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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헤이 Jan 02. 2024

장준감

23년 가을에 만난 특별한 홍시를 다 털어보내며.

왠지 새로운 하나의 글 카테고리가 생겨나는 듯 하지만 맛있는 요리를 하기 위한 원재료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정말 특별한 재료는 그 자체로서 완벽하다. 그야말로 하늘과 자연이 요리한 완벽한 상태의 맛. 괜히 그 완벽한 맛에 손을 대는 것이 오히려 맛을 해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이번에도 숱한 망작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특히 제철 재료나 잘 알지 못하는 토종 품종,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물이 있으면 꼭 한번 맛보려고 한다. 더구나 요즘은 산지에서 직접 생산자가 소개하고 판매하는 플랫폼도 많아지고 있어 방구석 미식가의 탐구 열정은 점점 더 불타오를 수밖에 없다. 좋은 건 나만 먹으면 아쉽기도 하고 귀한 것들은 더 많이 알려지고 소비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내가 사모으는 제철 재료들에 대해서도 하나씩 기록해 보기로 한다. 

물론, 먹는 것과 함께하는 나에 대한 탐구는 기본 베이스로.




이번 가을 식량으로는 뭘 쟁여두고 먹어야 하나 찾다가 우연히 홍시가 생각났다. 사실 나는 홍시보다는 단감을 더 좋아한다. 씹는 식감도 하나의 맛이라고 생각해서랄까? 후루룩 넘기고 나면 느껴지는 홍시의 진한 단맛보다는 텁텁함 끝에 씹으면 씹을수록 살며시 올라오는 단맛의 아삭한 단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발달한 우리 집안의 사각턱은 아마 이런 씹는 감각을 더 좋아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때문인지 작년 가을에는 단감을 달고 살았다. 하루에 하나씩 질릴 정도로 먹었던 것 같다. 냉장고 속 시원하게 넣어둔 차가운 단감의 맛에 아삭함이 더해져 묵은 체증이 수욱-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왠지 이번 가을은 홍시가 더 먼저 생각났다.(물론 단감을 안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한 단맛이 당겼던 것은 나의 몸과 심리상태에 기인한 이유인 것 같지만 아무튼 덕분에 맛 좋은 홍시를 찾을 수 있었다.


보통 홍시를 찾으면 청도를 많이 떠올린다. 밀양 단감이나 영암 대봉감, 상주 곶감 등 우리나라의 감은 남부지방에서 주로 생산하는 듯하다. 뻔질나게 내려가는 하동에서도 이번에서야 악양 대봉시가 유명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감나무를 처음 인지하게 된 곳도 아빠의 고향 '고창'이었다. 기와집 대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떡 하니 서 있던 큰 감나무 2그루. 추석을 맞아 내려간 그곳에서 사촌오빠랑 장대질로 잘 익은 홍시를 떨어뜨려 감나무를 홀랑 벗겨먹었던 기억이 있다. '고시래'로 몇 개는 남겨둬야 한다는 이야기도 그때 처음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혼쭐이 난 후, 홍시 한 두 개 남은 감나무를 아쉽게 포기한 채 옆에 있던 대추나무를 새로운 타겟으로 삼아 하루종일 대추나무의 씨를 말려버린 기억 역시 '고창'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몇 안 되는 즐거운 기억이다.


늦가을에 끝자락즈음이었던 터라 유명한 감들은 이미 조기 매진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검색하던 중 우연히 눈에 걸린 것이 장준감이었다. 오 나름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는 감이라는 것이 놀라워 '장준감이 뭐지?' 하며 상세페이지를 확인하는 순간 산지가 강화도라는 내용을 보고 더 놀랐다. 강화도도 감이 유명한가? 그토록 자주 놀러 가던 강화도(그 많던 펜션이 아직도 강화도에 즐비한지 궁금하다.)였는데 감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호기심이 생겨 더 검색해 보니 강화도를 대표하는 육미 중 하나란다. 하참, 세상에 알아야 할 것과 먹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죽기 전에 이거 다 먹어보고 갈 수 있을까? 


주문을 하고 곧 장준감이 도착했다. 사진은 없지만 감 하나하나 부딪히지 않도록 섬세하게 박스 벽을 세워 나란히 담아 보내주셔서 그랬는지 집 앞에 사 먹거나 배송시키는 봉지 감을 대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귀하게 키우시고 꼼꼼히 포장해서 보내주신 감이니 소중하게 먹자라는 생각이 든다. 디스플레이란 이래서 중요한가 보다. 후숙이 안된 감들이니 꼭 후숙 후에 먹으라는 내용과 함께 보관, 후숙 방법까지 자세히 적혀있다. 하루를 꼬박 보낸 빵 반죽도 그렇게 귀엽고 소중했는데 사계절을 꼬박 키우신 감들이 얼마나 귀하실까? 정성스럽게 키운 감을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생산자의 마음이 담겨있는 느낌이다. 예전에도 이런 산지직송 배송은 몇 번 받아보았는데 특별한 감정은 못 느꼈었던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생산자에게 직접 받는 경험이 음식에 대해 이렇게 다른 태도를 갖게 하는지 찐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시퀀스의 포인트를 하나하나 분석해내지 못한 것이 아쉽군. 




그렇게 감을 받고 얼레벌레 당황했던 것은 사실 후숙 방법 때문이었다. 받자마자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신문지를 놓고 감을 널어두라는 부분이었는데 이 차가운 도시에, 손에 각종 IT 도구들이 넘쳐나는 직장인 집에 무엇이 있겠는가? 신문지는 물론 좁디좁은 원룸에 감 널어놓을 구석이 있을 리가. 그나마 있는 건 종이호일 뿐.

종이호일 하나 넓게 펼치고 보내주신 박스도 최대한 활용해서 이리저리 집안 곳곳 감을 펼쳐놓는다. 누가 보면 다람쥐인 줄. 한동안 좁은 집 어디에 눈길을 두어도 쟁여, 아니 널어둔 감이 보였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 안 풍경이다. 볼품없지만 한동안 집안 곳곳에 가을이 있는 듯해서 따뜻했다.


매일 감의 후숙 상태를 확인했지만 완벽한 상태로 홍시를 즐기기엔 일주일은 너끈히 필요해 보였다. 기다리기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들이 한꺼번에 홍시가 되면 어떡하지? 도대체 이 많은 양을 어떻게 보관하지? 걱정이 밀려와 냉동실에 들어간 지 오래된 아이들을 급하게 뱃속으로 처분하기 시작했다. 질려버린 간장게장, 육수용 닭발, 황태머리, 대추, 얼려놓은 빵, 밥 등 어지러운 냉동실을 미리 정리하고 홍시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감들은 너무 많지 않은 양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장준감은 다른 감보다 작고 세로로 길쭉한 모양이다. 안을 보면 씨가 조~그맣게 귀여운 모양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말 잘 봐야 보인다.


어느 주말, 도저히 널려있는 감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겠다 싶은 화창한 주말 오후. 달달한 것이 땡기던 차, 덜 익어도 오늘은 반드시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감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져보기 시작했다. 적당히 물렁하게 익은 감 하나를 골라보았다. 외모부터 확실히 다른 감과의 차이가 느껴진다. 대봉감보다는 작고 일반감보다는 약간 길쭉하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꼭지 주변에 살짝 울퉁불퉁한 모양이 튀어나와 있다. 

쩌억- 갈라 안을 살펴보면 어라? 씨가 없다. 오해하지 마시길. 분명 씨는 있답니다. 쌀알보다도 더 작은 씨들이 '저, 생각하시는 그 씨가 맞습니다.' 하며 얌전히 숨어있다. 받은 장준감을 다 먹어본 결과, 씨들이 모두 저렇게 작은 것은 아니다. 가끔 큰 씨들도 보이는데 대부분 감의 모양처럼 작고 길쭉한 모양으로 생겼더랬다.

맛은 말해 뭐 해. 너무 물렁하지도 그렇다고 단단하지도 않은 장준감은 유난히 씨 주변의 속살이 쫀득쫀득한 느낌이다. 식감 자체도 맛있지만 감이 가지고 있는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맛이다. 이 다른 감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감이 내는 독특한 은은하게 달큰한 맛이 있는데 그 특성이 더 진하다고 해야 하나? (홍시 맛에서 홍시 맛이 날 뿐입니다. 맛 표현 포기.) 이게 감의 맛이다!라고 하는 듯한 진한 맛이다. 

이때 맛본 감 특유의 향과 맛이 잘 기억에 남았나 보다. 하동에서 다원을 방문해 찻자리를 가져었는데 내어주신 차 중에 질 좋은 감잎차가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감향과 맛이 장준감을 먹었던 기억으로 살아났는지, 어떤 차인지 모르고 마셨는데 '혹시 이것은 감잎차?'라며 차 종류를 한 방에 맞출 수 있었다는 신기한 경험이다.




2주 남짓한 기간이 지나고 드디어 먹기 좋은 상태로 감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뜨끈한 국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디저트로 먹는 달달한 홍시는 한동안 늦가을 출근길의 행복이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바닥에 앉아 홍시를 게걸스럽게 먹던 기억도, 더럽지만 늦가을의 낭만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때 장대질하던 고창의 기와집은 다 허물어지고 사라졌겠지. 집의 경계가 어딘지 당최 알 수없던 담장 문 앞 논밭도 아마 아스팔트가 되고 그 터에는 아파트나 빌라가 들어서지 않았을까? 잠시 떠올려 본 어린 시절의 추억의 장소는 이제 사라졌겠지만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을 했으니 난 행운아인 걸까? 또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물론 걱정했던 것처럼 한 번에 5~10개의 홍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인 가구는 감히 이 양을 감당해 낼 수 없어 꼭지를 따고 칼로 껍질을 끝까지 긁어내 속살을 통에 가득 담아 냉동실에 얼려놓는다. 한통, 두통, 넉넉한 양이 채워지고 냉동실로 이동시키는 동안 마치 김장한 것 마냥 마음이 든든했다. 이걸로 뭘 만들어볼까?


쫀득한 식감이 있는 감과 체에 곱게 걸러낸 감을 분리해 담아 놓는다. 쫀득한 감은 그대로, 걸러낸 감은 디저트로 활용할 계획이다. 나는 J다.


검색을 해보니 보통은 홍시 고추장을 만들기도 하고 홍시 라떼나 박나래가 유행시킨 홍시 티라미수를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이 다 땡기지 않아서 해외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했으나 역시 그닥 땡기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조금씩 즐길 수 있는 디저트류가 땡겨서 홍시 푸딩과 홍시 양갱에 도전했으나 대차게 망해버렸다. 

홍시푸딩은 크림류를 찬 기운을 빼지 않은 상태로 급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다 뭉쳐버렸다. 원래 예쁘게 담아서 사진도 찍어보려 했으나 만들면서 망했다는 것을 직감한 후에 반찬통에 넣고 그냥 식혀버렸다. 보기엔 안 좋았지만 맛은 있어서 기분 좋게 먹긴 했지만.

홍시양갱은 완벽한 반대케이스다. 마침 대추도 있고 언제나 구비되어 있는 타임이 있어 예쁘게 장식도 해보았으나 맛이 영 아니었다. 한천의 맛이 너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상한 물맛 같은 껄끄러운 맛이 홍시 맛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아까우니 하나하나 먹긴 했지만 억지로 먹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망작들. 대추가 떨어질까 살짝 눌러보았으나 다 뭉개진 홍시양갱. 맛이라도 있었으면 말을 안해 ㅠ


역시 Back to Basic.

기본이 최고다. 그 자체로도 맛있는 걸 뭐 하러 손을 댈까. 결국 남은 홍시는 요거트에 알차게 얹어먹고 가끔 그래놀라도 뿌려 씹히는 맛도 추가한다. 또 살짝 해동된 상태로 크렘프레쉬만 얹어서 먹는다. 무게감 있는 홍시의 단맛에 산뜻한 크렘프레쉬의 조합이 너무 좋았다. 물론 제일 맛있는 건 단단했던 감이 살짝 무른 것 같은 상태로 변했을 때 그 자리에서 갈라 후루룹 먹는 홍시 그 자체의 맛. 맛있는 건 이렇게 단순하게만 먹는 게 최고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요거트와 크렘프레쉬. 비슷해보이지만 맛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아침에는 요거트와 함께하는게 좋았고 밥 먹고난후 디저트로는 크렘프레쉬와 함께먹는게 좋았다. 특히 매운걸 먹고난 후.


이번 가을은 장준감이라는 멋진 가을의 홍시 맛을 알았고 덕분에 홍시의 맛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었다. 이 좋은 가을을 즐길 새 없이 낙엽처럼 흔들렸던 나의 23년 가을,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바닥까지 내려간 나에게 진한 단맛이 필요했던 시기, 나의 리프레시 아이템으로 한 계절을 잘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음 가을부터는 다시 내가 더 좋아하는 단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당분간 가을, 홍시를 떠올리면 장준감을 자연스럽게 찾게 될 것 같다. 종종 떠올리는 어린 시절 고창의 가을처럼 계속 기억 속에 남아 가을을 불러오지 않을까 싶다. 내년에도 만나볼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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