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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포스트휴먼의 환상성 (6)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부제  : 알랭 바디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해석하기



6. 나가며


알랭 바디우는 “윤리적 ‘합의’가 악에 대한 식별에 기초한다면, 선의 정립적 관념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려는 모든 시도는, 게다가 더욱이 인간을 그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악 그 자체의 진정한 원천”이라는, 즉 “‘유토피아’적 성격을 갖는 모든 혁명의 계획은 전체주의적 악몽으로 변해 버린다”는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궤변’이라고 선언한다.(알랭 바디우, 이종영 옮김, 『윤리학: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2001. 21-22쪽) 그는 인간이 선을 설정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일은 인간에게 인간성 자체를 금지시키는 일이라며 회의주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릴리가 만든 유토피아의 환상성을 지적하는 일은,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게으른 사고를 경계하고, 더 풍부하고 개방적으로 상상하자는 적극적인 권유다. 이를 무해함의 논의에 대입하자면 ‘어떤 텍스트의 무해함을 따지는 일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지, 누군가에게 폭력적이지 않은지 등을 다 함께 논의하고 고민’하자는 것이다. 


무해함의 유토피아는 유해함에 대한 깊은 사유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결벽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생산된 것이다. 릴리는 자기 분신들이 자신이 겪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들을 지구로부터 멀리 분리했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타인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시작해, 나아가서는 관계의 독성 자체를 두려워함(백승주, 「무해함의 발명」, 『릿터』, 38권, 민음사, 2022, 13쪽)으로써 무해한 관계망, 무해한 자아를 추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내가 피해를 받을지언정 다른 이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백승주, 같은 글, 12쪽)이 되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무해함이 자기 자신에게만 요구되는 미덕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누군가의 사례를 보면 무해함은 분명 외부적으로도 요구되는, 사회적인 미덕으로 통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해함은 대상에게 투영될 뿐만 아니라, 투영되는 과정에서 그 대상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대상은 유토피아의 출입 허가증을 얻지 못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유토피아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을 굉장히 완곡하게 비판한 작품이다. 작품 속 유토피아에 해당하는 ‘마을’에는 사랑에 빠지는 주체들이 부재한다. 그러한 마을을 창조한 주체는 ‘릴리’이며, 그는 자기만족과 주체의 실현을 위해 유토피아를 만들었다. 그 마을에는 기존의 인류와 다른 종자인 ‘무해한 포스트휴먼’들이 살지만, 성인이 된 포스트휴먼들은 오히려 기존의 인류가 가진 가치를 찾아 지구로 회귀한다. 최초의 탈경계 주체인 ‘올리브’로 대표되는 그들은 릴리의 무해한 욕망이 투영된 대상에서, 스스로 사랑과 행복을 찾아 ‘변화’를 꾀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주체로 변모한다. 반면에 릴리는 변화의 주체에서 무해함의 객체로 전락한다. 그는 스스로 행복의 종점을 설정하고 그곳에 안주했으며, 무해함이라는 환상성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과거 이력을 삭제한 채 마을에서 신화로 남았다. 그 신화는, 그 마을을 유토피아로 지속시키는 일종의 헤게모니로 기능했으나 올리브나 데이지와 같은 마을의 거주민들은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외부 세계의 정체를 밝혀냈다. 


이 작품은 무해함의 환상성을 지적하는 역할을 하는 한편, 유토피아로부터 벗어나 감히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의 의의를 설득하는데,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 속 사랑이 주어지는 양상이 자연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도 있겠지만, 사랑이 한편으로는 서로 간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나 그만큼의 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렬한 감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까지 작품 내에 드러나 있지는 않다. 올리브와 델피는 여느 멜로드라마 주인공들처럼 굉장히 자연스럽고 낭만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지만, 소설에서 생략된 그들의 삶에는 그만큼의 갈등과 고난, 화해와 이해의 과정이 변증법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 갈등이란 차별과 배제를 향한 투쟁뿐만이 아니라 둘 사이의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을 지속하는 과정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보다도 훨씬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마치 사랑이 올리브가 유토피아를 탈출한 단순한 보상처럼 제시된다는 점에서 사랑에 대한 진정한 면면들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 논의는 무해함의 유토피아가 갖는 디스토피아적 속성을 규명하는 목적을 가졌고, 그 대안으로써 사랑을 제시하였다. 작품 속 사랑의 단편적 묘사가 아쉬운 이유는, 사랑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근거가 바로 올리브의 선택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해함’의 키워드 등장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인은 이미 관계를 ‘유독한’ 것으로 규정했다는 사실, 그리고 기존의 관계를 손쉽게 끊어내는 것을 넘어 앞으로의 관계 가능성을 자진해서 차단할 조짐, 내지는 이미 현재 진행 중인 현상이다. 무해함의 미덕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지적하고 알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무해함 대신 사랑을 선택할 만큼의 동력을 제공할 것인가 하는 의문은 미결의 상태로 남는다. 앞서 말했듯 사랑은 강렬한 충동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많은 노력과 이해, 충돌을 반복하고도 멈추지 않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피로도를 얻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무해함’의 이데올로기에 지쳐 ‘무해함’이 더 이상 미덕으로 호명되지 않는 시대가 오더라도,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사랑과 관계를 구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 것인가. 그것은 ‘무해한 포스트휴먼’ 대신 추구해야 할 미래 인류의 방향성을 묻는 다음 질문이 될 것이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중간과제 소논문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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