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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헤이 Dec 19. 2023

통밀 포카치아

발효가 만드는 시큰 구수한 통밀의 향.

가족들과 살던 추억이 그렇게 진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혼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누군가 함께 사는 집 안의 백색소음으로 따뜻함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주말에 평소보다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고 있는 소리가들린다던가, TV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들린다던가, 아님 조근조근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하는.


물론 매번 연휴 때 방문하는 우리 외가는 기본적으로 구성원 모두가 소리통이 크고 지르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조근조근 대화를 하는 것을 본 역사가 없고 이제는 연휴나 명절 때도 할머니댁에서 자고 오는 일이 거의 없으니 이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건 슬프지만 나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이맘때, 밖에는 칼바람이 휑휑 불어대고 1층 놀이터에 어린아이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낙엽만 토네이도처럼 나뒹구는 이 계절.

주말 아침 집에서 풍기는 따스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은 이때, 빵 굽기를 시도해 보았다.

따뜻함 그까짓 거 내가 만들면 되지.




사실 아닐 수 있다.

단지 건강한 수제비를 해 먹겠다며 어쩌다 대책 없이 사버리고 남은 통밀가루의 소진 방법을 찾다 나온 대안이기도 하다. 다만, "아닐 수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말 백색소음을 만들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실패하고 낙담한 요즘의 나에게 따스한 분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빵을 구워보기 위한 여러 가지 핑계가 있었다'라는.


나는 한 번도 빵 만드는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

'빵'은 그야말로 요리와는 또 다른 세계요, 이 세계가열리면 필연적으로 각종 물욕과 빵에 포함된 탄수화물, 지방이 함께 따라온다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세계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각종 향신료, 도구, 재료들로 넘쳐나는 1.5룸의 주방.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식욕으로 '소식'이 될 리 없는 내 몸뚱이. 지금도 감당이 안되는데 감히 이 세계에 발을 들이고자 하다니...당신 정신이 나갔군요.


두 번째로 빵을 만드는 과정이 나와는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각종 블로그 선생님이나 유튜브 선생님들, 나의 요리 선생님이 알려주신 레시피들을 따라할때 멀쩡히 적어준 계량을 맞추지 않고 눈대중으로 대충대충 넣어 만드는 편이다. 그때그때 오는 나의 '감'에 맞춰서...

만약,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귀찮아서?라고 묻는다면, 네. 아니라고 차마 답할 수는 없네요.

아무튼 철저히 내 입맛에만 맞춘 계량으로 '간'을 한다해도 만들려고 하는 요리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않고 완성작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그러나 빵과 제과는 계량이라고 하지 않던가? 1g의 차이를 맞추겠다고 저울을 꺼내는 걸 상상하면서 벌써 진한 두통이 밀려온다.

물론 요리도 용량과 무게를 잴 때는 있지만 간혹 사소한 용량 변경과 온도 변화에도 빵 성형이 잘 안 된다는 방구석 베이커들의 낙담 후기들을 보자마자 이길은 내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터라 감히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어울리지 않게 나란 사람, 빵맛에 민감하다.

맛없다, 맛있다를 감히 판단할 수 없는 입맛이지만 내 기준에서 나름의 종류별 베이커리 선호도를 보유하고 있는터라 예를 들어 사워도우는 어디서만, 식빵은 어디서만, 이 빵집에선 이것만, 저 빵집에선 이것저것만의 기호를 꽤 강하게 주장하는 편이다.

따라서 워낙 손으로는 뭐든 세계 제일가는 한국 선수들 빵집도 많은데 내 발이 피곤할지언정 굳이 내 손으로 망작을 만들어 손부터 입, 머리까지 피곤하게 만들 일이 있을까 싶었다.

사설이 길었지만, 아무튼 여타의 많은 이유로 감히 빵부터 디저트까지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은 추운 날씨, 그리고 주말, 쓸쓸함, 헛헛함들과 더불어 어쩌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배불뚝이 통밀가루 봉지와 유튜브로 검색해 나온 통밀 포카치아만드는 영상이 너무 쉬워 보인다는 이유가 합세해 겁도 없이 빵의 세계에 손을 뻗게 되었다는 이야기되시겠다.




어김없이 저녁부터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통밀가루와 따뜻한 물, 이스트를 휘휘 섞으며 반죽을 만든다.

둥글게 둥글게 반죽을 모아준 후 랩을 덮어 상온에서 30분 동안 발효를 한다.

갑자기 기온도 떨어지고 가난한 독거노인은 가스비가 걱정되어 보일러를 잘 켜지 않은 사람이라 발효가 잘 되지 않을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 그럼 나와 함께 따뜻한 곳으로 가자꾸나. 미래의 포카치아'


나와 전기장판에 나란히 앉은 나의 반죽


소파에 깔아놓은 전기장판에 나란히 앉아 발효되기를 기다린다.

김치 익는 소리만큼 뽀글뽀글 극적인 소리는 들리지않지만 통밀의 향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다.

반려반죽 키울만한데?


30분이 지나면 소량의 소금과 올리브유를 넣고 휘휘 저어 다시 30분 발효에 들어간다.

30분 후에는 손에 물을 묻히고 반죽을 사방에서 돌아가며 두 번씩 접어준다.

시큼, 구수한 냄새와 진득하게 늘어나는 반죽을 만지는 일은 귀찮긴 해도 그 자체가 힐링이 되어가는 듯하다.

이래서 빵을 만드는 것에 다들 빠지게 되는 걸까? 이것 때문에 수많은 직장인들이 회사를 버리고 빵을 만들러 가는 것입니까?(내 주변에는 실제로 제과, 제빵을 위해 직장을 버린 사람들이 4명이나 있었다.)

얼마나 좋은 것이면! 그럴 용기도, 재주도 없는 그냥 직장인은 마음속에서만 조용히 상상만 하다 잽싸게 거둬봅니다.


또다시 30분.

랩을 열 때마다 오동통하게 오른 반죽이 손을 대면 통통 튀어 오를 지경이다. 어머, 이렇게나 귀여울 수가? 점점 빠져드는 손기술 없는 직장인. 마치 아기 볼따구 같이 보드랍고 통통한 반죽을 기다리는 30분이 이제는 귀찮음이 아닌 설렘으로 다가온다.

예쁘다 예뻐. 아구구구 내 반죽이.

또다시 사방 접기를 한 후, 마지막 30분. 이 예쁜 반죽을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 12시간 발효에 들어간다.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온 나의 반려 반죽이.


다음 날 아침 만난 나의 반죽이.

여유롭게 늦잠을 잔 나는 의도치 않게 반죽이를 12시간 정도 발효시켰다. 반죽이는 발효의 마법이 더해져 기포가 형성되고 있었다.


한참 채식과 발효에 빠져 아주 간략하게 진행되는 발효 세미나를 찾아가 들었던 적이 있었다.

어떠한 첨가제 없이 그냥 소금으로만 자연 발효를 시키는 요리들을 소개해주셨는데 양배추를 소금을 넣고 손으로 바락바락 비벼 사워크라우트처럼 먹는 발효 양배추, 먹다 남은 사과 씨조각을 넣어 만드는 발효 두유 요거트, 각종 버섯들을 삶아 소금을 넣어 만드는 발효 버섯 등 시큼하고도 매력적인 음식이 되어버리는 발효 음식에 미쳐 weck 병을 어찌나 사모았던지.

지금은 채식의 횟수도 조금 줄이고 그 모든 발효, 저장 음식들을 소진할 수가 없어 가끔 마음이 여유로울 때만 만들고 있지만 그때 하신 발효 선생님의 말씀만은 잊히질 않는다.

"사람이 거대한 미생물이다."

음식을 먹고 장내 미생물들로 소화를 시키고 균과 결합된 음식물들이 응아를 만들고 밖으로 내뱉는.

맞아! 그렇지! 난 자이언트 미생물이었어.

이런 미생물들이 살균, 멸균 처리한 가공식품을 먹고 어떻게 살 수 있겠나? 너무나 당연한 진리 같았던말이 머릿속에 각인되며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든 음식인지를 알고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일이 나라는 자이언트 미생물을 건강하게 잘 키우기 위해 좋은 먹이를 주는 일이라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깨달음이 찾아오던 순간이었다.

실제로 햇반같이 가공되어 있는 음식으로는 김치나 식혜를 만들어도 발효가 잘 되지 않는다는 선생님의경험담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발효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은 발효만이 만들어내는 묘한 감칠맛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 쩍 달라붙는 맛, 마치 이게 내가 찾던 맛이야! 를 주장하는 것 같이 혀를 단번에 감싸는, 그 찰싹 달라붙는 감칠맛. 상상력과 언어 표현력이 부족한 S 유형의 인간은 이 맛을 찰떡같이 표현하기 어렵지만곰삭은 전라도 김치를 먹었을 때 젓가락을 흔들어제끼고 싶은 그런 맛, 이런 음식을 맛볼 때의 짜릿함과 같은 매력...이라고 최선을 다해보았습니다.

우리 반죽이, 너에게도 그런 맛을 기대해도 될까?


마지막 올리브유로 마사지를 해주고 오픈 팬에 반죽이를 평평하게 고루 펴준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3시간의 발효. 발효가 다 된 반죽이를 놓고 손가락에 올리브유를 치덕치덕 발라

익숙하게 보던 포카치아 홀을 꾸욱꾸욱 눌러 만들어준다. 몽글몽글 올라오는 반죽이의 귀여운 모습도 어느새 진짜 진짜 마지막. 이제는 저절로 유럽이 그려지는 내추럴 하면서도 힙한 비주얼의 포카치아로 변신할 차례.

블랙 올리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환장)

그런대로 남아있는 그린 올리브 씨를 발라 반죽에 놓아 빠지지 않게 한 번씩 꾹 눌러주고 로즈마리도 똑똑 잎을 끊어 고이 반죽 위에 놓아준다. 바질을 살랑살랑 흩뿌려주다가 훅- 쏟았지만 어찌 됐든 오븐에 들어갈 준비는 완료.

로즈마리의 향과 흩뿌린 바질의 향, 발효된 반죽이의 본연의 향까지 어우러져 이대로도 환상적인 향이난다.

기대감과 식욕을 동시에 솟구치게 하는 향이다.


이대로도 먹음직스러운 포카치아 반죽. 모여있는 바질만 빼면.


예열해 둔 오븐에서 15분 정도를 굽고 나니

'와 이거 정말 내가 만들었다고?'

'이 대충손으로 빵을 만들었다고?'

호 진짜 믿기지가 않는다.


예상치 않게 너무 잘 나온 나의 포카치아.


역시 사람은 하면 되는군요.

오븐 온도가 셌는지 오버쿡이 된 듯 하지만 첫 작품이 이 정도면 나 스스로에게 칭찬 한표 줄 만합니다.

통밀의 구수한 향과 말 그대로 겉바속촉의 모습을 한 포카치아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아도 그대로도 멋진 맛을 내었다. 원래는 만들어놓은 할라피뇨잼도샌드위치 속도 준비해 놓았지만 커피 한잔 놓고 주방에 선 채로 포카치아 두 조각을 홀랑홀랑 다 먹어버렸다.  


겉바속촉에 감동한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조각을 순삭해버렸다.




무려 18시간 동안의 대장정동안 뜻깊은 결과물로 막을 내린 나의 통밀 포카치아 만들기 여정.

통밀가루의 소진과 따뜻함을 챙기려 시작한 나의 도전이 다시 내 안에서 되살린 발효 맛의 기억과

뜻하지 않은 제빵 재능을 발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맛있고 아름다운 포카치아가 남았다.


새로운 직장과 새로운 일의 도전으로 한껏 부풀었던기대감이 몇 개월이 지나 무기력함으로 변화되고 폭삭 사그라진 자존감과 무엇도 재미가 없어진 밋밋한일상에서 연말이라는 시기감과 추운 날씨의 계절감이 더해져 찬 공기만 가득해졌었는데 통밀 포카치아를 만들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함으로 마음은 충만해졌으며

반죽이가 자라는 모습에 처음 기대했던 따스함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주말을 치유했다.


다음날 아침도 포카치아와 함께.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착각은 결국 또다시 고통의 굴레를 만든다.

한 번의 아름다운 치유와 힐링이면 될 것을..

그렇게 빠지지 말자, 너의 길이 아니다 다짐했던 제빵의 험난한 길을 이 미련한 인간은 또다른 강력분 소진을 위해 치아바타를 검색하고 치아바타를 위한 각종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스크래퍼와 반죽통을 사들이며 그 길에 발을 들이려하고 있다.

더 문제는 소진하려고 안 만들겠다던 빵을 만들어놓고 그 통밀가루를 또 샀다는 사실이다.

뭐든 '욕심'이 문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기대에 대한 실망도 다 욕심이 만든 걸 알면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우뜨케.

하고 싶은 걸.


얘가 된통 당해봐야 알텐데...

다음 치아바타는 부디 망하길 바라며.



왜 시도라는 키워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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