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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타포드식 세계관의 획득과 발견의 문제에 대하여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자유의지는 미래의 존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미래’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 따라서 경험 주체인 인간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헵타포드에게 있어 ‘미래’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들 그것은 인류가 가진 미래의 개념과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예정되어 있는 일’, 그러나 아직 체험되지 않은 일. 인류는 경험과 앎이 어떻게 보면 일치하는 종인 반면, 헵타포드는 불일치하는 종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모두 동시적이다.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는 동시적이지 않지만, 인류가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앎’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러하다. 헵타포드는 경험과 앎이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미래를 경험하지 않아도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인류인 ‘나’가 헵타포드의 언어를 학습하게 된 이후, 헵타포드 식의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즉 언어가 곧 사고를 형성한다는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경우는 그 반대의 순서로, 언어 체계가 발전한 것은 동시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킨 이후였다. 주인공이 헵타포드의 문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헵타포드들이 왜 ‘헵타포드 B’ 같은 의미표시 문자 체계를 발달시켰는지 이해가 됐다”며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가진 종에게는 그쪽이 더 편리했다.”(215쪽)고 설명한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순서가 뒤바뀐다고 해서 모순인 것은 아니다. 언어와 사고는 물론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사고방식이 언어를 형성하기도 하며, 언어가 사고방식을 체계화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내재화하게 된 것은 한국인이 한국어로 생각하다가 영어를 배운 후, 속마음을 영어로 이야기하게 된 경우와도 같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다른 언어를 학습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사고의 방식이 뒤바뀔 수 있는가?


그들의 사고방식을 언어라는 형식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기존의 방식 대신 새로운 사고방식을 ‘내면화’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해하지 않아도 오랜 기간의 타지 생활이 그 문화권의 생활방식을 내면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함에 따라, 그들의 문화권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을 동시적으로 내면화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헵타포드 B’의 습득을 통해 동시적 의식 양태를 경험하게 된 나”(215쪽)는 어느 순간부터 “미래를 아는”(218) ‘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소 갑작스런 변화가 이 소설의 SF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물론 언어의 대한 학습이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언어의 내면화는 높은 수준의 ‘사용’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것이 소설에서처럼 빠르게 발생하는 일은 어렵다. 심지어 주인공은 몇십 년을 선형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고 살아온 ‘인류’가 아닌가. 이미 내면화된 사고방식을 헵타포드식 사고방식이 압도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영어권에 오래 살지 않는 이상 우리가 영어를 사용하더라도 속마음으로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래를 알게 된다는’ 초인류적인 설정을 제외하면, 인류에게도 헵타포드식 세계관이 아주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으며, 우리는 그 정해진 과정을 그저 따를 뿐이라는 태도는 운명론, 결정론적인 인생관에 해당한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대립은 꽤나 유구한 역사인 것으로 보이지만, 현상적으로 따지자면 그 둘의 활용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지는 법적 책임이나 신학에서의 도덕을 주장할 때 사용되었던 반면, 결정론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신분 제도와 같은 것에 간접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지 역시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겠지만, 인류가 당위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 가운데 ‘자유’가 대두되기 시작한 근대 이래에는 결정론보다는 자유의지론이 조금 더 대중적으로 수용되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에는 결정론이 서민들로 하여금 체제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면, 현대에는 자유의지론이 구조를 지탱하는 데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러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자유와 선택, 의지의 존재를 믿고, 그 믿음은 노력과 노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나아가 이러한 믿음들이 인생에서 우리가 정말 불행히 맞닥뜨리게 된 여러 일들에 대해 깊은 좌절을 자아내는 일에 연루되어 있다고도 생각한다. 비극에 그저 슬퍼하는 일과, 막을 수 있었던 일에 깊이 좌절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이 둘 모두를 애도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후자를 더 중시하기도 한다. 이 점을 통해 그들이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앞으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나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재를 자연적인 재해로 규정해버리면, 책임과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없어지므로. 따라서 나는 작금의 현실에서 문제시되는 애도의 문제가, 자유의지 담론과 꽤나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얼마나 큰 자만인가? 이 작품 속 주인공의 선택을 두고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주인공이 자신의 선택의 힘보다, 자신과 딸, 주변 인간들, 나아가 인류 모두를 둘러싼 어떠한 거대한 힘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의 선택이 의아하거나 혹은 분석 대상으로 여겨지는 까닭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손수 가꾸고 바꿔나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은 아닐까? 주인공의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은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사실 우리의 삶이 오로지 자유의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감히 단정지을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나는 자유의지와 우리를 둘러싼 어떠한 운명의 힘 간의 보이지 않는 씨름이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한 개인을 초과하는 거대한 힘의 존재를 인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권역이 아닌 일들에 대해 지나치게 자책하게 되고, 우리의 불행을 품에서 놓아주지 못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인류의 눈으로 본 헵타포드의 사고방식은 인류의 한계로 인해 이해되지 못할 무언가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단지 우리의 선택과 자유의지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거대한 바다 위의 돛단배와 같다. 최선을 다해 움직이려 하지만, 바다는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 그러한 진실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하나의 실망 거리이자, 하나의 희망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완벽한 선장일 수 없음이 생물체로서 지니는 당연한 한계라면, 우리는 어쩌면 더욱 기꺼이 이 삶을 수용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완벽한 삶이 아니더라도 살아가고 싶은 하나의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펼쳐보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책처럼.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과제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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