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하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 저녁노을이 너무 근사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신발을 신고 나선다. 요즘은 늦어도 저녁 7시 30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그래야지만 간신히 해질녘 붉어지는 설악 능선을 볼 수 있다. 일몰은 서해라고 하지만 속초의 일몰도 볼만하다. 운동화를 신고 나서는 저녁 산책길,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인지 바다에서 떠밀려온 바람인지 분간할 순 없지만 하루를 녹이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청초호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지고 있다. 노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도 있고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도 있고 벤치에 앉아 그 풍경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 표정은 여유가 넘친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속초 사람으로 운동하러 나온 것이고 연인이나 가족끼리 온 사람들은 주로 관광객이다. 어떨 때는 유튜버들이 청초호를 배경으로 라방을 하기도 한다. 청초호 근처 대단위 생숙(생활형 숙박시설)이 생기면서 청초호에 관광객이 많아졌다. 주말에는 점점 사람에 치이는 곳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전경이 있기에 날씨 맑은 날에는 꼭 저녁 산책을 나가곤 한다.
걷다 보면 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부부가 함께 산책하러 나왔는데 보기 좋다. 우리 부부는 언제 저렇게 산책할 수 있을까? 나이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그때 마지못해 남편이 따라나설까. 주말엔 좀 같이 걸어보자고 다정하게 말해봐야겠다.
평소 걷는 곳은 청초호를 따라 쭉 걷다가 근사한 회전목마가 있는 카페 메리고라운드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한다. 최근 메리코라운드 옆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거의 완공됐는데 커피숍 같기도 하다. 솔직히 청초호와 같은 자연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하는데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건물들 속에 점점 숨 쉴 곳이 없어지고 웅장한 설악과 울산바위가 회색빛 건물 숲에 가려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후죽순 건물들에 가려지는 청초호지만 호수는 말없이 오늘도 우리 모두를 품어준다. 사람도, 새들도, 물도, 바람도, 저녁노을도, 저 커다란 설악산도 있는 그대로 품어준다. 우리의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외로움도, 심지어 절망도. 그래서 오늘도 잘 살아가라고 다독여준다.
날마다 숲과 바다를 거닐며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담아낸 메리 올리버는 <완벽한 날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최소량의 날씨를 선호한다. 아주 조금이면 된다. 최고의 날씨는 날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워즈워스처럼 바다보다는 호수가, 흰 눈 덮인 험한 산봉우리보다는 완만한 초록의 산이 좋다. 역사를 만드는 격렬한 활동보다는 사색에 잠기고 작품도 구상할 수 있는 길고 쉬운 산책이 좋다. "
나 또한 걸을 수 있는 최소한의 날씨만 허락한다면 계속 걸을 것이다. 그곳은 험한 곳이 아니라 어디든 통하는 길이고 천천히 자연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면 좋다. 집과 가깝고 외지지 않은 곳이고 멀리 산도 보이고 출렁이는 물이 있고 새도 있으며 철마다 꽃이 피어나고 달마다 새로운 바람을 만나는 청초호가 좋다. 청초호 둘레를 따라 걸으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걸으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주로 아무 생각 없이 걷기에 집중하며 매일매일 다른 표정으로 다가오는 호수를 스치듯 바라본다.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사계절 언제나 걸을 수 있는 길이라 더 애정한다.
게다가 요즘 만나는 노을은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감사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호수는 산과 구름과 건물들까지 품으며 일몰 장관을 만들어낸다. 노을은 산에도 있지만 여기 호수에도 있다. 천천히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며 이 순간 세상만사 잠시 접어두게 된다. 이래서 속초에 살맛 난다. 아니 이래서 오늘도 걸을 맛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