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말콤 X 등을 중심으로 벌어진 흑인민권운동 이후 인종차별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제는 흑인도 투표를 할 수 있었고, 백인 전용식당이나 전용버스도 폐지되는 등 법적으로 백인과 흑인은 같은 사람이 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법이 그럴 뿐 사람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1992년 LA 폭동을 비롯해 수년간 크고 작은 흑인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2020년에는 백인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이 일었다.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 ‘#Black Lives Matter’를 붙이는 사회운동까지 일어나는 등 21세기 들어서도 인종차별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성공하는 것은 백인에 비해 어려운 편이다. 오랜 시간 주류였던 백인들은 상류층 교육을 통해 부를 유지했지만 먹고 살기 어려웠던 흑인들에게 교육은 사치일 뿐이었다. 즉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진 것으로, 멀리 갈 것 없이 대한민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특목고 폐지 등을 통한 고교평준화를 주장하는 정치권 인사도 적지 않지만 정작 그들의 자녀는 대부분 특목고를 졸업했다. 집값 정상화를 외치면서 본인은 다주택자인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도 이럴 진데 신자유주의 체제인 미국은 말 할 것도 없다.
교육을 받지 못한 흑인이라고 성공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차대전 이후 인종과 관계없이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문화와 스포츠는 흑인이 강세를 보이는 몇 안 되는 분야였다. 오늘날 미국에서 힙합과 농구는 흑인이 점령하다시피 했고, 다른 대중음악과 스포츠 분야에서도 흑인이 없으면 흥행에 큰 차질을 빚는 수준이 됐다.
힙합이 처음부터 흑인의 성공을 보장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흑인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힙합음악이 유행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들만의 문화였을 뿐이었다. 대중들이 힙합에 관심이 가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힙합 음악가 런-DMC가 대성공을 거두고, 비스티 보이즈같은 백인 힙합 음악가까지 나타나면서부터다. 힙합이 흑인 문화에서 시작한 분야다보니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이나 사회 비판은 기본이었고, 이유 없는 공격도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이들 중 적극적인 사회 비판으로 흑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인물은 단연 척 디였다. 본명이 칼튼 리드나워인 척 디는 다른 힙합 음악가들처럼 폭력적인 저항 대신 사회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척 디는 대학까지 졸업하는 등 딱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척 디는 아델피대학교 그래픽 디자인학과에 다니면서 라디오 DJ로 활동하는 등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음악 활동을 하던 척 디는 아델피대학교 재학 중이었던 플레이버 플래브를 만났고, 같은 취미를 공유한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플래브는 5세 때부터 피아노를 익혔고, 교회 성가대에서 드럼,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면서 음악적 이해가 깊었다. 고등학교 중퇴에 도둑질로 교도소를 다녀온 경험도 있는 사고뭉치였지만 음악이라는 공통점 덕에 척 디와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기로 의기투합한 둘은 밤 스쿼드라는 힙합 그룹을 결성했다. 마치 대학교 동아리 만들어지듯 쉽게 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척 디는 이미 스펙트럼 시티라는 힙합 그룹에서 싱글 <Check Out the Radio>를 발매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완전 무명의 음악가는 아니었다.
밤 스쿼드 결성 후 척 디는 라디오 DJ 시절 인연을 맺은 빌 스테프니의 소개로 릭 루빈을 만났다. 루빈은 훗날 콜럼비아 레코드의 사장이 되는 인물로 당시 데프 잼 레코드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었다. 척 디와 플래브의 능력을 알아 본 루빈은 이들과 공식 계약을 맺었다. 이후 DJ 출신 터미네이터 X와 경호원 출신 프로페서 그리프를 섭외해 퍼블릭 에너미라는 힙합 그룹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퍼블릭 에너미는 1987년 데프 잼 레코드에서 1집 앨범 《Yo! Bum Rush the Show》를 발매했다. 흑인 혁명을 주도한 퍼블릭 에너미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으로 <Too Much Posse> <Rightstarter (Message to a Black Man)> 등 노래 이름만 봐도 저항 정신이 눈에 띈다. 1987년 『New Musical Express』가 선정한 최고의 앨범 1위에 오르는 등 언론도 퍼블릭 에너미의 거침없는 도전에 주목했다.
‘퍼블릭 에너미의 데뷔 앨범 《Yo! Bum Rush the Show》는 올해 가장 투지 있는 랩 앨범이자 가장 빠르게 팔린 랩 앨범 중 하나다. 앨범은 "어-오. 척. 저들이 우리에게 못된 행동을 하려고 해"라고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척 디와 플래브를 뜻한다. 그들은 남을 설교하려 들지 않으면서 최하층 흑인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인다. 앨범의 커버와 재킷에 그들의 타깃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 지하철에서 네 명의 흑인 젊은이들을 쏜 버나드 게츠나 흑인을 상대로 한 사건이 벌어진 하워드 비치는 퍼블릭 에너미의 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 1987년 5월 10일 『New York Times』
기사에 나온 버나드 게츠는 1984년 뉴욕 지하철에서 5달러를 요구한 10대 흑인 소년들을 총으로 쏜 사람이다. 게츠는 정당방위를 주장했고, 이에 법원은 총기 소지와 관련한 것만 일부 유죄로 판결해 징역 8개월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판결을 내렸다. 다행히 흑인 소년들은 사망하지 않았지만 이 판결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또 1986년 12월, 뉴욕 인근 하워드 비치에서는 마이클 그리피스라는 흑인 청년이 백인들과의 시비 끝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노래에서 이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여전히 인종차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는 마틴 루터 킹과 같은 흑인의 정신적 지주도 없었기에 1960년대에 비하면 흑인들의 단결력도 부족했다. 흑인들이 힙합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퍼블릭 에너미에게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퍼블릭 에너미는 1988년 2집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을 통해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Countdown to Armageddon> <Bring the Noise> <Mind Terrorist> <Louder Than a Bomb> <Rebel Without A Pause> <Prophets of Rage> 등등 제목부터가 가히 혁명적인 수준이다. 퍼블릭 에너미 스스로도 마빈 게이 앨범 《What's Going On》의 힙합 버전이라면서 사회적 메시지가 들어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음악적으로도 의의가 큰 앨범이다. 당시 퍼블릭 에너미의 음악은 이스트코스트 힙합으로 분류됐다. 이스트코스트 힙합은 다음절 라임, 복잡한 은유적 표현, 공격적인 비트 등 각종 기교가 특징이며 뉴욕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장르다.
퍼블릭 에너미는 이스트코스트 힙합에 머물지 않고 하드코어 힙합 진출을 시도했다. 하드코어 힙합은 이스트코스트 힙합에서 파생된 장르로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드코어 힙합의 시작은 런-DMC로 보지만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발매 이후였다. 퍼블릭 에너미는 록 사운드를 힙합에 도입함으로써 독특한 음악을 만들었고, 하드코어 힙합을 대중음악 주류 장르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상업적인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대성공이었다. 빌보드 R&B/힙합 차트 1위, 1988년 『New Musical Express』가 선정한 최고의 앨범 1위, 『The Village Voice』 선정 1988년 올해의 앨범 1위 등등 온갖 상을 휩쓸었다. 멀리 한국까지 영향을 미쳐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난 알아요> 도입 부문에 퍼블릭 에너미의 <Bring the Noise>가 삽입되기도 했다.
기득권 세력들은 흑인의 도전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듯하다. 물론 아무리 백인이라도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거나 인권운동 한다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었기에 퍼블릭 에너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고, 다른 이유로 트집 잡을 기회를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평화적 운동을 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퍼블릭 에너미의 가사는 공격적인 부분이 많아 논란이 됐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되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1989년 5월 프로페서 그리프는 『The Washington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들은 세계적인 혼란에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 인터뷰에 크게 반발했고, 일각에서는 퍼블릭 에너미를 ‘블랙 나치’라고 불렀다. 유대인은 미국 미디어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에 한동안 라디오에서 퍼블릭 에너미 곡을 들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테러조직 JDO(유대인 방위조합)는 퍼블릭 에너미에게 살해 협박을 하는 등 정상적인 생활마저 어렵게 만들었다.
척 디는 상황 수습을 위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한편 프로페서 그리프를 퍼블릭 에너미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1990년 1월 싱글 <Welcome to the Terrordome>이 발매되면서 논란은 재점화됐다. 이 곡은 유대인을 겨냥한 곡으로 퍼블릭 에너미는 유대인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택한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허구임에 틀림없어.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소위 엄선된 사과. 여전히 그들은 나를 예수처럼 여기지.’ - <Welcome to The Terrordome>
사회적 논란은 컸지만 퍼블릭 에너미를 옹호하는 여론도 작지 않았다. 퍼블릭 에너미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판이 너무 과도하다는 주장이었다. 1990년 2월 7일자 『Los Angeles Time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왜 호들갑을 떠는지 궁금할 것이다. 유명 음악가들의 많은 노래들은 여성, 게이, 흑인, 가톨릭, 낙태 등을 공격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왜 유대인들의 감정이 저들보다 더 중요한가. 특히 이 곡은 가사도 애매모호하다.’ - 1990년 2월 7일 『Los Angeles Times』
논란은 이어졌지만 척 디는 누가 뭐래도 흑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논란이 커질수록 척 디를 추종하는 흑인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퍼블릭 에너미를 둘러싼 여러 논란들도 흑인의 인권을 외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 만큼 논란과 비례해 흑인들로부터 받는 인기도 상승했다. 척 디는 인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과 같은 명작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했다.
퍼블릭 에너미가 1991년 4월 발매한 《Fear of a Black Planet》은 제목 그대로 흑인들을 위한 앨범이었다. 퍼블릭 에너미는 <Fight the Power>에서 백인 엘비스 프레슬리와 존 웨인을 깎아내리고, 흑인의 영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400년 동안 우표에 흑인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여전히 미국 사회가 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척 디는 <Power to the People>을 통해 아예 흑인들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고, <Brothers Gonna Work It Out>에서는 흑인들이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백인들 입장에서는 심히 위험해 보이는 사상이었다.
퍼블릭 에너미에 대한 흑인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기에 보수 백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Fear of a Black Planet》은 빌보드 차트 10위에 오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흑인들도 힙합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 시기 데뷔한 힙합 음악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정치적 메시지에 몰두했다. X-클랜, 파리스, 푸어 라이처스 티처스 등 정치적 메시지로 유명한 힙합 음악가들이 등장한 시기도 이때다. 힙합 음악가들의 절대다수가 흑인이었기에 이는 곧 흑인민권운동이 지향하는 방향과도 일맥상통했다. 척 디 스스로도 1991년 10월 『The Village Voice』와의 인터뷰에서 “《Fear of a Black Planet》은 우리의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척 디는 ‘아프리카인’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흑인’이라고 통칭했다. 당시까지만 해도(현재도 그런 분위기가 없잖아 있지만) 흑인(Black)이라는 단어에는 뭔가 모를 부정적인 뜻이 내포돼있었다. 그러나 흑인의 피부가 까만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은 각 사람의 특징일 뿐 평가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척 디 입장이었다. 척 디에게 있어 흑인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는 전혀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란 척 디를 아프리카와 연관 짓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기는 했다.
퍼블릭 에너미의 이어진 앨범 《Apocalypse 91… The Enemy Strikes Black》 역시 흥행을 이어갔다. 이제는 앨범을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흑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판매량은 보장된 것이었다. 《Fear of a Black Planet》과 마찬가지로 앨범 제목에 흑인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달았다. 앨범에서 가장 눈길을 끈 곡은 <By the Time I Get to Arizona>로 마틴 루터 킹 기념일에 부정적 의견을 보인 에반 메참 애리조나 주지사를 겨냥했다. 척 디는 뮤직비디오에서 애리조나 공무원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자동차를 폭파시켜버렸다. 메참 주지사를 비판하는 많은 흑인들이 척 디를 통해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MTV』에서 해당 뮤직비디오를 방영하자 폭력적인 장면으로 많은 항의를 받았고, 이후 『MTV』에서 <By the Time I Get to Arizona> 뮤직비디오는 볼 수 없었다.
퍼블릭 에너미는 항상 흑인들의 우상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핵심 멤버인 플래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고 다녔다. 1991년 플래브는 여자친구 폭행 혐의로 30일간 감옥에 갇혔다. 1993년에는 이웃에게 총을 쏜 혐의로 90일 동안 구금됐다. 총에 사람이 맞지 않아서 살인죄를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후에도 플래브는 폭행, 마약 등으로 경찰서를 오갔다.
다른 멤버인 터미네이터 X는 1994년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 활동을 중단했다. 플래브와 터미네이터 X가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자 척 디는 1996년 솔로 앨범 《Autobiography of Mistachuck》을 발매했지만 빌보드 차트 190위라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을 기록했다.
퍼블릭 에너미 없이 혼자서는 성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척 디는 터미네이터 X 후임으로 DJ 로드를 새로운 멤버로 영입해 그룹 재정비에 나섰다. 그렇게 1999년, 퍼블릭 에너미는 오랜만에 앨범 《There's a Poison Goin' On》을 발매했다. 이전처럼 사회 비판에 적극적이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의 항의까지 받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빌보드 차트에 진입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퍼블릭 에너미는 이후에도 간간히 앨범을 냈지만 이전 같은 영광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팝 음악이 결합된 얼터너티브 힙합이 유행하면서 정통 힙합을 추구했던 퍼블릭 에너미의 입지도 더욱 좁아졌다. 그렇지만 퍼블릭 에너미는 하드코어 힙합의 선구자이자 스크래치 사운드를 통해 갱스터 랩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1990년대 중반까지 힙합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지금처럼 힙합이라는 그들만의 방식을 통해 흑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퍼블릭 에너미가 없었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2020년, 퍼블릭 에너미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사람들 입방아에 올랐다. 2020년 3월 1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퍼블릭 에너미는 버니 샌더스 민주당 예비후보 선거 유세 행사에 찬조 참여했다. 그러나 플래브는 참여를 거부하며 샌더스 유세 현장에 퍼블릭 에너미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플래브 측은 “척 디는 그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서도 “그의 목소리가 퍼블릭 에너미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에 척 디는 “플래브는 돈을 위해 춤을 추는 길을 택했고, 선행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사실 척 디와 플래브는 음악 저작권료 등의 문제로 수년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간 팽팽하게 이어진 갈등이 정치적 문제로 폭발한 것이다. 척 디를 포함한 퍼블릭 에너미 멤버들은 플래브의 해고를 결정했고, 다른 멤버들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플래브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플래브는 트위터를 통해 “지금 장난해? 버니 샌더스? 우리가 쌓아온 35년을 정치적 이유로 파괴한다고?”라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척 디는 성명을 통해 “퍼블릭 에너미는 플래브 없이 전진할 것”이라며 “수년간 활동해 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앞으로 잘 되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플래브를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