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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Sep 04. 2023

빙하를 눈앞에서 - 그리넬 글래시어

글래시어 국립공원

급한 마음에 트렁크에 가방을 넣어 버렸고, 가방 안에는 자동차 열쇠가 들어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그것도 전화와 인터넷 신호가 잡히지 않는 미국 국립공원 내에서 말이다.

SOS전화를 해야 할까?

전화가 되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얼만 걸릴까?

이대로 오늘의 하이킹은 망한 걸까?


그때 차 한 대가 우리 근처에 주차하더니 백인 노부부가 내렸다.

등산 스틱을 트렁크에서 꺼내고 배낭을 둘러메는 걸 보니 우리처럼 그리넬 글래시어를 하이킹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이. 이 트레일 헤드는 공사한다고 호텔에 있는 트레일 헤드로 가라고 하네요."

"오, 감사해요."

"근데, 어. 뭐 좀 물어도 될까요?" 하고 우물쭈물거리자

"그럼요, 뭐든지요.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하고 노부부는 흔쾌히 대답했다.

"차 키를 차 안에 두고 내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오! 그랬군요. 저기 호텔에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일단 거기는 전화가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호텔까지 1마일을 걸었다.

호텔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국립공원 레인저에게 연락을 해줬다.

"레인저가 차 있는 곳으로 갈 거예요."

남편과 딸이 차로 가고 나와 아들은 호텔에 남았다. 어차피 트레일 헤드는 호텔 뒤편에 있으니까.


남편과 딸이 차까지 뛰어갔는데 레인저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 와서 뭔가가 이렇게 빨리 되는 건 처음이다. 레인저는 일단 차가 망가지거나 흠집이 나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종이에 서명을 받은 다음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운전석 문 틈으로 뭔가를 집어넣어서 공기로 부풀려 차문을 금세 땄다고 한다. 아! 차 도둑도 이렇게 차를 따려나?

차 문을 연 다음 면허증과 렌터카 계약서를 확인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당신 혼자 갔으면 진짜 의심스러웠을 텐데, 그나마 딸이 옐로 스톤 주니어 레인저 티셔츠에 모자에는 국립공원에서 받은 배치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조금은 덜 의심스러웠겠다?"

차를 가지고 돌아온 남편과 만나자 이렇게 농담할 기운도 났다.


시간은 벌써 2시 반이 넘었다.

여유 있게 쉬엄쉬엄 트레킹을 하려고 했는데, 다 물 건너갔다.


처음 1/3은 지겨운 길이 이어졌다. 호수를 끼고 걷는 산책길이었다.

그다음 1/3도 땡볕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호수와 빙하도 내리쬐는 해 때문에 희뿌였기만 했다.

숨이 찼지만 최대한 정상까지 빨리 가야 했다. 그랜드 테턴 에서처럼 하산할 때 곰을 만나지 않으려면.

나머지 1/3은 돌길이었다.


정상에 가까운 돌길에서 길을 만드느라 돌을 깨고 나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여자 셋과 남자 한 명. 우리 딸 만한 망치를 들고 돌을 나르고 있었다.

'여기까지나 저 망치를 들고 왔다고?' 생각이 들자 그 체력이 부러웠다.

일단 나는 체격이 작으니 아무리 운동을 해도 체격이서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나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서 힘이 센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아마 나는 헐떡이며 오르는 여기까지도 망치를 들고뛰어 왔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경사라 가파른지 스위치백 길이 나타났다.

그 길에는 빅혼쉽이 풀을 뜯다가 똥을 후두두둑 쏟아냈다.

우리는 지그재그로 걷는 길을 일직선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는 다시 산을 올랐다.


"이제 7분 남았어요."

어떤 친절한 사람은 곧 정상이 다가왔다고 힘내라고 인사를 건넸다.

비록 하산할 때 7분이고 산을 오르는 나는 인사에 힘입어 쉼 없이 걸었는데도 20분이 더 걸렸지만.


마지막 경사를 오르자 불투명한 에메랄드빛 호수가 멀찍이 보였다.

호수 뒤로는 아직도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었고 호수에는 얼음도 둥둥 떠다녔다.

거기서부터는 힘이 나서 뛰어갔다.


글래시어도 겨울에 막 눈이 왔을 때는 깨끗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봤을 때 에메랄드 색이었던 그리넬 글래시어 호수는 탁한 회색빛이 섞인 에메랄드 색이었고 죽은 곤충도 둥둥 떠다녔다. 글래시어에 오르면 또다시 몸을 담가보려고 했는데, 어쩐지 수영하는 사람이 안 보이더라니.


글래시어 국립공원은 셰일과 모래가 퇴적되어 지층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다.

빙하가 녹아내릴 때 셰일을 깎기 때문에 미세한 흙 알갱이들이 호수 안에 남아 있어서 호수가 불투명한 것이다.

그러니 글래시어 호수는 에메랄드 색 흙탕물 정도라 할까.

그래도 물이 산을 내려가면 자갈과 흙이 브리타 정수기의 필터처럼 흙을 어느 정도 걸려줘서 산 아래 물은 깨끗한 거였다.


빙하에 발을 담갔다. 정말 찼다.

아이들은 가까운 빙하에 올라타고 눈을 만지고 놀았다.


옆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가족사진도 번갈아 찍어주고 2030년 이후에도 여기가 녹지 않고 남아있길 소망했다.




이제 더 늦게 전에 산을 내려가야 했다.

무릎이 아팠지만 해가 넘어가기 전에 호텔에 도착해야 하니 꿋꿋이 걸었다.

아이들은 또 곰이 나올까 무서워 뛰어갔다.

아직도 몸살이 낫지 않아 좀 쉬어 가려니 아들이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조금 더 가벼운 아들 가방은 딸이 대신 들어줬다.


산을 내려가니 7시였다. 무릎, 앞허벅지, 발가락도 아팠다.

하지만 마지막 일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글래시어 국립공원에서 주니어레인저 배치를 받으려면 레인저 프로그램을 하나 참석해야 하는데 시작 시간이 7시 반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레인저 프로그램 장소인 메니 글래이시어 캠핑 사이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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