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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그 자체로 순수할 수 있을까?

- 순수한 감정이라는 환상

 ‘애증’이라는 감정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 때 ‘행복만을 보았다.’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에게 딸이 가졌던 복합적인 감정. 애증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어린 나이었지만, 그 감정이 주는 특별한 인상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애증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을 보고, 읽고, 좋아했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양가적인 감정. 보통은 사랑하면 사랑만 하고, 증오하면 증오하기만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그러한 보편성을 깨는 예외성, 희귀성이 있다 보니 애증 코드가 있는 작품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작품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면서도 증오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상대가 미워도, 늘 사랑은 증오를 이기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일상과 새로운 사람을 겪으면서 각양각색의 감정들을 만났다. 질투 섞인 우정, 선망 섞인 열등감, 죄책감 섞인 싫음 등 딱 잘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좋기만 하고, 싫기만 한 감정들이 실존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사랑은 사랑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 미움은 미움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이 정의해놓은 감정들은 사실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부분으로써 전체에 기여하고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A가 B에게 갖는 감정은 미움이 15%, 질투가 20%, 선망이 50%, 애정이 15% 섞여 만들어진 감정으로, 그 어떤 다른 감정과도 동일하지 않은 고유한 무언가가 되는 방식.


 내가 감정을 조각조각 내어놓은 방식 또한 명확하거나 정답일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핵심은 어떤 감정이든 순도 100% 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그렇듯, 남들도 나에게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늘 순수한 감정을 원하는 듯하다. 적어도 긍정과 부정은 확실히 나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사랑할 때는 사랑하기만을 바란다. 친구 사이에는 순수한 우정만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미루어보아, 애초에 순수한 감정이란 환상일지도 모른다. 단편적인 예시로,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하기만 할까? 그 마음속에는 대리만족이 있을지도 모르고, 질투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그 축하하는 마음이 순수하기를 바라고, 순수하리라 믿는다. 즉 순수할 거라는 믿음은 있어도, 순수성이 실존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너무도 당연한 답변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복잡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합적인 감정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갖가지 생각들이 그 관계만의 특수함을 만들어 당사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더 많이 생각할수록 감정은 다양해지고, 감정이 다양해질수록 생각은 풍부해진다. 그걸로 감정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에 대한 (넓은 의미의) 애정은 이미 증명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그 복잡함이 자신에게 어떠한 갈등 요인이 되더라도 괜찮다. 애증의 주인공들이 증오 대신 사랑을 택했듯, 그 감정 속에서 자신에게 진정 의미 있는 감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애증이라는 감정의 존재 자체만으로 큰 인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이 고뇌하고, 갈등하고, 그럼에도 내렸던 선택들이 감동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어쩌면 순수한 감정을 선망했던 자신을 향하는 독백이다. 순수함은 실존하지 않으니 그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비순수성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인간이기에 당연한 감정들을 받아들이라고. 복잡함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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