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rvis Oct 06. 2019

"광기는 마치 중력과 같아"

영화 <조커>의 약간의 비판적 리뷰

'조커'라는 캐릭터와 관련된 영화 중 처음으로 캐릭터의 기원을 그린 작품인 <조커>의 반응이 뜨겁다. 영화의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그리고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인 형태로 <다크나이트>시리즈 이후 DC 관련 영화 중 반응이 가장 뜨거운 듯하다. 그래서 기대를 많이 하고 극장을 갔다. 그럼에도 필자는 기대 이상으로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타락하는 주인공의 내면과 변화하는 감정, 상황 등에 깊이 몰입하고 때로는 공감하면서 보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직후 곧바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 냉정하게 영화를 다시 보니 왜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고 어떤 맥락에서 혹평을 하는 것인지 공감했고 인정할 수 있었다. 영화의 수준을 높이는 작품 내 수많은 상징들과 행동의 의미, 이유 등은 영화 분야에 능통한 많은 분들이 훌륭하게 분석하고 있고 필자도 보면서 감탄 중이다. 그러니 필자는 제목에 비판적 리뷰라고 쓰기는 했으나 비판이라기보다는 좀 다른 시각으로 <조커>를 이야기하고 싶다.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수많은 히어로 영화가 나왔지만 왜 우리는 아직 <다크나이트>를 잊지 못할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굉장히 큰 이유가 배트맨과 조커의 캐릭터성에서 기인한다. 그들의 관계는 여타 히어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과 악당처럼 단순하지 않다. 물리적인 힘은 좀 부족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강한 자신만의 신념으로 중무장했다. 그 신념의 충돌에는 영웅과 악당의 싸움을 넘어 선과 악, 질서와 혼돈 등 우리의 현실에서 논의되는 철학적인 개념이 대입될 수 있고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깊이 고찰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히어로물이라면 어쩔 수 없는 뻔한 권선징악과 현실과 동 떨어진 오락성의 한계를 넘어 현실적이고 철학적인 담론의 여지를 준다는 사실은 <다크나이트>를 차별화한다. 둘 다 아무런 초능력이 없다는 점도 현실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커'는 그 자체로 다른 악당들과 압도적으로  다르다. '조커'는 타노스처럼 누가 봐도 영화 속에서만 존재할 거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위에 있을 것 같은 '혼돈 그 자체'이다.              

그런데 <조커>는 <다크나이트>와는 달리 위에서 언급한 히어로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토리가 현실적이지 못하다. 스토리 자체의 개연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말하는 '비현실적'이라는 표현은 이를테면, 스티브 로저스가 혈청을 맞고 슈퍼 솔저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아서 플렉이 영화에 나오는 과정들을 통해 조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뜻이다. 즉, 굉장히 재미있는 '오락영화'이다. <조커>를 평할 때, "이 영화가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바가 어떻고, 영웅이 뭐고, 악당이 뭐고, 선악이 어떻고... 등등"과 같은 철학적이거나 사회적인 담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스토리가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중 아서에게 끊임없이 시련이 닥치고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에 혹은 현재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어도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필자도 영화를 몰입해서 보다 보니 그랬다. 그러나 이입한 나머지 아서의 행동들이 윤리적, 사회적 범주에서 통쾌하거나 정당하다는 생각까지 나아가는 건 무리수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을 가진 채 노모를 부양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한 청년이 직장 동료가 준 총 때문에 해고당하고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후 어머니가 항상 매일 쓰던 편지에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몰래 뜯어서 읽었더니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빠가 알고 보니 도시 최고의 부자인 토마스 웨인이었다! 웨인은 오래전 가정부로 일하던 자신의 어머니와 저지른 일을 은폐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과 어머니를 내다 버렸다...... 그런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망상장애 환자였고 그녀가 편지에 쓴 내용은 다 지어낸 것이고 아서 자신은 존재 모를 가정에서 태어나 학대받다가 입양되었다. 즉, 지금 그의 앞에 누워있는 사람은 친엄마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한 사실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관객들 사이에서 여러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감독이 열린 해석을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듯한데요. 저는 이런 내용인 줄 알고 영화를 보았는데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게 정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물론 사람마다 보기 나름이기에 필자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필자는 아무리 봐도 이 스토리가 현실적이고 실제로 일어남직하다는 말은 로또를 구매한 모든 사람들이 1등 번호를 맞출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똑같이 들린다. <조커>의 스토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막장드라마의 클리셰들을 다 합쳐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너무 자극적이고 극단적이다. 많이 양보해서 고담과 같은 사회는 현실에서 생길 수도 있다.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도시의 부패, 미쳐가는 사람들,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지배층이 현실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몰래카메라가 아니고서야 한 개인에게 저런 정도의 비극이 일어날 수는 없다. 개봉 전 한 인터뷰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은 코믹스에서 조커의 탄생 과정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버전의 '조커'를 만들고 싶다고 언급했다. 코믹스의 조커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보질 않아서 알 수 없지만 현실성을 따지며 만들어진 '조커'의 기원이 이렇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어리둥절하다. 진부하고 실망스럽다는 일부 해외 혹평들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글을 쓰고 보니 예상대로 너무 비판만 한 것처럼 보이는데 필자는 스토리에 불만이 없다. <조커>의 스토리가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실험이란 '조커'라는 절대 혼돈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실제 사회에서 '조커'가 탄생하려면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고통과 비극을 줘야 하는지 머릿속으로만 그려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이 영화가 실제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에 문제없이 몰입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가 그 모든 일들이 어쩌면 정말 아서의 상상일 뿐이라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레이를 살해한 아서가 경찰차 안에서 불타는 도시를 감상하던 중 큰 트럭이 경찰차를 들이받는다. 운전자는 즉사했고, 아서의 얼굴과 입 역시 피범벅이 된다. 그 후 전환된 장면에는 감옥이나 경찰서가 아니라 아캄 정신병원에 있는 아서가 나온다. 여기서 아서의 얼굴이 너무 깨끗한 게 좀 이상했다. 상담사가 뭐가 그리 웃기냐고 묻자 아서는 농담이 하나 생각났는데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답한다. 어쩌면 그 농담이 지금까지 영화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아닐까? 그 모든 게 누군가의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낱 정신질환 환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말도 안 되는 코미디였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커>는 스토리, 음악, 미장센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아동병원에 권총을 가져간 사실을 들켜서 직장에서 해고당한 아서는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척 봐도 껄렁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여자 한 명을 괴롭히는 상황을 목격한다. 여자가 아서 쪽으로 도망(?)오는 와중에 그의 웃음병이 터졌고, 세 남자의 시비가 아서에게 향한다. 아서는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다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세 남자를 스스로 살해한다. 이 사건은 아서가 조커로 각성하는 과정의 시작점으로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광인으로서의 조커'가 영화의 기본 전제인데 그 첫 번째 사건이 사회가 아닌 개인에 의해, 즉 자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아쉬웠다.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동의하는 경우에도 살인이 공식적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이 사건 이후에 아서가 저지르는 살인들은 조커가 각성하는 과정에서 대놓고 미친 짓을 한 것이기에 위 문장과는 다른 맥락이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고 있었던 순수 아서 플렉의 살인은 사정이 딱하긴 했지만 명백히 잘못되었고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기본 전제에 위배된다. 개인적으로 세 남자와 아서가 몸싸움을 하던 중 그 남자들이 총을 발견하여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총알이 발사되어 죽음을 당하는 시나리오가 더 적합해 보인다. 즉, 아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정황상 타의에 의해 억울하게 살인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만만한 아서 플렉을 살인자로 몰고 간 것이다. 꼭 이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타의에 의해 아서가 살인자가 되는 전개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런 전개라면 영화의 기본 전제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이후에 전개되는 스토리에도 방해되지 않는다. 영화의 스토리대로라면 자칫 관객이 저런 경우의 살인은 괜찮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좀 우려를 느꼈다.

이제 글의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조커>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개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고 절체절명의 시련이 계속해서 발생할 때, 그가 어느 정도의 나락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조커>의 최고 명장면은 많은 분들이 언급하는 계단씬이라고 생각한다. <조커>에 등장하는 많은 상징과 장면들 중 유일하게 사회적인 담론을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아서 플렉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올라간 계단을 조커는 신나고 빠른 속도로 춤까지 추며 내려온다. 이 장면은 아서 플렉이 나락으로 떨어지며 진정한 조커로 변화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속도는 한평생 그가 쌓아 올린 평범함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빠르다. 한 개인 혹은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광기, 혼돈은 마치 중력과 같다. 높이 쌓아 올린 탑일수록, 매우 정교한 기계일수록, 고도로 질서화된 사회일수록 아주 약간만 밀어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리고 높이나 정교함의 정도가 클수록 그것이 무너진 후의 결과는 훨씬 참혹해진다. <조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곳이 불타고 있는 고담처럼.


글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부정적이긴 하지만 필자는 정말 이 영화를 감탄하며 재미있게 본 사람이고 지금도 여러 리뷰와 해석을 보면서 영화를 즐기고 있다. 다만 영화를 본 후에 든 생각을 그냥 글로 표현해본 것이고, 훌륭한 예술영화라고 극찬받는 영화를 오락영화라고 본다는 관점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다. 영화에 대한 평가가 어찌 됐든 반드시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건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이다. 다른 게 다 별로라고 해도 그의 무시무시한 연기라는 딱 한 가지 요소만으로 이 영화는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너무 진지하고 깊이 평가하는 건 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Why so serious?

매거진의 이전글 VR 영화와 인터렉티브 컨텐츠의 등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