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 Jan 26. 2022

인도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남인도에서는 태엽을 느슨하게 감아야 한다


 끼익 끼익, 쇳소리만 나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 어젯밤 안쪽에서 잠겄는데 무언가 잘못된 걸까? 창문틀 사이로 열쇠를 건네자 주인장이 밖에서 자물쇠를 딴다.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탈출 작전으로 허기가 진다. 일곱 시에 조식을 신청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여덟 시가 되어서야 맞은편 부엌에서 조리도구가 부닥친다. 이제 시작하나 보다. 삼십 분을 꼬박 채우고 다소 엉성한 모양의 아메리칸 브렉퍼스트가 나온다. 멕시칸 소스를 바른 샌드위치와 후추를 뿌린 계란 프라이, 잘게 썬 수박과 파인애플, 그리고 코코아 맛이 나는 커피는 투박하지만 ‘오랜’ 정성이 담겨 있다. 도착한 날에는 웰컴 드링크로 망고 주스가 어떠냐는 물음에 흔쾌히 답했다가 한 세월을 기다렸다. 시장에서 물건을 직접 사 와서 만드는 게 아니냐는 농담은 웃음기 뺀 진담으로 돌아왔다. 방에 쓰레기통이 없어요. 꼬박 반나절이 걸린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네요.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니 그제야 방문을 두드린다. 너무나도 느린 속도에 답답하다가도 나의 필요를 잊지 않고 챙겨주는 주인을 보면 싫은 소리가 쏙 들어간다. 불쑥 들이닥치는 세심한 친절에 감동받기도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생수병을 사 오자 냉장고에서 시원한 새 통을 선뜻 건넨다. 그는 자신의 시간에 맞추어 최선을 선물한다.


바르깔라는 해안절벽에서 내다보는 조망과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을 모두 가지고 있다,


 14억 인구가 들썩이는 인도는 어딜 가나 붐벼 혼을 빼놓는다. 어수선한 장내와 달리 그들의 시계는 신기하리만치 초침이 느리게 째깍거린다. 북새통 속에서 빨리 해치우는 게 쉽지 않을 뿐더러 더운 날씨도 한몫한다. 특히 남부는 일 년 내내 무더운 열대 기후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 에너지 소모가 크다. 길바닥에 지천으로 널린 게 바나나고 야자열매인데 아등바등할 이유도 없을 듯하다. 남인도에서는 태엽을 느슨하게 감아야 호흡이 맞다. 느긋한 하루를 경험하기에 바르깔라(Varkala)만 한 곳이 없다. 깎아지른 해안절벽 위에 자리한 도시는 기다랗고 좁은 벼랑을 따라 나 있다. 바다를 옆에 끼고 골목을 걸을 때면 개성 넘치는 가게의 테라스가 끝없이 펼쳐진다. 15m 낭떠러지 너머에는 어둠을 씻어내고 말간 얼굴을 드러 낸 하늘이 아라비아 해와 맞닿아 수평선을 이룬다. 어느 하나 걸리는 곳 없이 탁 트인 대양은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시원함이 있다.


 해변으로 내려가려면 절벽 곳곳에 아슬아슬하게 난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발을 헛디딜까 아래만 보는데 까마득한 높이에 눈앞이 아찔하다. 물이 빠져 널찍한 모래사장에는 움푹 파인 길이 있다. 물길은 벼랑에서 바다 쪽으로 흐른다. 손가락을 담가 맛보니 민물이다. 작은 실개천은 소리 없이 짠내 풍기는 바람에게 합류한다. 찰랑이는 파도 끝에서 정다운 오누이가 놀이를 한다. 바닷물을 머금은 흙을 뭉쳐 모래성을 쌓는다. 물결은 빠르게 침입해 토대를 무너뜨린다. 부서진 덩이를 손으로 짓이겨 진흙 찜질을 하듯 서로의 몸에 발라준다. 흐뭇하게 광경을 지켜보다가 뜨거운 태양을 피해 일어선다. 곁을 지나치는 순간 갑자기 소년이 소녀를 밀친다. 화가 난 소녀는 소년을 넘어뜨린다. 팔뚝에 달라붙은 부스러기를 신경질을 내며 상대에게 털어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검은 해변을 걸으면 발바닥이 시커메진다.


 북쪽 절벽 끝에는 검은 해변(Black beach)이 있다. 한참 걸어야 하고 규모도 협소지만 한적한 정취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다. 해변이 이름 난 까닭은 모래의 색깔에 있다. 석탄처럼 시커먼 가루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주변을 살피니 근처의 암석에 검정빛이 돈다. 보드라운 흙의 알갱이는 바위가 물살에 부딪쳐 풍화된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일찍 온 여행자는 바닥에 얇은 천을 깔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모퉁이에는 요가 수업이 한창이다. 일렁이는 태양빛과 바다내음, 대지의 뜨거움과 파도소리를 온전히 느끼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분은 어떠할까.


 청아한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울림의 중심에는 놋그릇처럼 생긴 싱잉볼(Singing bowl)이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비롯된 종은 명상과 요가에서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공명의 크기와 음의 높이가 다양하다. 그릇의 지름과 높이, 채의 생김새와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겉면을 두드리거나 문지르며 연주한다. 인도에서는 티베트 문화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중국의 침공을 피해 온 티베트 망명 정부가 북부의 맥그로드 간즈(McLeod Ganj)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난민이 살고 있어 히말라야의 작은 티베트라 부른다. 동아시아 여행자에게는 티베트 식당만큼 반가운 곳이 없다. 인도 요리는 묽은 카레와 수프가 많고 재료가 잘아 씹는 맛이 적다. 헛헛한 식감에 고향 음식이 생각날 때면 그리움을 달래려 방문한다. 모모는 만두, 뚝바는 칼국수, 뗀뚝은 수제비를 닮았다. 국물 가득 큼직하게 썰은 건더기를 건져 먹으면 앓던 몸과 마음에 힘이 샘솟는다.


싱잉볼의 울림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뗀뚝의 국물은 마음을 위로한다.


 배가 뜨뜻하게 부르면 한낮의 더위를 피해 차양과 천막 아래를 산책한다. 낮잠을 자도 좋지만 전통옷과 공예품을 파는 시장과 특색 있는 인테리어로 꾸민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힘이 부치면 눈여겨본 카페의 그늘로 피한다. 원목으로 디자인한 실내는 은은한 파파야빛 조명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한다. 1층의 오른쪽 벽면에는 책이 빼곡하게 쌓여 있어 작은 서점 같다. 책장을 가득 채운 활자에서 지구를 발견한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등 세계 여느 나라말이 안부를 묻는다. 낡고 너덜너덜한 표지는 비닐로 감싸 보관하고 있다. 글을 좋아하고 아끼는 주인장의 정성이 느껴진다. 책자는 대부분 인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글로 쓴 책등에서 최신판이라는 문구가 보이지만 누렇게 변한 속지와 먼지 묻은 표지는 지긋한 나이를 드러낸다. 못해도 십 년은 되었을 게다. 펄벅의 <대지>와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꺼낸다. 우리말 이름을 곱씹다가 문득 어느 여행자가 남겨 둔 이 책들은 내가 떠나고 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겠구나 생각한다.


여행자가 놓고 간 책을 모아 자그마한 책방을 만들었다.


 태양의 강렬함이 한풀 꺾이면 해변으로 향한다. 바르깔라는 수심이 낮고 파도가 높아 서핑하기에 좋다. 무릎을 간질이는 물살을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큰코다친다. 성미가 고약한 너울은 포물선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머리 위로 단번에 쏟아진다. 대폭격이다. 해안과 가까워지면 물결이 여럿 합쳐져 하얀 거품 떼로 몰려온다. 물개급 바다수영 프로들은 파도가 내리치지 않는 곳까지 나가 관망한다. 갑작스레 쓰나미가 오면 잠수하거나 점프하여 충격을 최소화한다. 서핑 감각을 살려 물살을 타고 백사장 쪽으로 헤엄친다. 유연하고 빠르게 미끄러져야 물을 적게 먹는다. 힘으로 맞서면 냉수마찰당하기 십상이다. 이래저래 꾀를 내어도 바다는 막강하다. 가만히 서있기도 앉아있기도 힘들다. 새 파도가 올 때면 지난 파랑이 뒷걸음질친다. 쓸려가는 힘이 엄청나 딛고 있던 땅이 움푹 파이고 몸이 뒤로 쏠린다. 중심을 잡지 못해 다리가 휘청거린다. 달이 밀고 당긴다. 녹초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석양이 지면 바다에 백열전구가 빚어낸 별이 뜬다. 가운데 초를 밝히고 바다를 맛본다.


 태양이 수면 아래로 퐁당 잠긴다. 자주색 머리띠를 한 보랏빛 물결에 하얀 별이 총총 떠오른다. 낮에 자고 밤에 일터로 가는 어부는 흰 전구를 밝혀 어둠을 몰아낸다. 고기잡이 배가 수고로이 낚아 올린 바다는 저녁 식당 앞 가판대에 누워 있다. 해산물 모둠을 주문하는 게 간편하지만 저렴한 가격과 까다로운 취향을 동시에 만족하려면 흥정이 필수다. 넉살 좋은 아저씨는 수완이 뛰어나다. 한 손은 킹피시 꼬리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날을 좌우로 움직이며 눈치 싸움을 한다. 서로 다른 숫자가 대치하고 토막의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 한다. 창과 방패의 대결은 물고기 등에 합의를 상징하는 큰 칼집을 내며 끝난다. 사장님은 단숨에 비늘을 벗겨 붉은 속살만 남긴다. 작은 도막의 길이가 팔꿈치만 하다. 여기에 병어와 타이거 새우 여섯 마리, 1킬로에 달하는 게와 오징어를 추가한다. 재료를 정하면 원하는 조리법을 이야기한다. 셰프는 요청에 따라 굽기, 삶기, 찌기, 튀기기를 가리지 않고 능숙하게 요리한다. 거기다가 탄두리, 버터 갈릭, 칠리 등 좋아하는 양념을 얹으면 입맛에 찰떡같이 맞으면서도 이색적인 남인도식 식사를 할 수 있다. 잔잔히 흘러가는 바르깔라의 하루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바랄 바 없이 넉넉하다.


흥정에는 냅다 지르는 패기와 곰살맞은 애교의 기술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차에 내 자리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