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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미워했나.

- 미움은 애정으로부터 태어난다.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만나 지금껏 오래 교류하는 선배가 한 명 있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사색도 많이 하는 사람이다. 하고 있는 고민이나 생각이 공통될 때가 많아 우리 사이에는 늘 대화거리가 많다. 다만 공통점이 많은 반면에 명료한 차이점도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는 주로 낙관적이라는 것이고 선배는 주로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생각의 성질을 그렇게 양극단으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스펙트럼 상에서는 주로 그러했다. 선배는 나보다 주로 비관적인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얼마 전, 선배와 만나 또 여느 때처럼 세상에 대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했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나는 비록 문제가 많을지라도 낙관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선배는 나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예전부터 늘 그래 왔듯 나의 낙관적 태도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런 선배라도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 낙관적인 구석이 많았는데, 선배의 인생에서 힘든 굴곡점을 지나고 나자 비관적인 성향을 많이 띠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던 그날은 선배의 얘기를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가 세상에 보이는 비관성은 오히려 세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대상이 세상이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싫어하던 사람이 대표적으로 2명이 있었는데,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었다. 나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졸업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어쩌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늘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그렇게 지독하게 싫어하는 감정은 단지 ‘싫음’으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을 미워했던 것 같다. 아니, 미워했다.


 왜 그렇게까지 미워했을까. 살다 보면 싫은 감정이 드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지만 나는 지금껏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곤 특별히 싫은 사람에 대해 헤집어가면서까지 얘기한 적은 없었다. 나와의 관련성을 크게 느끼지도 않았고, 싫은 감정은 한순간일 뿐 지속되지도 않았다. 우리 엄마는 내게 “너는 참 뒤끝이 없어.”라고 얘기하곤 했다. 엄마 말대로 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뒤끝이 없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그 두 사람은 내게 참 특별한 경우인 것이었다. 뒤끝이 길다 못해 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때는 그 두 사람이 그 정도로 별로인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그들 탓을 했고 뭐 여전히 어느 정도는 그들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 감정이 조금 옅어진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그들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나와 사이가 좋았다는 것이다. 많이 의지하기도 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건이 우리 사이에 발생했고, 나는 엄청난 배신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이 정말 의외의 것이었냐 묻는다면, 또 그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 그 정도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자잘한 전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감정 변화의 결정적 기점이 된 까닭은, 내가 그 전조들을 애써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관계를 망치기 싫었던 탓도 크지만, 무엇보다 내 눈이 틀리지 않길 바랐다. 그 사람들의 장점을 보고 좋아했던 내 감정을 부정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막상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고 나니 내가 그 관계에 투자해왔던 정성이 아까웠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던 게 억울했다. 보답받지 못한 마음이 허무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마치 사람 볼 줄 모르는 나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을 탓함으로써 나의 잘못을 덮고 싶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을지라도, 그 미움의 핵에는 자신에 대한 나무람이 분명히 있었다. 왜 미리 방어하지 못했냐고. 왜 그들이 나에게 상처 줄 여지를 만들었냐고.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내가 성숙하게 대처했더라면, 이 정도까지 상처 받지는 않을 수 있지 않았냐고. 그렇게 자신에게 따지는 말을 계속해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니 그 기나긴 뒤끝은 사실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었다. 깊은 미움은 양날의 검이 되어 계속해서 나 자신의 마음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세상을 애정했기에 세상에 비관적이게 된 선배처럼, 나도 그들을 좋아했기에 그들을 미워했다. 애정이 미움으로 바뀌면서 그 애정을 품었던 자신마저 공격하게 되었다. 그 논리를 이해하게 된 덕분인지 지금은 그들에 대해 예전만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그런 자신이 싫어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 짓을 반복하지 않는다. 엄청난 깨달음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되었으니까. 시간이 그 기억과 감정을 흐릿하게 만들어준 덕일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예전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남들에게 상처 안 주고 잘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까지 가끔 든다(그렇지만 나보다는 잘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 자신을 향한 나무람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난 기분이다. 어렸으니, 보는 눈 정도는 없을 수 있었지. 그리고 어찌 됐건 상처를 준 건 그들이지. 이러한 여유 있는 멘트들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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