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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헤이 Jan 23. 2024

월남쌈 주먹밥

10년 경력 도시락 족의 단골 메뉴.

도시락을 싸 온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도시락을 처음 쌌던 계기는 지금 다니는 한의원에 처음 발을 디뎠던 날, 소식의 중요성을 알려주신 열정적인 의사 선생님 덕분이다. 당시 나는 콜린성 알레르기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각종 피부과, 한의원 등 이렇다 할 병원을 모두 다녀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론 이 한의원을 다닌 이후로도 콜린성 알레르기가 바로 낫지는 않았지만(29살부터 시작된 콜린성 알레르기가 사라진 건 퇴사 후, 장기간의 유럽 여행을 다녀온 해부터 발병하지 않았다. 약 4~5년간을 매년 겨울마다 찾아오던 병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돈도, 지위도, 보약도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을 없애는 것만큼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는다.) 매 끼니를 주먹만큼의 양만 먹기 미션을 주신 의사 선생님의 명령으로 매일 도시락을 쌀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선생님의 타이트한 관리로 당시 나는 인생에서 가장 날씬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로 한의원을 더 이상 가지는 않았지만 도시락 싸기는 어느새 익숙해진 루틴이 되어 버렸다. 회사를 이직해서도 도시락 싸기는 계속되었고 회사 내 꼭 몇 명은 도시락을 싸는 사람들이 있어 이 루틴은 계속 지속될 수 있었다. 퇴근하면 집에 와서 도시락을 싸고, 주말마다 밥과 반찬을 두둑하게 해 두는 것이 일상으로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남들처럼 결혼이다 육아다 뭐다 생활의 변화가 크게 생기지도 않았고 특별히 빠져드는 운동이나 취미도 없었으며 그저 직장과 일에 올인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꾸준히 지킬 수 있었던 루틴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새삼 감사한 일이면서도 한편으로 한심한 삶이다.(결혼과 육아를 못한 게 후회된다기보다 직장과 일에 올인했는데 내가 할 줄 아는 일이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제일 한심스럽다.) 가끔 세상 밖 음식이 땡길때도 있고 새로운 메뉴, 유명하다는 메뉴도 꼭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다 집밥을 주식으로 먹고 있어 생길 수 있는 긍정적인 욕구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내가 특별히 음식을 잘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느끼는 건 무슨 까닭인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10년이 지나고 다시 한의원 선생님을 찾았을 땐 몸이 예전보다 훨씬 망가져있었다. 물론 소식은 그 이후로 한 번도 실천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전보다 식탐이 강해져 있었다. 덕분에 몸무게는 다시 체지방이 넘쳐나는 몸무게로 돌아가 있었고 처음에는 고기류만 소화 못하던 것이 이제는 뭘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는 느낌을 받고 저녁이 되면 온몸이 땡땡 부었다. 생리주기는 철저하게 지켜지던 28일에서 갑자기 24일이 되고 보이지 않던 곳곳에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노화'가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어찌나 충격이던지.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그렇게 충격받을 것도 없는데 나이 듦에 난 절대 당황하지 않을 거야라고 믿어왔던 내가 이렇게 충격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역시 생각만 하는 건 쉬운 일이다.

무튼 선생님은 빠르게 찾아온 노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내장 기관들을 쉬어주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이를 위해 또 한 번 스파르타 소식을 권하셨다. 매 끼니의 식사는 서로 다른 종류를 5가지 이상 구성하라고 하셨고 2시간 이내의 배고픔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다음 끼니의 총량을 줄여야 한다고 하셨다. 매번 배고픔을 찾으라 하셨는데 매일 앉아서 키보드나 치는 직장인은 왠만한 양으로 배고픔을 찾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진짜 찐 소식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참고로 내가 먹는 밥의 양은 잡곡을 포함한 밥으로 끼니당 75g이내다. 예전의 내 식사량과 비교하면 이것만 먹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소식 컨설팅을 위해 매 끼니의 식사 사진을 찍고 1주일에 한 번씩 검사하신다. 빡빡한 선생님의 룰을 따르는 것은 꽤나 어렵고 나 역시 뺑이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지라(선생님은 아예 사진을 누락시키는 끼니 수로 내 꼼수와 폭식을 짐작하고 혼내주신다.) 철저한 소식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덕분에 더 열심히 도시락을 싸야 하는 이유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평균 출퇴근 시간 1시간 30분 이상을 쓰는 직장인이 매일매일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선생님이 주신 룰을 지켜서 식단을 구성하는 일은 최상급 난이도다. 평일은 집에 들어와 씻고 도시락을 싸고 나면 자야 할 시간이 되어버린다. 주말 중 하루는 무조건 다음 주 먹을 반찬이나 간단한 식량들을 만들어두어야 한다. 물론 이제 노하우도 생기고 손도 빨라져서 밥은 2주에 한번 몰아서 하고 웬만한 반찬은 1시간에 2~3가지정도 후딱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렇게 매번 싸다녀야 하는 상황에 현타가 올 때도 있다. 내 가방 안을 보면 꼭 야자 하는 고등학생 가방 같은 느낌이다.

현타가 와도 매번 도시락을 까먹을 때면 하는 생각은 주로 '왜 이렇게 맛있어?', '식어도 맛있네?', '밖에서 먹는 것보다 백배 낫다.', '이 시간이 제일 좋아.' 이러니 도시락을 안 쌀 수가 있나. 꾸역꾸역 내가 만든 걸 제일 좋아하는 내가 문제지. 남들은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던데. 남이 해준 밥상을 많이 받아보지 못해서 모를 수도 있으니 단정 짓지는 말자.(ㅎ)




하도 도시락을 오래 싸고 다니니 그야말로 만들기 편하고 먹기 편한 주먹밥, 김밥 종류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집반찬 다 때려놓고 비벼 먹는 비빔밥이 뭘 넣어도 맛있는 것처럼 주먹밥, 김밥 역시 참기름 바르고 나면 어떻게 만들든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도 가끔은 특별한 주먹밥이나 김밥을 만들고 싶을 때가 있는데 최근 아주 좋은 레퍼런스를 마주하게 되었다.


차를 좋아하는 나는 종종 친구들을 졸라 하동에 내려가곤 하는데 우연히 한번 묵게 된 다원 숙소가 다른 세상에 온 것 마냥 온전히 내가 상상했던 휴식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고 그날 밤 숙소에서 하는 약식 찻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다원에서 연구하며 만들고 계신 차 종류 하나하나 마음에 쏙 드는 정도를 넘어서 마실 때마다 가슴속에서 리스펙이 저절로 우러나올 지경이었다. 이후로도 차 박람회에서도 마주치면 인사를 드리게 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하동을 내려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숙소와 찻자리를 생각하게 되니 찻자리에 한 번은 제대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년, 겨울이 본격적으로 찾아오던 즈음에, 진짜 차가 맛있는 계절이 찾아오는 즈음에, 2시간이 넘는 프라이빗 찻자리에 정식으로 예약을 하고 다시 한번 다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눈이 오는 추운 날씨에 따뜻한 다실에서 눈 덮인 산 아래로 해가 지고 고양이가 넘나드는 배경을 보며 마시는 좋은 차들은 비현실적인 공간에 잠시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함께 내어주시는 정성스러운 다식 코스도 좋은 재료로 만든 담백한 요리들이었다. 사실 정말 좋은 차들을 마실 땐 무거운 다식이 곁들여지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만듦새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스러움과 소박한 아름다움에 반해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배가 빵빵해질 수밖에 없었던 코스 중 하나의 메뉴가 바로 이 월남쌈 주먹밥이었는데 들기름인지, 참기름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고소한 맛이 입 안에 전체적으로 감돌고 바삭하게 한번 구워내 씹는 맛까지 좋았다. 또 안에 담기는 재료에 따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한 끼 식사가 될 정도로 든든하기도 해 간편하게 도시락 메뉴로 싸기에 너무 좋았던 아이템이라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와서 바로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현실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곳에만 머무르면 하룻밤을 꿈을 꾸고 오는 듯 하다. 아름다운 다실, 내가 바라는 꿈의 공간의 롤모델이다.


견본이 된 월남쌈 주먹밥. 아무리 배가 불러도 이렇게 예쁜 음식을 안 먹을 수 있나?


안에 들어가는 부재료는 내가 원하는 재료를 선택해 나름대로 새로운 주먹밥을 만들어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를 넣어 만들어주셨을 테니까 일단 첫 번째로 만들어보는 주먹밥은 그대로 속재료까지 따라가 보자. 속재료를 어떻게 밑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그렇게까지 예민한 입맛이 아니다 보니) 재료에 따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느낌으로 간해보기로 한다.

두부와 버섯을 간장과 맛술, 설탕으로 살짝 조려 본다. 위에 내어주셨던 간장을 따로 도시락으로 싸가긴 번거로우니 아예 속재료를 조금 짭짤하고 달달하게 간장으로 조려 내려는 심산이었다. 먹었던 주먹밥은 김으로 감쌌지만 집에 김은 없었던지라 남아있던 감태로 고급지게 말아보았다. 말다가 쌈을 몇 번 터트린다. 이 똥손은 도통 예쁘게 만들지 못한다. 어쩜 저렇게 예쁘게 말아내셨을꼬? 나는 죽어도 레스토랑이나 식당은 못하겠다. 디스플레이는 정말 나와는 먼 이야기 같다. 욕심을 내면 옆구리가 계속 터져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조신히 적정량만 취해 말아내 본다. 음. 나쁘지 않아.


간장 소스에 조린 두부와 버섯. 버섯 양이 조금 아쉽다. 월남쌈은 잘 달라붙기 때문에 빠르게 말아낸다.

 

그리고 말아낸 주먹밥들은 바로 프라이팬으로 보낸다. 기름을 바르고 예열한 팬에 두면 잘 붙지 않으니 만들면 바로 프라이팬으로 직행시켜 약한 불에 천천히 구워낸다. 약한 불에 구워도 월남쌈은 잘 구워지는 편이다. 만약 굽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다음날 점심, 이리저리 붙어 떨어져 나가는 월남쌈을 아주 더러운 모습으로 먹을 뻔했다. 다 구워진 월남쌈을 도시락 통에 차곡차곡 담아내면 끝. 이 얼마나 간단한지! 요리라고 할 수도 없다. 밥 반공기 양으로 빵빵한 월남쌈 주먹밥을 4개 정도 만들어낼 수 있고 먹을 때도 깔끔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다. 충분한 한 끼 식사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든든해 나의 단골 도시락 메뉴가 되었다.


기름에 구워내면 서로 잘 달라붙지 않아 도시락 통에 마구 담아낼 수 있다.


지저분해 보이지만 맛있습니다.


두 번째 주먹밥을 만들 땐 연어와 아보카도를 넣고 마요네즈와 알싸한 고추냉이를 섞어 함께 말아내었다. 간장이 한식 느낌이라면 이건 정말 양식 느낌의 주먹밥이랄까? 연어와 코찡한 맛의 고추냉이 궁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월남쌈 피와 김은 조용히 도울뿐. 전체적인 맛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다.


연어 + 아보카도 버전. 김치만큼 훌륭한 짝꿍이 없다. 갓김치와 한번, 총각김치와 한번!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는 일은 정말 힘들지만 덕분에 스킬은 점점 늘어간다. 반찬을 하나하나 담아 싸가지 않더라도 주먹밥이나 김밥, 샌드위치나 랩의 방식을 이용하면 재료를 골고를 먹을 수 있으면서도 간단하게 먹을 수 있다. 물론 만드는 일은 꽤 번거롭지만 다음 날 도시락을 꺼내 먹을 때만 괜스레 흐뭇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당연히 맛있는 것은 말해 뭐 해.

그럼에도 한의사 선생님은 전체적인 식사량을 검사하셔야 하기 때문에 예쁘게 하나하나 담아서 놓으라고 매번 혼꾸녕을 내시지만 바쁜 직장인은 이 메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미 싸버린 음식의 양은 조절 자체가 불가능해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방법을 철저하게 지킨 식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건강하게 소식하면) 되잖아요? 라며 비굴한 표정으로 매번 변명해 본다.


도시락은 어느새 내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자 행복이 되었다. 하루 중 특별히 즐거운 일이 없더라도 내가 만든 도시락을 먹을 때면 웃음이 팍 터지는 즐거움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안하고 든든한 안정감으로 찾아온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나를 위한 음식은 나에게 최소한의 '보호'고 '위로'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누구도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외부 세계에서 조그만 도시락 통을 열어 나의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살짝 긴장이 풀어지곤 한다. 무장해제되는 느낌이랄까? 마치 잠시 영혼이 집에 다녀오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음식 하나로 이런 감정까지 받을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 매일 도시락을 싸는 나를 보면 "대단하다, 나는 절대 못해." 얘기하지만 가능하다면 매일의 도시락 루틴을 한 번은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직장 생활에 여유가 없고 마음까지 힘든 사람이라면 더더욱. 도시락을 싸고 먹는 행위 자체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 점심을 때우는 것, 경제적으로 점심을 먹는 것의 행위나 방법의 범주에서 나아가 '나 자신과 내 마음을 지키는' 정신적인 의미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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