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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19. 2021

밀림에서 뱃놀이를 즐기다

케랄라 백워터 유람기



 케랄라 주는 인도의 서남단으로 아라비아 해와 접해 있다. 대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높고 거친 파도를 만들어 어촌 마을에 위협을 가했다.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거나 상선이 좌초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옛 케랄라인들은 거대한 자연에 맞서기보다는 석호와 내륙의 호수를 강과 연결하여 물길을 만들었다. 해안선을 따라 육지에 판 운하는 바다와 달리 잔잔하고 물을 구하기도 쉬웠다. 폭이 넓으면 사람과 물자를 이동하는 통로가 되고 좁으면 주민들이 조개를 캐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백워터(backwater)부르는 촘촘한 수로는 잎맥처럼 뻗어나가 안과 뭍열대우림의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는데 일조했다. 케랄라 주에서는 크고 작은 물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길이가 장장 900km에 달한다. 운하는 과거에는 상업으로 부를 쌓게 고 오늘날에는 여행자를 끌어 모으고 있다. 동방의 베네치아가 바로 이곳에 있다.


파도가 높은 아라비아 해와 잔잔한 백워터는 모래사장을 사이에 두고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케랄라를 방문한다수로 유람은 필수 코스다. 대개 중부의 알라뿌자(Alappuzha) 꼴람(Kollam) 중심으로 물길 여행을 지만 관광객이 많아 번잡스러운 면이 있다. 백워터의 아름다운 열대림소박한 일상을 보고 싶어 비교적 덜 알려진 장소를 물색하기로 한다. 코발람 해변의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여행사 간판을 찬찬히 훑는다. 포오바(Poovar)라는 낯선 지명과 함께 야자수에 둘러싸인 한적한 백워터의 풍경에 홀린 듯 다가선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주인장이 문을 열고 나온다.

-포오바 기가 막히죠. 알라뿌자만큼 이름나진 않았어도 그 못지않아요.

검색해보니 정보가 거의 없다. 미심쩍지만 자신만만한 주인장의 추천에 못 이긴 척 예약해 본다.

-내일 아침 7시 출발이에요.

보통 운하를 둘러보는데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다. 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가도 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출발하는 걸까.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호언장담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무겁게 감기는 눈을 비비며 코발람 남쪽 동네로 향한다. 삼십 분을 달려 도착한 포오바의 선착장는 사람이 없어 전세를 낸 듯하다. 수로에는 작은 모터가 달린 배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반질반질한 파란 나룻배에 올라탄다. 지붕은 가장자리를 반달무늬로 장식한 흰 천으로 덮여 있어 눈부심을 덜어준다. 올망졸망한 선체의 크기에 맞게 앞쪽에는 1인 자리가 넷 있고 뒤편에는 기다란 나무판자가 둘 있다. 오늘의 승객은 둘 뿐이다. 사공이 뒷자리에서 방향을 틀며 널찍한 운하의 중심부로 배를 몬다. 강변의 야자나무와 바나나 나무가 물길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매끄러운 수면 위로 열대의 초록과 구름 한 점 없는 푸름이 반사되어 무엇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거울을 보는 거 같기도 데칼코마니를 찍는 거 같기도 하다. 우거진 이파리 사이로 아침 햇살이 낮게 뻗어 나온다. 뿌리가 다른 줄기와 잎이 교차하여 태양의 길목을 막는다. 여러 갈래로 쪼개진 빛 사이로 나무기둥의 그림자가 키를 늘린다. 은은한 투명과 어두운 그림자의 줄이 섞여 영험한 기운을 내뿜는다. 마치 고대 신화 속 태양신 강림할 것 같다.


이른 시각이라 나루터가 텅 비어 있다. 아침을 맞이하는 포오바의 정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널찍한 운하 곳곳에는 샛길이 있다. 속도를 줄여 좁다란 어귀로 들어서자 목이 길고 허리가 두꺼운 나무는 사라지고 작고 얇은 수풀의 세상이다. 밀림의 식물은 충만한 생명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몸체가 강물에 반쯤 잠겨 있는가 하면 필사적으로 줄기와 잎을 뻗어 수면 위로 내딛기도 한다. 그러다 가제트 다리처럼 강바닥에 내린 뿌리를 물 위로 기다랗게 세운 맹그로브를 만난다. 붉은 뿌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맹그로브 숲은 수중과 지상을 동시에 지배한다. 소리 없는 전쟁의 결과로 열대의 이파리는 면을 덮어 수로의 폭을 좁게 한다. 맹렬한 기세라면 공중전도 뒤지지 않는다. 광합성에 대한 열망은 위로 솟다 못해 옆으로 퍼져나가 건너 줄기와 부닥친다. 창끝처럼 뻗은 가지는 휘어지고 잎사귀는 공간을 빈틈없이 메워 영역을 확보한다. 얽히고설킨 나무터널은 조용하지만 혹독한 정글의 생존 법칙을 보여준다. 신선놀음하듯 떠난 뱃놀이에서 황홀한 초록의 향연과 함께 생(生)의 의지를 목격한다. 


포오바의 잔잔한 물길은 풀빛으로 가득차 있다.


 강폭이 넓어지면서 빼곡한 열대림이 조금씩 걷힌다. 강변에 돌을 쌓아 지대를 다진 걸 보니 마을이 가까워지나 보다. 담을 따라 공기주머니가 통통하게 부푼 부레옥잠 군락이 덩어리 져 떠 있다. 끝 모르게 줄을 잇는 잎자루를 쫓다수로와 연결된 계단을 만난다. 층계 위로 형광 연두색의 동그란 지붕을 가진 거대한 회당이 있다. 창마다 반원 형태의 가림 지붕이 있고 벽면을 따라 손잡이 달린 물통이 여럿 있다. 왼쪽 단 아래에는 각양각색의 색깔과 글씨로 꾸민 원통 옆으로 옷가지가 놓여 있다. 옷감의 주인은 허리까지 오는 수심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이다. 이른 아침부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님이 당황한 걸까? 손을 휘휘 저으며 얼른 지나가란다. 잠시 후 어깨를 드러내고 거품을 내며 머리를 감는 여인들이 등을 보인다. 잽싸게 고개를 숙인다. 의도치 않게 실례를 범했다. 운하는 그들의 생활 반경이다 보니 개인생활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자연이 만든 거울을 찾는다면 포오바가 아닐까?


 포오바 주민의 은 물길을 거치지 않고 상상하기 어렵다. 민가와 작업공간은 항상 운하 가까이에 있다. 식수는 물론이고 빨래, 샤워, 설거지와 같은 생활용수를 이곳에서 얻는다. 아이들은 얕은 물가에서 헤엄치고 조개를 잡으며 놀이를 한다. 밀림에서 딴 코코넛과 야자열매를 손질하여 내다 팔 준비를 하고 뱃길을 통해 운반한다. 케랄라인에게 백워터는 목숨줄이나 다름없다. 마을을 벗어난 수로의 나무 그늘 아래는 어부의 공간이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고정해 둔 채 고기를 낚고 있다. 흰 수염의 노옹은 웃통을 벗고 윗도리를 목도리처럼 감고 있다. 길쭉한 선체에는 낚싯대와 통 외에 별다른 것이 없다. 나무를 얄팍하게 깎아 만든 낚싯대의 끝단에는 하얀 실이 묶여 있다. 물고기를 유인하려면 줄의 색이 자극적이지 않은 게 좋을 게다. 고기잡이는 대 세 개를 동시에 한 손에 쥐고 있는 걸 보니 그다지 무겁지 않은 재료를 사용하나 보다. 노인이 낚은 생선은 가족을 배 불리고 시장의 가판대를 채울 것이다. 


알록달록한 고깃배는 포오바인의 생계를 책임진다.


 열대의 삼림 틈바구니에 주인 없는 빈 배들이 떠 있다. 파란 덮개가 있는 걸 보니 버려진 건 아닐 텐데 민가 주변의 계단이나 나루터에 묶어두지 않는 까닭이 있는 걸까. 갑판 위는 새들의 휴식처이다. 그중 낯익은 모양이 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깃털은 시선을 사로잡는 형광 파랑에 배 쪽은 오렌지빛이다. 물총새(kingfisher)를 볼 줄이야. 인도 맥주 대표 브랜드 킹피셔는 화려한 빛깔의 앙증맞은 녀석의 이름에서 따왔다. 목을 빼고 고깃배를 관찰하다가 다시 거대한 운하의 품으로 들어간다. 불어난 강물을 타고 가마우지(darter) 떼가 날아든다. 먹물을 뒤집어쓴 듯 시커먼 몸을 물에 담그고 가늘고 긴 목과 뾰족한 부리만 수면 위로 내놓고 있다. 생김새가 뱀과 닮아 뱀새(Snakebird)라고도 부르는데 먹이를 사냥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바다새와 함께 흘러가는 물길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다. 야자수는 저 멀리 몸을 숨기고 강변을 모래 둔덕이 차지한다. 백워터의 끝에서 바다가 있다.

    

운하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새를 관찰하기 좋다.


 백워터와 바다 사이에는 긴 띠처럼 이어진 백사장이 있다. 사구는 성격이 다른 물줄기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서편에서 아라비아 해의 파도가 밀려온다. 모래사장에 부서지는 거품은 동쪽 운하의 고요함을 깨지 못한다. 언덕에는 나무기둥과 푸른 천막이 세워져 있다. 수로에 배를 댄 상인은 부지런히 짐을 실어 나른다. 테이블과 의자, 음식 재료를 담은 상자와 포대가 쏟아진다. 사시사철 후덥지근한 여름을 보내는 케랄라인들은 최소한의 의복만 갖춰 입는다. 물길의 남성은 웃통을 벗고 치마 모양의 천을 허리에 감고 있다.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와 하루에도 몇 차례 담그는 물속에서 신발은 무용한 도구다. 해변의 노천 식당은 세로 기둥에 가로 가지를 엮어 파인애플을 매달고 있다. 손님의 이목을 끌 탐스러운 장식이다. 태양의 높이가 중천을 향해 올라갈수록 살갗을 태우는 빛의 세기가 강렬해진다. 두어 시간 뒤면 관광객들이 운하에 배를 대고 아라비아 해를 감상하며 맛있는 오후를 보낼 테다. 


 점심 나절을 준비하는 분주한 손길을 뒤로하고 뱃머리를 돌린다. 나루터는 승선을 준비하는 탑승객으로 왁자지껄하다. 단잠을 자고 몰려든 여행자는 포오바의 소리를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살을 가르는 배의 삐걱거림과 밀림에 갇혀 웅웅대는 바람, 나긋하게 지저귀는 새의 울음과 부딪치는 잎사귀의 떨림은 꼬리를 물며 물길을 유랑할 때 쉽사리 들을 수 없는 작은 자취이다. 이제야 새벽같이 떠나야 한다는 주인장의 이야기가 와닿는다. 숨소리마저 삼키게 되는 고요함 속에서 오롯이 포오바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면 아침을 열어야 한다.


백워터에 배를 대고 점심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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