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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n 26. 2019

인도에서 초보 서퍼가 되다

미션! 코발람 해변에서 대장 서퍼 마니 찾기


 까슬하게 그을린 어부가 청량한 물결을 거슬러 정박한다. 황금빛 모래 위로 집채만 한 선체가 엉금엉금 기어오른다. 노인의 지난밤은 바다를 통째로 낚은 듯하다. 파라솔 아래 아낙은 짙은 코코넛 색 반팔에 망고빛 사리를 뽐낸다. 이른 아침부터 잘 익은 몽키바나나와 파인애플, 구아바와 파파야를 손질하며 바지런히 장사를 준비한다. 가판대 너머 곱슬머리 사내는 푹신한 썬베드를 겹쳐 나른다. 해변의 휑한 철제 다리는 소금기 어린 바람을 맞으며 다가오는 주인을 기다린다. 시선을 한 뼘 옮기면 신성한 일터는 노동의 피로를 지우고 휴양지로 탈바꿈한다. 책장 너머 한가로이 아라비아 해를 읽는 백발의 노부부와 발이 빠져 넘어져도 까르르 웃으며 백사장을 질주하는 아이들은 소답한 어촌 마을을 싱그러운 색채로 물들인다. 파도를 타는 무리가 금세 시선을 뺏는다. 제 몸보다 기다린 서프보드에 올라 물살을 입맛대로 요리한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가슴 언저리에서 일렁이는 파아란 너울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코발람에서는 여행자의 여유와 현지의 삶이 공존한다. 해변 가장자리에는 어부의 배가 파라솔 옆에 놓여 있다.


 남인도는 물이 맑고 파도가 적당해 서핑으로 이름 난 해안이다. 좋은 파도를 놓치지 않으려고 수소문을 한다.

- 서핑을 배우고 싶다고? 마니가 최고야! 해변으로 가 봐.

그렇게 서울에서 김서방, 아니 코발람에서 대장 서퍼 마니 찾기에 돌입한다. 단서가 등대해변뿐이라 일단 연안을 샅샅이 훑기로 한다. 요령 없이 덤벼드니 막막하기만 하다. 한낮의 더위에 열의가 한 풀 꺾일 무렵 초승달 모양의 해안가 끝자락에서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안전요원을 발견한다. 사무실 쪽을 가리키는 손길을 따라 좁다란 뒷길로 들어선다. 밀집한 벽과 낮은 차양은 햇빛을 걷어내 골목의 밝기와 온도를 한층 낮춘다. 작지만 깊은 공간에는 점심영업을 준비하는 식당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 비치웨어와 전통의상을 전시한 옷 가게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마니는 유명인사인지 이름만 대도 바로 답이 나온다. 상인들에게 물어물어 미로 속을 배회한다. 안으로 파고들수록 떠들썩함이 멎고 으스스한 기운이 몰려온다. 머릿속 위험신호에 반응하며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모퉁이 저편 벽화가 번뜩인다.


 앞머리가 흘러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개구진 꼬마가 가슴 한가득 보드를 끌어안고 발목에 줄을 감고 있다. 불가사리와 조개, 물고기와 잔물결까지 살뜰히 칠한 그림을 보니 알맞게 찾아왔나 보다. 안도의 기쁨도 잠시 녹슨 철문이 입구를 가로막는다. 뒷발을 콩콩 대고 있으니 옆집 노인이 전화기 모양의 손동작을 취한다. 안타깝게도 유심이 불량이라 통화가 먹통이다. 막무가내로 기다릴 수는 없으니 거리로 발길을 돌린다. 해변의 안전요원에게 상황을 알리자 형광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무리에게 손짓한다. 프로 서퍼를 목표로 훈련하는 앳된 학생들이다.

- 서핑을 배우고 싶어. 마니는 어디에 있어?

눈을 끔뻑이며 서로를 번갈아보더니 손사래를 친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그때 비치발리볼을 하던 친구가 말을 건다.

- 정면에 검은색 수영복 입은 키 큰 남자 보여? 지금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잖아. 저 사람이 마니야!

놓칠세라 곧바로 달려간다.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모를 게다. 험난했던 대장정을 풀어놓자 허리를 젖히며 웃는다. 미션 클리어! 서핑보다 너를 만나는 게 훨씬 힘들었단다.


'Find us on the beach'라는 미션을 달성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카난은 오늘 내가 탈 보드에 왁스칠을 하고 있다.


 나의 첫 서핑 선생님은 카난이다. 대개 서퍼들이 그러하듯 매일 강한 태양빛을 받아 그의 피부는 다크 초콜릿색에 가깝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3시에 방문하자 카난은 서프보드에 왁스를 꼼꼼히 바르고 있다. 분필처럼 슥삭 문지르는데 파도를 타는 도중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사무실 안에는 제각기 다른 특색의 서핑보드가 세워져 있다. 길이가 짧거나 긴가 하면 꼬리 부분이 뾰족하거나 둥글거나 네모지다. 눈대중으로 재어보니 단연 내가 사용할 롱보드(longboard)의 덩치가 제일이다. 키의 1.5배 정도 될 듯하다. 카난의 것은 길이가 훨씬 짧다. 크기가 작을수록 균형을 잡기 어렵다고 한다. 보드의 모양이 나를 증명한다. 왕초보 서퍼의 탄생이다. 이글이글 익는 오후의 볕을 피해 실내로 몸을 숨겼는지 해변은 제법 한산하다. 몸이 쏙 가려지는 서프보드를 이고 뒤뚱거리며 물가로 향하는데 카난이 뒤를 돌라는 사인을 보낸다. 달궈진 뭍 위로 보드를 눕히고 어정쩡하게 걸터앉는다. 본격적인 서핑에 앞서 기본 동작을 익혀야 한다.

첫째, 보드 위에 엎드린다.
둘째, 원투쓰리 구호에 맞춰 손으로 물살을 가른다.
셋째, 팔로 바닥을 밀며 상체를 끌어올린다.
넷째, 무릎을 구부려 일어선다. 이때 발은 보드와 수직으로, 팔은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액션가면 자세를 한다.

모래를 물결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손가락으로 파내는 게 머쓱하지만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모래 범벅이 될 즈음 얼추 카난의 지시에 맞추어 알맞은 동작을 선보인다. 드디어 바다로 나간다.


 콜록이며 허리를 구부린다. 눈이며 코며 바닷물은 구멍을 찾으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가시지 않는 짠내에 입안 가득 소금 샤워를 한 듯하다. 서프보드의 어마 무시한 몸체는 어찌나 파도에 가벼이 흔들리는지 일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수면 위로 떨어져 파도에 세차게 두드려 맞고 나면 여기가 어디인지 혼이 쏙 빠져나간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면 기다란 무언가가 다리를 잡아당긴다. 발목에 묶어둔 줄이 멀어지려는 보드를 부여잡고 있다.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몸짓으로 헤엄치면서 그물을 당기듯 보드를 데려온다. 물살과 다투며 해변과 바다 사이를 오가길 수 차례, 들이마신 물만큼 조금씩 감이 잡힌다. 마냥 겁을 집어삼키고 카난의 이야기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던 초반과 달리 발 위치와 무게중심을 옮기며 서서히 물결의 움직임을 읽는다. 침몰과 비상에는 한 끗 차이의 균형이 있다. 좋은 파도가 오면 카난이 신호를 준다. 열심히 팔로 노를 젓다 윗몸을 젖혀 재빨리 뛰어오른다. 앉는 데 성공하면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히 기다린다. 평형을 이루면 엉덩이를 들어 일어선다. 안정감이 생기면서 버티는 시간이 점차 늘어난다. 액션가면 자세는 여전히 잘 되지 않지만 풍덩할 때의 짜릿함이 커지니 그만하면 만족이다.


아라비아 해의 파도는 서핑을 즐기기에 최고다.


 코발람에는 알람시계가 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면 해변으로 나오라는 경계음이 울린다. 사위가 어두워지기도 하고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파도가 거칠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핑 수업을 끝마칠 무렵 높아진 수위에 멀리 떠내려간 아이들이 있었다. 카난이 구조를 하긴 했지만 확실히 늦은 오후에 파도를 타는 건 위험하다. 서핑을 하기에는 오전이 더 좋다. 뙤약볕도 없고 비교적 바다도 잔잔하다. 좌충우돌 초보 서퍼 데뷔전을 치르고 나니 식욕이 폭발한다. 여섯 시 알림음을 들은 해안가 식당에서는 그날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진열한다. 난생처음 보거나 익숙하지만 평소 알던 생김새와 다른 생선이 즐비한다. 청새치(Blue marlin)와 날새기(Cobia)는 어찌나 큰지 주둥이와 꼬리가 가판대를 뚫고 나온다. 병어와 바다송어, 전갱이(Pompano)는 무늬와 색깔이 우리나라 수산시장에서 본 것보다 화려하다. 타이거 새우, 오징어, 게처럼 들어서 바로 아는 이름이면 좋을 텐데 인도식 발음이라 주문하는데 애를 먹는다. 낯설지만 호기심을 자아내는 거대한 킹피시(kingfish) 사분의 일 토막과 익숙한 대하를 고른다. 원래 생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코발람에서는 매일 해산물 파티가 벌어진다. 바다 내음이 한껏 짙어진 저녁이다. 입안으로 파도가 들이닥친다.


저녁에는 오늘 갓잡은 신선한 해산물이 식탁에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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