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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n 24. 2019

인도의 첫날밤은 길바닥인가?

내가 이 풍경을 먹으려고 그 고생을 했나 보다



 자정 무렵 남인도의 상공에 불빛이 번뜩인다. 지상의 만물은 본연의 색을 숨기고 짙은 어둠 속에 잠겨있다. 기체가 내뿜는 섬광은 잠든 마을을 향해 불청객마냥 줄기를 쏘아댄다. 바퀴가 요란하게 구르고 내디딘 지면은 낮의 열기를 채 식히지 못해 후덥지근하다. 한겨울 서울의 냉기는 열대의 땅에서 자취를 감춘다. 늦은 시간이라지만 공항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도시의 침묵을 닮아 여행자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제일 먼저 건물 상단의 간판이 눈에 띈다. 동글동글하고 앙증맞은 글씨체는 도무지 해독할 수 없다. 그 아래에 영어로 쓴 낱말을 읽고 서야 케랄라(Kerala) 주의 공용어인 말라얄람어로 쓴 이름임을 눈치챈다. 도시의 본래 명칭은 티루바난타푸람(തിരുവനന്തപുരം)이다. 발음이 어려워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사용한 영어 지명 트리반드룸(Trivandrum)으로 부르기도 한다. 티루바난타푸람은 인도 남서부 케랄라의 주도로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공항을 나서기 전 다시금 매무새를 정돈한다. 인도의 공항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밖은 내부와 달리 손님을 맞이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숙소에 픽업 요청을 미리 해두었고 여러 번 메일로 확인을 했기에 자신만만하게 게이트로 향한다. 각양각색의 매직으로 써 내린 하얀 종이들이 펄럭인다. 제 주인을 닮은 필체를 훑어보며 내 이름을 찾는다. 입구부터 택시승차장까지 우후죽순 뻗은 피켓을 빠짐없이 읽어도 비슷한 철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사님이 늦을 수도 있으니 일단 차분히 기다리기로 한다. 벤치에 앉아 가방 안쪽 깊숙이 넣어둔 유심을 꺼낸다. 이번 인도 여행을 도울 비장의 무기다. 현지에서 심 카드를 발급받으면 개통하는데 하루 이상이 걸린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한국에서 발품 팔아 구해놓았는데 쏠쏠히 쓰일 줄이야.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새끼손톱 크기의 평평한 칩을 조심스레 구멍 안으로 끼워 넣는다. 삐걱대기도 잠시 딱 들어맞는 크기에 환호하며 전원을 켠다. 그런데 웬걸, 탁월한 준비성을 칭찬하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나를 비웃듯 전화도 데이터도 잡히지 않는다. 연결이 제대로 안 된 건지 유심칩이 잘못인지 알 길이 없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허탈함을 뱉어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순탄한 인도 상륙기는 정녕 꿈꿀 수 없단 말인가!


(좌) 케랄라의 주도 티루바난타푸람은 인도 대륙의 턱밑에 있다. (우) 말라얄람어는 동글동글한 케랄라 사람들의 성격을 닮았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택시 운전사가 말을 붙인다. 숙소 전화번호를 넘겨주자 다이얼을 돌린다. 수화음 너머로 응답이 없다. 이대로 공항 밖에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으니 그를 따라나선다. 정찰제 택시는 픽업 요금보다 저렴하고 목적지인 코발람(Kovalam)까지는 30분 거리이니 괜찮을 거라며 울적함을 달랜다. 티루바난타푸람은 대도시이고 코발람은 이름난 휴양지이지만 가는 길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황량하기 그지없다. 전조등을 끄면 빛 하나 없는 암흑 속을 헤쳐 가야 한다. 불 꺼진 단층 건물들은 스릴러 영화의 배경을 연상시키듯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잘 닦이지 않은 도로는 돌부리에 걸리듯 차체를 덜컹이게 한다. 해안도로 너머 펼쳐진 아라비아 해는 낭만은 온데간데없이 시커먼 물결만 넘실댄다. 더욱이 구글 오프라인 지도가 위치를 잡아내지 못해 기사 양반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지만 불안함을 티 내면 안 된다. 예약 확인서를 만지작거리며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찰나 길가에 차가 끼익 선다.


- 여기가 코발람이에요.

민가든 가게든 아무것도 없는 도로변에 내려주겠다고? 그는 어깨를 들었다 놓으며 고개를 젓는다.

- 호텔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출발 전에는 아는 곳이라며 호언장담하더니 목적지도 모르면서 손님을 태웠단 말인가. 숙소 번호를 내밀자 그는 다시 프런트에 전화를 돌린다. 긴 연결음이 초조하게 이어지지만 끝끝내 묵묵부답이다. 여기서 내리는 건 말도 안 된다. 차 안에 있어도 오금이 저리는데 깜깜한 밤 인적 드문 대로 한복판에서 미아가 될 수 없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드라이버와 실랑이를 벌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무엇이든 생각해 내야 한다. 약간의 단서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머리를 쥐어짜던 중 기억 저편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코발람에는 세 개의 해변이 있다.

- 등대해변(Lighthouse Beach)!

시동과 함께 택시는 커다랗게 U자를 그리며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다.


푸른 아라비아해와 빨간 등대, 노란 꽃잎이 어우러진 코발람의 오후


 점점이 불빛이 떠오른다. 전방에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추는 거리가 나온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손을 부여잡는다. 엑셀을 떼고 속도를 늦춘다. 양옆의 간판을 하나씩 비교하며 이름 맞추기를 시작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는데 아무리 찾아도 숙소가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 여기가 끝이에요. 더 이상은 못 들어가요.

정면에는 차의 진입을 막는 말뚝이 세워져 있다. 인도의 첫날밤은 길바닥인가?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다. 똑똑똑. 똬리를 머리에 올리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 모양의 하의를 입은 사내가 창문을 두드린다.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씩 웃으며 안내하겠단다. 믿어도 될까? 솔직한 심정으로 떨어지는 칼날이라도 붙잡고 싶다. 캐리어를 내리자 택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사라진다. 장난기 넘치는 사내는 15킬로짜리 트렁크 두 개를 혼자서 뚝딱 머리에 얹더니 앞장선다. 한 손으로는 짐을 지탱하고 다른 손으로는 여유롭게 핸드폰을 꺼낸다.

- 자나 봐요. 전화를 안 받네요.

기예를 감상하며 쫄래쫄래 따라가는데 가까이에서 파도소리가 덮쳐온다. 입이 쩍 벌어진다. 길 바로 옆에 초승달 모양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좁은 골목 안으로 꺾어 들어서자 야트막한 지붕이 줄지어 있다. 삐죽 튀어나온 전선과 간판 너머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로 쓴 반가운 이름이 보인다. 검정 대문을 밀치자 야자수가 우거진 아기자기한 정원이 나온다. 새하얀 3층 건물의 복도는 마당으로 탁 트여 있고 공간이 널찍해 방문 옆으로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를 놓을 수도 있다. 1층 모퉁이에는 리셉션 팻말이 꽂혀있지만 지키는 사람은 없다. 사내는 슬리퍼를 벗고 계단을 올라간다. 비어 있는 2층 방 하나를 열더니 전등을 켜고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틀어준다.

- 이 방 쓰시면 돼요.

드디어 도착이다. 한 시간 내내 졸이던 마음이 탁 풀어진다.

- 고마워요! 여기 직원이에요?

- 아뇨. 제 친구가 여기서 일하거든요. 달러나 유로로 주시면 돼요.

그러하다. 정체 모를 사내는 밤늦게 헤매는 여행자를 대상으로 짐을 들어주고 돈을 뜯어내는 삐끼인 것이다. 당한 걸 알지만 그가 아니면 첫날부터 노숙 신세이니 순순히 내줄 수밖에 없다. 5유로 지폐를 건네자 신이 나 밤 인사를 하곤 또 다른 손님을 찾아 떠난다. 인도 물가를 감안하면 꽤나 큰 액수다. 지금 나에게 흥정할 기력이 남아있을 리 없다.


아낙은 펄떡이는 생선을 양동이에 이고 남정네는 가지런하게 갠 옷감을 팔고 있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프런트로 뛰어간다. 어제 일을 항의하려는데 정작 주인은 너무나 태평하다.

- 친구한테 들었어요. 깜빡 잠이 들었지 뭐예요. 방값 결제는 현금만 돼요. 아참, 오늘 주방장이 없어서 다른 데서 먹어야 해요.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하는 주인장의 태도에 김이 샌다. 허허실실 웃는 상대에게 따져봐야 통할 리 없다. 아마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거고 그에게는 분명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해프닝일 테다. 아침부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식당을 향해 거리로 나선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앞서 가던 직원은 멎은 발자국 소리에 뒤돌아보더니 이해한다는 듯 엄지를 세운다. 밤새 그 북새통을 겪게 해도 믿을 구석이 있었던 게다. 탁 트인 시야 너머 푸른 아라비아 해와 빨간 등대가 인도에 온 걸 환영해준다. 내가 이 풍경을 먹으려고 그 고생을 했나 보다. 인도(人道)의 끝자락에서 곡예하는 남자아이는 해맑게 윙크를 하고 낯익은 삐끼는 입이 귀에 걸린 노부부를 모시고 있다.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의 테라스에 앉아 사람 냄새나는 일상과 어지러이 전선이 얽힌 투박한 경치를 맛본다. 잊지 못할 첫날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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