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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헤이 Dec 12. 2023

보늬밤

차가운 겨울을 대비하는 깊은 가을의 맛. 

재작년이었던가?

이때도 퇴사 이후 잠깐 쉬고 있었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사업병이 들어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뛰어다니던 

열정과 꿈, 에너지와 시간이 넘치던 백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호기롭게 보늬밤을 만들겠다고 산 밤 3kg.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호되게 당해놓고 작년 가을에는 밤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9월에 접어든 주말 아침,

차 한잔 내려놓고 환기를 위해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느껴지는 찬 기운에 

월동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보늬밤'이 떠올랐다.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빨리 잊히는 걸까?

그때의 노동강도가 가물가물하다.

추석 때 할머니댁에 들고 갈 밤죽도 함께 만들 겸 23년 가을 햇밤을 2kg 주문했다.

보늬밤은 딱 1kg만 해야지.

그래도 고통의 흔적은 살짝 남아있었나 보다.


추석이 지나고 어느덧 10월 초 연휴,

잠자고 있던 밤을 냉장고에서 꺼내 보늬밤 작업을 시작했다.

(햇밤은 조금 묵혀두고 숙성시키면 더 달아진다.)

아침 일찍 멀리 서울로 병원을 다녀온 후, 초저녁이 시작될 무렵 밤을 물에 불리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기기 위한 1차 작업이다.

3시간 이상 불리고 끓이고 만들 과정과 시간을 추정해 보니

'대략 내일까지 온종일 밤과 씨름하겠구먼...'

재작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꼭 (한)밤에 (보늬)밤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작업을 늦게 시작하는 이유는 딱히 의도한 것도 아니고 두려움까지도 아니지만, 

밤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지겨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들.

이런 생각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날 때가 많다.

짜증이 나면 술을 마시고 싶고 그러면 안주를 준비하고 싶고 그렇게 또 나를 놔버리게 된다.

밤에 술 마시는 버릇 겨우 끊었는데..

이냥저냥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차라리 손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물론 손을 움직이면서도 마음의 번잡함은 사그라지지 않지만 

명확한 해야 할 미션을 목표로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을 때는 가슴을 조여 오는 생각들도 살짝 풀어지는 기분이다.


껍질을 다 벗긴 시간 오후 11시 9분.


비로소 밤을 까면서 잊힌 기억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밤 까다가 내 손도 까버린 기억,

다음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렸던 기억,

밤물이 온 사방에 튀어 싱크대고 스텐볼이고 여기저기 한동안 와인색 얼룩무늬가 새겨진 기억. 

'하, 이제사 생각이 나네.'

그렇게 한낱 나란 인간의 기억 능력을 탓하며 

베이킹소다를 풀어 밤을 재워놓고 나도 잠을 재워보려 보늬밤 만들기 사전 작업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보늬밤 만들기 2차 작업 시작.

이제는 몇 번이고 계속 끓이면 된다. 

한번 끓이고 나면 율피에 있던 잔털들이 제거되며 점점 반질반질한 모습으로 밤이 변해간다.

끓인 물을 흘려보내면 가늘게 붙어있던 잔털들이 빨간 밤 물을 뒤집어쓰고 물에 휩쓸려 내려간다.

은근 개운하다.

다시 한번 깨끗한 물을 담고 

그렇게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총 3번의 끓이기를 반복해야 털이 제거된 말끔한 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말 번거롭고 귀찮은 작업이지만 이 작업이 정성스러우면 정성스러울수록 

밤은 불순물을 털고 더욱 깨끗해지고 매끈해진다.

보글보글 끓여지는 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도 지금 끓여지고 있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해본다.

그럼 나를 괴롭히는 잔털들도 물에 싹 씻겨 내려가고 참 좋겠다.

끓여져서 없어질 수 있는 고민이라면...!

아~그만~

소리 한번 지르고 다시 집중.


그렇게 3번 끓여낸 뜨거운 밤을 잠시 식혀두고 

식고 나면 이쑤시개 하나 들고 

밤 중간에 있는 가장 굵은 껍질을 제거한다.

밤을 관통하는 가장 큰 껍질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는 일일이 눈으로 점검을 해주며 이쑤시개로 제거한다.

이 아이는 아무리 끓여도 잔털들처럼 깔끔히 날아가지 않고 밤에 진하게 박혀있다.

이 굵은 껍질은 율피에도 껍질이 있던 그대로 깊은 자국을 남긴다.

모양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지만 자국은 그대로다.

뭐 하나가 콕 박혀서 웃고 떠들고 있어도 계속 뭐 하나 명치에 탁 들어박혀 있는 그런 느낌.

요즘 들어 가슴속에 박혀있는 이 정체 모를 돌 하나가 마치 밤 껍질 같다.

벗겨내려고 용을 써도 턱 하니 박혀서 진하게 남아있는 이 느낌.

딱히 표현할 단어가 없어 이 느낌을 우울감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쑤시개 같은 걸로 누군가 뽁 하니 벗겨내 주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결국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벗겨내야 할 일이지. 뭐.


아무튼 밤이 부서지지 않게 살살 잔털들도 깔끔히 털어내주면 

진짜 맨들하게 변신한 예쁜 보늬밤의 형태가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밤이 부서지거나 율피가 벗겨지지 않게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설탕물이 밤 안까지 침투하면 보관하면서 밤이 금방 상할 수 있다고 한다.

너무 깊숙이 단맛을 보면 망가지는 것도 진리네. 

다시 한번 요리가 나의 명상임을 깨우친다.

부드럽지만 두껍게 감싸고 있는 율피가 설탕물에 달달하게 익어갈 동안 밤을 보호해주고 있다.

내 보호막은 뭘까? 


자, 다시 집중합시다! 

이렇게 보늬밤 2차 작업이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보늬밤 만들기가 시작된다.

놀랍지 않은가? 끝이 없다, 끝이 없어.


마지막으로 손질한 밤에 깨끗한 물을 담고 설탕을 넣고 오랜 시간 졸여준다. 

이때 간장도 한 스푼 함께 넣는데 넣는 이유는 잘 알지 못한다.

단맛을 더 살려주기 위한 '간'의 의미인가? '색'의 의미인가?

짧은 요리 지식으로 약간의 감칠맛을 주기 위한 용도일 수 있을 것 같다.

물이 반 정도 줄면 럼 한 스푼을 추가해 향을 입혀준다.

가을의 향.

스트레이트로도 이 맛을 느끼면 좋으련만, 럼을 스트레이트로 마시긴 참 어렵다. 

아직은 그 정도 술쟁이가 되려면 멀었다.

알코올을 살짝만 날려주고 나면 드디어 아름다운 자줏빛의 보늬밤들이 완성된다.

 



보늬밤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꽤 길고 귀찮은 작업이 많아서 

정신없이 나를 돌리기 수월하다.

그래도 마음속 생각은 쉽게 꺼냈다 집어넣었다 할 수 없지만

잠시동안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꽤 괜찮은 방법이다.

물론 이런 방법이 좋은 것도 아니고 효과가 오래가는 것도 아니다.

매번 핵심을 빠르게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겨서 문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내 '호'지만

방향성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일은 쉽게 파악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기에

무엇하나 바꾸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 지금이 나에게는 고통스럽고 우울할 따름이다.

특히, 이미 의지를 가졌던 일을 뒤로 남겨둬야 한다면 더욱더.


그래도 보늬밤을 만들고 나니 가을이 왔구나, 나를 위한 겨울을 준비했구나 싶다.

열탕 소독한 통에 담아 맛이 제대로 들 때까지 기다렸다 꺼내 먹는다. 

사실 기다리기 힘들어 몇 개만 다른 통에 빼놓는다.

그러나 맛있는 건 기다림이 있어야 더 깊게 느껴지는 법인가 보다. 

한 두 달 지나고 나면 맛과 향이 훨씬 더 진해지는 느낌이다.

11, 12월 

그야말로 추운 겨울이 오면 제대로 된 가을 밤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여전히 뜨거운 생각들에 끓여지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추운 겨울이 오고 달달한 보늬밤을 한 두 개 꺼내 먹을 때쯤엔 

마음이 환기되는 즐겁고 달달한 에피소드 정도 한 두 개 생기지 않을까?

아주 진한 달달함은 아니어도 되니까 밤아, 그렇게 보상해 주길 바라.




1개만...2개만 하다가 진짜 딱 3개만 먹자!



보늬밤 하면 리틀포레스트를 자연스레 많이 떠올린다. 하필 보늬밤을 만든 이 가을에 우연히 군위를 다녀오다 리틀포레스트 촬영지를 들러보게 되었다.



재작년엔 나의 오래된 친구들에게

올해는 매월 나와 함께 잔을 들어주는 예원, 명희에게



이번엔 조금밖에 만들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없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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