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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포스트휴먼의 환상성 (1)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부제  : 알랭 바디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해석하기



1. 들어가며


김초엽은 일명 ‘테크노페미니즘적 경향’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다. 테크노페미니즘 문학은 ‘테크놀로지’ 중심으로 포스트휴먼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페미니즘’ 중심으로 여성중심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문학이다.(김미현,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여성과 테크노페미니즘 —윤이형과 김초엽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49권, 한국여성문학학회, 2020, 13쪽) 김초엽의 작품관에서 드러나는 포스트휴먼과 젠더의 결합은 김초엽뿐만 아니라 2016년 이후 한국 SF의 경향성이자 개별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사회적 담론 형성과 긴밀히 연관된다. 미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SF의 장르는 페미니즘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해 왔는데, 1970년대 페미니즘 제2차 물결과 함께 발전한 미국의 ‘페미니즘 유토피아’ 작품들은 당대의 젠더 불평등으로부터 발생하던 결핍이 장르 특유의 사고실험을 통해 형상화된 결과물이었다.(이지용, 「한국 SF의 장르적 개별성과 현대적 주제 의식」, 『한국연구』, 8권, 한국연구원, 2021, 51-52쪽) 이와 비슷하게 한국의 경우도 SF가 가진 사고실험적 특성들이 기존의 인식과 규범을 전복하는 것과 호응될 수 있음을 인지한 작가들의 적극적 SF 활용이 ‘페미니즘 SF’라는 경향성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경우 김초엽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지는 유토피아 세계관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시대상에 비추어 생각했을 때, 요즘 사회에서 표상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작품 분석의 문제의식이 출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유토피아가 실패하고, 또 유토피아 세계관을 다룬 많은 문학 작품이 그 디스토피아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현대 사회는 유토피아의 실존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근 한국 사회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음을 설명하는 징조가 보인다. ‘무해함’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채로 표상되는 무형의 가치가 마치 가장 이상적인 속성인 것처럼 호명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유토피아를 어떠한 사회 체제나 국가적인 형태로 상상하지 않고, 인간을 비롯한 개별적 개체나 그들 간의 관계에 귀속되는 어떠한 성격 내지는 속성으로 규정하는 듯하다. 


따라서 이 작품을 논의할 주요 논지는 ‘무해함의 유토피아’에 관한 것이 되겠지만, 그것이 결코 앞서 설명한 ‘페미니즘 SF’적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최근 사회적으로 두드러지는 ‘무해’라는 어휘의 범용이 ‘무해한 남성성’의 출현을 기원으로 두기 때문이다. 특정 물질의 유해성을 따지던 ‘무해하다’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나타내는 상황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대중문화 속에 등장한 남성 캐릭터들의 특징을 ‘무해하다’라고 설명하기 시작하면서였다.(“‘무해’한 남성들이 전하는 경고”, 한겨레, 2018년 5월 5일 입력, 2022년 11월 4일 접속, https://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843400.html) 비평가들은 이에 대해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가득 찬 현실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 남성상에 주목하도록 했다고 분석했다.(백승주, 「무해함의 발명」, 『릿터』, 38권, 민음사, 2022, 12쪽) 다시 말해 무해함이 남성 캐릭터에게 요구되는 미덕으로 등장한 것은 여성들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기존의 ‘남성성’이라고 수용된 성질들, 소위 ‘남자답다’고 표현되던 행동이나 성격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폭력은 반드시 유해한 남성성으로부터만 기원하지 않는다. 폭력의 편재성을 발견하고 무해함의 필요성에 공감한 이들이 이제는 무해함을 남성에게 요구되는 미덕으로 한정짓지 않고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지만, ‘무해함’의 유토피아가 최초로 발명된 것이 페미니즘 리부트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페미니즘 SF’의 계보를 잇는 김초엽의 작품을 페미니즘적인 유토피아로 등장한 ‘무해함’에 대한 비판적 서사로 읽는 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어 준다. 즉 무해함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무해함’의 요구가 페미니즘 진영을 넘어 범사회적인데도 불구하고 왜 다른 유토피아 세계관의 소설이 아니라 페미니즘 SF 작가의 작품을 통해 분석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다만 페미니즘적 요구가 무해함을 만들어내기는 했어도 페미니즘의 이상이 무해한 유토피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번 논의는 젠더나 페미니즘 서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무해함’의 유토피아가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무해함’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외연을 갖게 되었는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무해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면면히 밝히는 것에 주목적을 둔다. 


마거릿 애트우트는 일찌감치, “완벽해진 인간의 신체(그리고 정신도)라는 유토피아적 상상을 해본다면, 그 이면에 숨겨져 있을 자그마한 디스토피아는 무엇일까?”(마거릿 애트우드, 양미래 옮김, 『나는 왜 SF를 쓰는가』, 민음사, 2021. 157쪽)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오릭스와 크레이크』라는 작품에서 흥미로운 지점으로 “유토피아를 촉진하는 요소가 어떤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이라든가 집단적인 세뇌나 영혼 조작을 가능케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신체 속에 주입되어 있다는 점”을 들며, 작품 속 신인류가 품행이 올바른 이유를 두고 “법률 제도나 정부 혹은 어떤 위협 때문이 아니고 본디 그런 존재여서다.”라고 설명한다.(마거릿 애트우드, 같은 책, 156쪽) 김초엽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역시, 제도적으로 유토피아인 세계관이 아니라 ‘유토피아에 매우 적합한 신체’들로 구성된 인류, 즉 ‘무해한 포스트휴먼’을 등장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마거릿 애트우드가 지적하듯 이러한 유토피아에도 반드시 ‘디스토피아적 요소’는 존재한다. 그것이 현 한국 사회가 보이는 징후적 조짐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밝히는 것 역시 이 논의의 목적 중 하나이다. 


정리하자면, 현재 한국 사회에 은연하게, 그리고 만연하게 퍼져 있는 ‘무해함’에 대한 욕망은 지금껏 많은 이론가와 문학가들에 의해 부정당해 왔던 ‘유토피아’ 실현에 대한 욕망과 닮아있다. 그러나 ‘무해함’이 지금까지 존재 혹은 부정당해 온 유토피아들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해함’이라는 욕망의 주체와, 그러한 욕망이 투영되는 ‘대상’이 뚜렷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해함은 그 자체로 성립하지 못한다. 무해한 ‘남자’ 혹은 ‘자기 자신’ 혹은 ‘관계’ 나아가 ‘세상’ 등,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에 무해한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무해함’의 유토피아는 성립한다. 이를 논증하고 비판하는 과정이 다음 본론에서 전개될 것이며, 이때 활용되는 이론은 ‘진리’와 ‘사랑’, ‘타자’의 윤리를 정립한 이론가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알랭 바디우, 이종영 옮김, 『윤리학: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2001.),『행복의 형이상학』(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사랑 예찬』(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등이 될 것이다. 그 밖에 앞서 언급한 마거릿 애티우드와 최근 문학잡지 ‘릿터’를 통해 무해함에 관한 논의를 펼친 백승주, 박한선, 허윤 등의 비평가들의 인용을 통해 ‘무해한 포스트휴먼’의 존재 가능성과 그 환상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중간과제 소논문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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