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원대한 꿈이 있었다. 너무나 크고 멀어 절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
바로 집안에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것. 더 욕심을 부려 1+1을 바란다면 '내방'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사진 속엔 꼬맹이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이른 새벽 풍경. 꼬맹이는 구루마 위에 앉아 있다. 구루마의 손잡이는 누이로 보이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끌고 뒤엔 꼬맹이의 형으로 보이는 초등학생 정도의 남자아이가 밀고 있다. 구루마엔 이불이며 베개 낡은 냄비와 수저 그리고 가방과 학용품 등의 작고 작은 살림과 잡동사니들이 실려있다. 그런 짐들 위에 꼬맹이는 자리 잡고 있었다. 피난길의 한 장면 같은 아리송한 분위기. 분명 이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꼬맹이가 바로 나인 것은 분명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진에 대해 누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누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다. 그지? 그래서 너희에게 고마워. 속 안 썩이고 잘 커줘서."
색이 바래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흔하고 흔한 이야기처럼 꼬맹이에겐 이 모습은 흔하고 흔했다. 어떨 때는 아버지가 곤이 잠든 꼬맹이를 안고서 어디론가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떤 서류를 본 기억이 있다. 그 서류엔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가진 부분이 있었다. 전입신고와 전출신고로 가득 채운 줄들. 늘 다른 아이들보다 적게 가진 것에 속상해했던 꼬맹이에게도 이 많은 줄은 그리 반길만한 일이 아님은 분명했을 테다. 그렇게 자주 집을 옮겼지만 단칸방을 벗어난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아~ 딱! 한번 있다. 마당이 있는 집이었는데 단칸방옆에 아버지가 오랫동안 뚝딱뚝딱하더니 작은 방을 하나 더 만들었다. 주인집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대체로 그런 집들은 화장실은 밖에 있고 공용으로 쓴다. 그리고 그 화장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주로 사진 속 꼬맹이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 이유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름의 밥값과 주인집에게 잘 보이기 위한 고도의 전략. 지금도 회사 화장실이며 집화장실은 주로 내가 청소를 한다. 이런 걸 보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공동화장실은 발걸음이 많을수록 빨리 지저분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날씨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꼬맹이가 들어가 있을 때는 아무도 못 들어오는 공용이지만 개인적인 참 신기한 곳. 그래서 앞서 말한 꿈을 꾼 것일 수도 있겠다.
'집안에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내방이라 부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라고.
꿈같은 꿈. 절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이룬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군제대 후 독립을 하며 얻은 2층 연립주택 1층 뒷문에 딸린 자취방이었다. 보증금 500에 월세 5만 원이란 돈으로 대여한 공간. 화장실은 작은 부엌옆에 있었다. 혼자 자취를 하니 내방이라는 조건까지 덤으로 이룬 공간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결혼을 위해 18평 임대아파트로 입성을 했다. 벌레 없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보일러 기름을 따로 넣지 않아도 되며 겨울 한파에도 동파걱정을 안 해도 되는 튼튼하고 아늑한 성으로의 당당한 입성. 작은 거실에 방 2개 화장실 1개. 너무나 기뻤다. 양가 부모의 손을 일절 빌리지 않고 쟁취한 나만의 아니 우리만의 보금자리였으니까.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꿈은 서서히 기억에서 사라졌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째 딸을 만났다. 꼬물꼬물 거리던 아이는 어느샌가 뒤집었고, 기었고, 보행기를 잡고, 일어섰다. 급기야 보행기를 끌고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보행기를 잡은 체 집안에서 최장거리의 길을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18평 거실의 끝자락에서 부엌까지 가는 마라톤 42.195km에 버금가는 길. 그 힘든 길의 반환점에서 아이는 난관에 부딪혔다. 바로 거실의 미닫이 문턱이라는 장애물. 소형아파트는 거실 겸 방으로 쓰는 경우가 많아 거실에 미닫이 문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 턱을 만나 것이다. 아이는 잠시 멈춘 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넘을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적이 흐른 후 아이는 고개를 돌려 아빠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사 같은 미소를 띠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난 아직 목이 말라요. 더 나아가고 싶어요."
라는 말이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물론 아빠만의 상상의 나래일 것이다.
그날 저녁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이사 가자. 더 큰집으로.."
그렇게 방 3개 화장실 2개가 딸린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방문턱을 다 없애는 공사를 진행했다.
가끔 미래란 짐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달려온 삶을 뒤돌아 보며 충전할 때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 쌓아온 것들을 보며 자뻑이란 시간으로 충전을 한다.
"이 정도면 정말 잘 살지 않았나?"
"이 정도면 꿈을 초과달성한 것이 아닌가?"
"참 기특해. 특급 칭찬을 받아야 하겠어"
그리나 이내 덩치 큰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살아온 삶의 1/2이란 시간 동안 간직한 꿈을 이루었음에도 왜 기쁘지 않을까. 왜 이렇게 허전할까.
라틴어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라는 의미이다.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면 허무감을 느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맞다! 흔히 말하는 현타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나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나 보다. 이루어진 꿈은 일상이 되고 일상은 더 이상 두근거림을 주지 못한다. 나쁘다는 것은 아닌다. 다만 꼬맹이가 오랫동안 간직 한 나의 꿈은 결핍으로 인한 물질적이고 명사적인 꿈이었기에 가진 순간부터 그 매력의 빛을 잃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가 있었다. 꿈이란 가지기 전이 가장 찬란한 빛을 발휘하니까.
<역사의 쓸모>를 쓴 최태성작가는 꿈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꼬맹이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지금. 어른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꼬맹이는 새로운 꿈을 꾸려 한다. 이번엔 결핍에 따른 명사가 아닌 조금은 영적(?)이고 동사의 꿈을. 그 꿈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솔직히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충분히 어른이라 불릴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남은 여생을 즐겁고 열정적이게 해 줄 꿈의 형태가 조금씩 보이지 않을까란 확신(?)이 생기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