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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치 Mar 01. 2022

오빠, 나는 네가 싫어

남매의 숙명



 오늘은 넷플릭스 외화시리즈 중 하나인 <다운튼 애비, downton abbey> 이야기로 포문을 열어볼까 한다.


 산업혁명기의 영국 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한 이 드라마에는 세자매가 나온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신만만한 첫째 메리, 착하고 질투심 많은 둘째 이디스, 도전적이고 모험심 강한 막내 시빌이 그들이다.


<다운튼 애비>, downton abbey, 메리 크로울리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초반은, 숙녀가 온실 속 화초처럼 얌전하게 자란 것을 평판의 기준으로 삼던 때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여장부 메리는 남편의 악세사리로 살고싶지 않다. 내 결혼은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하겠다며 버티던 메리는 정해진 혼처를 두고도, 성으로 놀러온 매력적인 터키 대사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이 이렇게 위험한 것이었던가. 몰랐다. 한밤중 메리의 방으로 침입한 그 남자가 바로 내 침대위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당시에는 추문을 겪느니 자살을 선택할만큼 여성의 평판이 중요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메리의 방에서 대사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치명적이다. 메리는 엄마와 하녀장의 도움으로 남몰래 시신을 옮기는데 성공하지만, 그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목격자가 있었을 줄은.




<downton abbey, 다운튼 애비> 이디스 크로울리



 한편, 이디스는 첫째만큼 주변의 관심과 기대를 받지도, 막내만큼 사랑과 관용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자란 비운의 둘째다. 언니에게만 집중되는 남자들의 구혼을 풀죽어 지켜보는 것도 서러운데, 메리는 그런 이디스를 비웃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독선적인 언니에 대한 이 불타는 질투심이 결국 사고를 친다. 터키 대사가 죽은 밤의 진실을 알게된 이디스가 언니의 평판을 망가뜨리기 위해 대사관에 편지를 보낸 것. 이야기는 가벼운 입들을 통해 런던 전역으로 퍼지게 되고, 메리는 좌절한다.


 이디스는 그 모습이 꽤나 꼬숩다. 언니가 온 세상 남자를 다 쥐고 흔들던 시대는 갔다. 그러나 대사의 죽음이 그랬듯, 언니를 수렁에 처넣은 동생의 만행도 영원히 비밀일 순 없다. 메리는 분노한다. 그리고 참지 않는다.




 


닭 쫓던 개가 된 이디스.


 둘째에게도 기회가 왔다. 메리가 차버린 귀족 남성이, 드디어 이디스에게로 마음을 돌린 것. 언니가 뜯다버린 고기면 어때, 일단 결혼은 하고 봐야지. 그러나 달콤한 청혼이 예정되어있던 바로 그날, 메리의 복수가 점화의 불꽃을 올린다.


 예비 매부를 이간질해 청혼을 포기하게 만드는 메리. 이디스는 다시 닭 쫓던 개가 되었다. 이로써 언니와 동생은 서로를 진창에 빠뜨리는 것으로 공평하게 한 방씩 주고받은 셈이다. 둘의 화해는 영 불가능한걸까.




 여느때처럼 남의 집 자매싸움을 구경하던 어느 저녁, 문득 어떤 일화가 떠올랐다. 원하는 걸 너무도 쉽게 갖는 오빠의 그늘에서 초라함을 견뎌야 했던 유년시절의 경험이다.


 나와 오빠는 두 살 터울이다. 나이차는 둘째치고 성별에서 오는 기본적인 체급 차,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집안 분위기, 장자의 특권의식, 아빠의 부재, 온갖 우성인자는 다 빼간 우월한 미모 등 오빠가 나를 밟고 설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내 나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을거다. 오빠는 저학년이었겠고. 우리는 여고 근처에 있던 입시전문 미술학원에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좀 그래, 예닐곱 먹은 어린애를  까마득한 언니들이나 다니는 입시미술학원에 보내느냐고.


 우리의 미술수업이란 화실의 넓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8절 스케치북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었다. 거기서 어린이 용치가 그려내는 것은 잘봐줘야 색깔입힌 낙서지, 사실상 오빠의 그림을 곁눈질해 베껴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간 기억의 왜곡은 있을 수 있겠으나, 혼혈애처럼 예쁜데다 똘똘하고 운동도 잘했던 오빠는 그림까지 잘그렸다(*새끼 짜증나) 입시반 여고생들은 이 귀여운 소년에게 흠뻑 빠졌다.



"아, 고양이 좀 봐! 너무 귀여워!"

"진짜 잘 그린다, 너무 잘한다!"



 오빠를 향한 칭찬일색은 평범한 소녀를 잔뜩 위축시켰다. 나는 그 철저한 관심의 불균형에 서러워 울고싶어졌다. 그때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본 자애로운 여고생 하나가 '너도 잘그렸어. 어머 잘한다~~' 하는식의 억지 칭찬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 칭찬이 동정인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관대한 여고생의 위로가 사실인지아닌지, 그로인해 느꼈던 모멸감이 실재했는지 여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여고생의 존재 자체가 내 상상의 산물이지 싶다. 없는 여고생을 만들어내서라도 상처받은 자아를 보호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물에 빠진 내게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어, 이미 난도질 된 마음이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져 헤어나올 수 없도록 만들고 싶은 가학적 욕망을 느꼈을 수도 있다.


 울고싶었던 이유는 단지 오빠가 잘나서는 아니었다. 내가 못나서였다. 이 어마어마한 격차를 극복하고 저 사랑을 쟁취해 올 능력이 내게 없음을 이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그린 그 고양이는 내 눈에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차라리 그 스케치북을 박박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어린 용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이 질투의 부도덕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 한편, 오빠의 죄 없음이 참을 수 없이 미웠을거다.


 아이의 표현할 수 없는 분노는 눈물로 흘렀다. 벌써 30년 가까운 과거인데도, 여전히 그때의 분노가 생생하다. 물론 지금도 오빠는 여전히 잘났다.

 그러니까, 신은 못됐다. 엄빠도 못됐다. (시발)





메인이미지 출처: https://m.blog.naver.com/easy1831/222147379529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킷은 용치의 상처받은 자아를 응원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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