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니요도강 (仁淀川) 가다(加田)캠핑장~ 리버파크 캠프장
새벽 5시 깰 때까지 편히 푹 잤다. 텐트 지퍼를 내리고 마주한 아름다운 강변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변으로 왜가리나 황새 같은 큰 물새들이 느릿느릿 날다 내려앉아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다섯 시 반이 넘으니 한두 명 플라이낚시꾼들이 강변으로 왔다.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집 주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강변이 남아있는 것도 새벽 강에 발 담그고 무심히 낙싯줄을 던질 수 있는 평화로운 일상도.
아침은 빵을 구워 먹고 남은 밥은 도시락 싸서 일찍 떠나기로 했다. 8시 짐 정리 모두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36번 쇼류지(靑龍寺)까지는 강변 야영장에서 직선거리로 25km가량 떨어져 있다. 어제 저녁에 달려온 39번 강변 도로를 거슬러가 바다를 건너야 한다. 출근 차량이 분주한 도로를 한 시간 가량 달려 토사(土佐) 시내에 도달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자 거리는 일 순간 고요해졌다. 선샤인 마트가 막 문을 열고 있길래 들러서 사이클 패딩 바지가 아무래도 민망해서 덧입을 헐렁한 7부 바지(990엔)를 하나 샀다. 사찰에서는 사타구니가 돌출된 라이딩복을 입고 돌아다니기가 아무래도 민망했다. 오렌지 주스 두 팩(180엔)을 사 패니어에 넣고 쇼핑센터 앞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36번 쇼류지(靑龍寺)는 마치 안면도처럼 시코쿠 섬에 나란히 돌출한 반도에 있다. 오른쪽 끝은 섬에 붙어 있지만 언뜻 보기에 시코쿠 본 섬과 내해를 사이에 둔 섬처럼 보이는 곳이다. 바다를 건너는 해안까지 두 개의 길을 두고 잠시 망설였다. 조금 가깝지만 산을 넘어가야 할 것 같은 39번 도로. 또 하나는 좌측 강변을 따라 해안을 돌아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 282번 도로. 도저히 산을 넘을 자신이 없어 10km가량 돌아가더라도 강변과 해안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여행 중에 가장 자주 만나는 편의점이 로손이다. 대개는 차량 수십 대는 족히 주차할 수 있을 널찍한 주차장을 가지고 있다. 농촌지역이라 그런지 동네마다 동전을 넣고 가동하는 무인 정미기가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쌀을 찧어 먹으면 편리할 것 같았다. 길목마다 서 있는 자동판매기, 무인세탁소 코인란도리와 코인 정미기. 일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광경이지 싶었다.
우사(宇佐) 항을 지나 다시 바다를 가로지르는 우사 대교가 나왔다. 이번에는 비교적 건널 만했다. 다리를 다 건넌 지점에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순례자를 만났다. 왜 되걸어오느냐고 물으니 진행 방향으로 반도를 빠져나가는 요코나미(横浪) 스카이라인 쪽은 경사가 가팔라서 되돌아나와 해안길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이것은 내게도 중요한 정보였다.
터널을 지나 좌측 해변 가까이 36번 쇼류지(靑龍寺)가 있다. 이 절은 코보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던 당시 장안(長安)의 청룡사(靑龍寺)에서 중국 진언종의 창시자 혜과(惠果746~805)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고 자신도 일본 밀교의 창시자 되었다. 그는 장안에 있던 청룡사와 같은 절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에 바다 건너로 '독고저(밀교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던졌는데 훗날 이 자리에서 발견돼 부동명왕을 조각하고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부동명왕이 바다에서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어 선원들이 이곳에 들러 참배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170 계단을 올라서면 본당이 있었다.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두 분 형님의 명복을 빌었다.
10시 50분 다시 출발했다. 길에서 만난 순례자가 일러준 대로 다시 바닷가로 돌아 나와 다리를 건너 내해를 끼고 달리기로 했다. 거대한 종려나무들이 늘어선 해안길. 시코쿠 순례를 떠나겠다고 하니 친구인 박 모 시인이 '두멍물 같은 시코쿠 바닷길을 걷겠구나' 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두멍물. 큰 독 속에 담긴 물 같다는 그 묘사가 딱 이 지역에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비릿한 갯내음과 아무렇게나 바닷가에 널어놓은 어구들. 인적조차 드문 적막한 바닷가. 30km가량을 침묵 속에 달린 뒤 시가지를 만날 수 있다. 56번 도로를 만날 때까지는 물결조차 멈춘 내해의 진공 같은 적막을 지나야 했다.
낮 12시 특색 없는 사이렌 소리 시보가 울렸다. 흐릿한 하늘 뭉근하게 달궈진 도로가 맥 빠지게 했다. 고갯길 초입에서 선 채로 토스트와 귤을 꺼내 먹었다. 길가 짚으로 멀칭 한 밭이랑에서 아주머니가 일을 하고 있었다. 비닐이 아닌 짚으로 이랑을 덮어놓은 광경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터널을 통과하고 고갯길을 내려서다 스미토모 시멘트공장 직전에 있는 휴식소에서 나그네들이 남겨놓은 기록들을 읽어보았다. 프랑스 사람이 짤막한 영어로 남겨둔 기록도 있었다. 휴식소 곁 주택에서 화장실도 빌려주고 물도 받아갈 수 있게 해 줘 감사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짤막한 일본어로 야마시타상이 궁금해 안부를 묻는 내용을 남겼다.
"최근 이 지역에 신흥종교를 권유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을 대응하는 데에는 무시하는 게 제일"이라는 안내문이 흥미로웠다. 신흥종교? 무슨 말일까?
오후 1시경 다시 출발. 조용한 스사키(須崎)시 시가지를 통과했다. 또다시 비가 뿌렸다. 비상식량으로 모스햄버거를 한 개(320엔) 사서 랙 팩에 넣었다. 비가 내리니 사기도 떨어지고 기운도 빠졌다. 스사키 시내를 벗어나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두꺼운 안경을 낀 지식인풍의 사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을 싫어하지 않는데 한국인들은 일본을 싫어하는 것 같다." 2010년 무렵 일본에 왔을 때 배용준이나 대장금에 열광하며 한국에 과장된 호감을 드러내던 것을 떠올리면 이번에는 확연히 냉랭해진 것이 느껴졌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아무래도 역사 문제가 있으니까 영향이 있겠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별로 그렇지 않아요.개인 취향에 따라 일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아요."
그는 80리터 대형 배낭을 메고 있었다. 20일가량 걸었을 텐데 지친 기색도 없었다. 일본인이 한국을 싫어한다면 단순히 기호의 문제겠지만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그럴 만한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과거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진지한 반성도 사과도 역사를 청산하려는 노력도 없는 일본을 아무 생각없이 좋다고만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해안길을 벗어나면서 핸로미치 스티커는 56번 국도를 벗어나 마을 안쪽으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불길하게도 장벽처럼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단은 차도를 벗어난 조용한 시골마을 길을 만족스러워하며 10 km 가량 달렸다. 마을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가 차를 세우더니 말을 건다. "어디 가고 있소? " "이와모토지(岩本寺)에 갑니다." "여기는 걷는 순례 길이야. 계단이 많은 산이라 자전거는 갈 수 없어." 벌써 국도를 벗어나 10km는 달려온 상황이라 기가 막혔다. "우와! 그래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빠꾸 해서 56번 도로(공중에 높이 떠 있는 고가도로를 가리키며)로 가라. " "이런 제길 제길... 우라질..." 혼자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으며 자전거를 돌렸다. 잠자리를 정하지 못한 채 또 날이 저물고 있었다.
다시 56번 국도로 돌아와 한계령처럼 아스라이 산 위로 뻗어있는 오르막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패달을 꾹꾹 눌러 밟았다. 금방 숨이 가빠오고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땀도 비오듯 쏟아졌다. 걱정이 돼 멈춰 서서 정제 식염포도당을 몇 알 먹고 물도 마셨다. 대관령보다도 두 배는 길게 여겨지는 오르막이었다. 저속차량 전용 오르막 차선이 나타나면 아, 이제 오르막이 끝나나 보다 기대를 품지만 그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그러나 끝내 고갯마루에 도달했다. 한 바퀴 바퀴 밟아온 길들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였다. 그때 반대차선에서 새카맣게 그을은 젊은이가 자전거에 패니어를 주렁주렁 매달고... 내려가면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새카만 얼굴에 유난히 흰 이가 두드러져 만화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원할 것 같아도 끝나지 않는 고난은 없다. 비록 고갯길을 올라왔을 뿐이지만 견뎌낸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때 중년 남자와 화장이 짙은 할머니가 환히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몇 마디 하다가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니 유관순 조용필 자기들이 아는 한국사람들 이름을 모두 나열하며 이 사람들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유난스러운 친밀감을 표하며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동행한 여성이 부인이 아니라 '거루 후렌도'라고 했다. 누가 물어봤나? 그냥 비실비실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높은 고개를 오른 감격을 혼자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수다를 한동안 견뎌야 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은 고치 시 남묘호랑개교 소속이라고 했다. 아, 휴식소에 적혀 있던 요주의 신흥종교 사람들이 이들이구나 싶었다. 내게 신흥종교들에 대한 편견은 없다. 정통과 이단을 구분도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종교나 신념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마땅한 책임을 물으면 되지 될 뿐. 사실 종교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하는 쪽은 영향력이 큰 대형교회나 사찰에 다니는 사람들쪽 아닐까.
최인석의 소설 '세상의 다리 밑'에는 여호와의 증인인 주인공이 겪는 고통스런 현실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구치소에서 만나본 여호와의 증인들, 신혼 때 이웃에 살던 부부도 더 할 수 없이 선량한 사람 들이었다. 자신의 양심을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그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은 과연 온당한가? 그러나 침묵 속에 고독한 이어온 순례길 고갯마루에서 만난 일본 천리교 (남묘호랑개교) 사람들의 떠들썩한 선교는 외면하고 싶었다.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야단스런 환대는 결국 선교를 위한 것이었군?
서둘러 길을 떠나려는 내게 그들은 "남묘호랑개교는 세상의 가장 가치 있고 평화로운 상태로 당신을 이끌어 준다"라고 했다. 평화로운 상태. 진언을 외거나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번뇌를 끊을 수만 있다면. 매 순간 격랑이 이는 이 마음을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거의 울면서 올랐던 높이에 비해 내리막은 허망할 정도로 짧았다. 중력은 늘 우리를 낮은 곳으로 옮겨준다.
미치노에키에 도착하니 이미 다섯 시가 다 되었다. 37번 사찰 이와모토지 (岩本寺)가 머지않은 시만토 쵸( 四万十町) 마을 대형할인점 마루나가에서 장을 봤다. 단백질을 보충해야 한다는 아내의 충고대로 일본산 소고기 200g(780엔)을 샀다. 반값도 안 되는 미국산 소고기도 있었지만 외면했다. 목표로 정한 이와모토지 뒤 20km 지점 야영장까지 갈 수 있을지 불안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56번 국도에서 우회전 해 1km 남짓 들어간 곳에 이와모토지가 있었다.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절을 나섰다. 절 앞 처마 밑에서 도보 순례자 젊은이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도쿄의 신주쿠에 산다는 그는 내게 왜 왔냐고 물었다. '조용히 생각도 하고 삶을 돌아보기도 하려고....' 떠듬떠듬 답을 하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핸로들이 다 그렇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김기덕 감독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고 했더니 자기도 안다고 했다. 나도 일본 영화 중에서 '카모메 식당'이나 '굿 바이'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니 씩 웃으면서 그런 영화도 일본에서는 인기가 없다고 했다. 어디서 잘 거냐고 물으니 자기는 5km 떨어진 민슈쿠(民宿) 예약을 해두었다며 내게 어디서 잘 거냐고 물었다. ' 15km 떨어진 캠핑장에 간다'라고 하니 '아, 그래요? 잘 가요. 함 내요.' 이렇게 헤어졌다.
날도 어두워지고 비도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캠핑장을 향해 바쁘게 달렸다. 순례길 방향과 반대 쪽이라 민숙이나 여관 같은 게 있을 가능성도 낮다. 다행히 그 방향에 미치노에키가 있다고 표시돼 있으니 야영장을 못 찾으면 휴게소 화장실 옆에서 야영을 해도 되겠다 싶었다. 이와모토지에서 내륙 쪽으로 뻗은 시만토(四万十) 강을 따라 뻗어 있는 381번 도로. 날이 완전히 저문 뒤 리버파크 야영장에 도착했다. 라이트를 켜고 강변 숲길을 따라 들어갔다. 사람의 기척은 없지만 텐트도 한동 세워져 있어 안심이 되었다. 바베큐장 안에 텐트를 쳤다. 사람은 없지만 관리동에 코인샤워장이 있었다. 200엔을 넣으면 더운물이 3분간 나오게 돼 있어 샤워를 했다. 저녁은 헤드램프를 켜고 소고기를 구워 여유 있게 먹었다. 적막한 강변 숲 속이지만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두려움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감점이다 싶었다.
#10- 니요도 강 (仁淀川) 가다(加田) 캠핑장~ 이와모토지岩本寺 뒤 리버파크 캠프장
운행거리: 126 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