었고, 말리와 자메이카에 대한 관심도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문제는 다른 멤버들과 말리의 갈등이었다. 만리를 지지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해외 공연에 대해서는 말리처럼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버니 웨일러는 영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룹이 말리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갈등이 수면위로 올라오지는 않아 그런대로 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말리의 노력 덕이었을까. 1972년 자메이카 총선에서 인민국가당은 37석을 확보해 16석을 확보한 노동당에 승리했다. 동시에 만리도 자메이카 수상에 취임해 새로운 자메이카에 대한 자메이카인들의 기대감도 커졌다. 한편 패배한 노동당은 매일 같이 만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만리도 본인의 뜻을 위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각 당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가 하면 만리는 오후 6시 이후 외출을 금지하는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자메이카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자메이카 정권이 교체된 1970년대 초반,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멤버들의 정치적 성향은 비슷했지만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서로 의견 차이를 보였다. 적극적인 투쟁을 원한 말리와 다른 멤버들 간 갈등이 수면위로 오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1974년 미국 ‘프레이크 클럽’ 공연이다. 프레이크 클럽은 게이들이 모여 마약을 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말리는 공연을 강행하려 했지만 웨일러와 토시는 라스타파리교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공연을 거부했다. 이 일을 계기로 멤버들의 불화는 걷잡을 수 없어졌고, 웨일러와 토시는 그룹을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말리는 새로운 멤버들을 영입해 재정비에 나섰지만 예전에 비해 힘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탈퇴 후에도 웨일러와 토시가 말리와의 연락 자체를 끊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74년 10월,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는 새로운 멤버로 앨범 《Natty Dread》를 발매했다. 세간의 예상과 달리 《Natty Dread》는 영국 차트 43위, 빌보드 차트 92위라는 예상외의 성적을 거뒀다. 그간 말리가 레게로 유명했다지만 그의 앨범이 영국 차트 순위에 올라간 적은 없었고, 빌보드 차트에서도 100위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자메이카라는 변방 출신의 음악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보수적 성향으로 유명했던 자메이카 방송국들이 말리를 적극적으로 초청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리는 방송에서 라스타파리교 관련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주변에서는 음악 소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말리는 본인의 사상 전파를 우선시했다. 그는 방송에 교육적인 내용이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메이카 노동당이 말리를 위험인물로 분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리는 빈민가 청소년 구제에도 적극적이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빈민가 지역의 범죄율은 높고, 자메이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리는 자신이 아는 변호사를 총동원해 범죄 청소년들을 도왔다. 범죄자를 돕는다는 점에서 비판도 있었지만 말리의 신념은 확고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Natty Dread》 수록곡 <No Woman No Cry>에서 잘 드러난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우리가 트렌치타운 관청에 앉아있었을 때를 기억하거든요. 위선자들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요. 좋은 친구가 있고, 좋은 친구를 잃었어요. 이 길을 따라 좋은 미래가 다가오면 과거를 잊지 못할 거예요. 눈물을 닦으세요.’ - <No Woman No Cry>  

 
 

   가사에 등장하는 트렌치타운은 말리가 어렸을 적 살았던 곳이었다. 말리는 성공해서 트렌치타운으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트렌치타운의 소득 수준이 오른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쓰레기장에 버려진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과 독수리가 싸우는 풍경까지 볼 수 있었다. 말리는 해외 공연에서 자메이카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고, 이제는 해외에서도 기자를 몰고 다닐 수준의 음악가로 성장해 그의 노력과 발언은 충분히 영향력이 있었다.  

   1976년 4월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즈는 앨범 《Rastaman Vibration》을 발매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라스타파리교에 대한 강한 믿음이 드러난다. 말리는 앨범을 통해 인종차별, 전쟁, 기아 등 각종 참담한 모습을 표현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해 《Rastaman Vibration》은 빌보드 차트 8위라는 대성공을 거뒀다. 레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성과 음악성 그리고 상업적 성과까지 모두 챙긴 셈이었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웨일러는 솔로 앨범 《Blackheart Man》을 발매했고, 토시는 《Legalize It》을 발매했다. 두 앨범 모두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고,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좋아지고 있지만 《Rastaman Vibration》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한 인종이 우수하고 다른 인종은 열등하다는 철학은 마침내 그리고 영구히 없어지고 사라져야해. 모든 곳은 전쟁이야. 나는 전쟁을 말하고 있어.’ - <War>  

 
 

   1976년 초반부터 자메이카에는 긴장감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1976년 12월 20일 자메이카 총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노동당과 정권 유지를 원하는 인민국가당은 정치가 아니라 조직폭력배의 세력다툼을 방불케 했다. 정치깡패가 돌아다니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과거 정치깡패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치깡패는 군부 정권에 의해 대다수 정리됐다. 

   선거를 앞둔 노동당 입장에서 말리의 존재는 성가셨을 듯하다. 말리는 단순 인민국가당 지지자가 아니라 젊은이들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또 국제 공연도 자주 다니면서 우호적인 해외 여론까지 이끌 수 있는 인물이었다. 자메이카 근처에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있었기에 국제 여론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노동당은 말리를 회유하려고도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말리는 1976년 12월 5일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Smile Jamaica』 공연을 열기로 결정했다. 자메이카 국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었고, 딱히 정치적 목적은 없었다. 하지만 선거가 5일 남은 상황에서 만리 수상은 말리의 공연이 선거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알게 모르게 정부 차원에서 공연을 지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말리는 본인의 진실성이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에 실망감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동당은 노동당대로 공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목적이 없는 공연이라지만 말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인민국가당 지지자인 웨일러와 토시까지 공연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당시 말리는 공연을 중단하라는 협박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노동당 측에서 협박 전화를 했다고 볼 증거는 없었지만 말리는 노동당의 행동이라고 확신했다. 

   공연 이틀 전인 12월 3일,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날 말리는 여느 때처럼 연습을 하다가 아내 리타 말리와 매니저 돈 테일러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괴한이 나타나 총을 쏴댔고, 연습실 부엌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총 소리가 들리자 몸을 숙이고 납작 엎드렸지만 말리와 테일러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총성이 잠시 멈추자 리타 말리는 주변을 살필 겸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이를 본 괴한의 총에 맞고 말았다. 다행히 세 사람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공연은커녕 정상적인 생활도 어려웠다. 

   만리 수상은 이런 말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병문안을 와서 공연 강행을 부탁했다. 만리 수상뿐 아니라 장관들도 공연장에서 말리를 기다렸다. 말리를 공연장으로 이끈 것은 만리 수상이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팬들이었다. 공연 당일날도 말리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지만 5만 명 이상의 관객이 공연장에 기다리는 소식을 듣고 말리는 공연을 결심했다. 그는 공연을 진행하면서 “정치적인 이유가 절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공연 이후 인민국가당이 선거에서도 승리했고, 만리 수상도 연임에 성공했다. 

   이후 말리는 미국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말리의 발에서 암세포가 발견됐기 때문에 음악 활동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전과 같은 활발한 활동은 어려웠다. 

   한편 자메이카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만리 수상이 연임했다지만 각종 범죄와 양극화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만리 수상이 범죄를 막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면서 혼란은 가중됐다. 노동당과 인민국가당 싸움에 지친 자메이카 국민들은 다시 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인민국가당 지지자뿐 아니라 노동당 지지자들도 말리에게 연락을 취해 사태 해결을 부탁했다. 

   고국 자메이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말리는 1978년 4월 22일 『One Love Peace』 공연을 열기로 결정했다. 토시도 흔쾌히 공연에 참여했다. 인민국가당을 지지하는 공연이 아니라 인민국가당과 노동당의 화해 자리를 위한 공연이었다. 공연에는 만리 수상과 에드워드 시가 노동당 당대표가 초대됐다. 시가 대표는 만리의 초청이 썩 달갑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공연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토시는 무대에서 정치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의 각종 문제 해결은커녕 자기 잇속만 챙긴다는 이유에서다. 당연히 만리 수상과 시가 대표 귀에는 거슬렸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이번에는 말리가 무대에 올라가 자메이카 역사에 길이 남을 말을 외쳤다. 

 
 

   “제가 언변이 좋지는 않지만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바랍니다. 저는 이곳 무대 위에 만리 씨와 시가 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저 악수하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뭉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리 수상과 시가 대표가 무대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고, 말리는 그 가운데 서서 어린아이처럼 둘의 어깨를 잡고 방방 뛰었다. 혹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할까 둘의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무대 위 세션들은 팔을 휘두르며 환호했다. 관객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1978년 6월, UN이 말리에게 제3세계 평화 메달을 수여하면서 말리는 흑인들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말리도 이에 화답하듯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수차례 열었고, 에티오피아에 방문해 어려운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1980년 4월, 짐바브웨는 독립 기념식을 맞아 말리를 초청했다. 말리가 1979년 짐바브웨 독립을 염원하는 곡 <Zimbabwe>를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말리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평화 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말리 발에 있었던 암세포는 사라졌지만 뇌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폐와 위에도 암세포가 발견되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말리는 방사능 치료를 받으면서 호전되나 싶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1981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메이카 평화의 상징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한편 앞서 1980년, 자메이카 총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시가가 새로운 수상으로 취임했다. 8년 만에 이뤄진 정권교체였고, 늘 그렇듯 선거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말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평화롭게 바꾸고 싶지만 한계가 있었다. 수상으로 취임한 시가는 말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시가는 오랜 기간 정치적 반대 진영에서 활동했음에도 말리의 뜻과 노력은 인정한 것이다. 이처럼 말리는 사실상 내전에 가까웠던 자메이카를 건전한 정치적 형태로 바꾼 인물이다. 자메이카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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