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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08. 2020

11. 아시즈리 곶, 섬의 남단

#11  리버파크 ~아시즈리 곶 (足摺岬)

5시경 잠에서 깨 잠시게으름을 피우다가 야영장 산책을 했다. 관리동은 야영장 위쪽에 있었다. 사람이 없어 캠핑장 이용료는 낼 방법이 없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있었다. 화장실에도 '나 하나니까 하고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면 지상에 1억 개의 쓰레기가 버려지는 것' 이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100엔 동전을 넣으면 3분 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코인샤워장을 이용하는 데는 약간의 기획이 필요했다. 재빨리 머리와 온 몸에 비누칠을 하고 헹궈내면 딱 3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저녁에도 아침에도 샤워를 했다.
 
며칠 전 슈퍼에서 산 일본 미소 라면을 끓였는데 맛은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짐을 다 꾸리니 아침 8시. 햇살도 화사하고 몸도 마음도 상쾌했다. 오늘의 목표는 시코쿠 섬 최남단 아시지리곶(足摺岬)에 있는 38번 절 곤고후쿠지(金剛福寺). 직선거리로만 80km 이상이다.  하루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야영장에 오느라 순례길에서 섬 안쪽으로 20km 이상 들어와 있기 때문에 다시 해안 쪽으로 나가기보다  439번 도로로 가로질러서 시만토 시를 거쳐 토사시미즈까지 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걱정은 439번 지방도로가 산중으로 나 있다는 점이다. 경사가 완만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야영장에서도 충전 콘센트는 찾을 수 없었기에 스마트폰을 보조 배터리에 충전하면서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달려야 했다.

어쩐지 너무도 순조롭다 싶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무엇인가에 씌었는지 자전거 변속기 와이어가 늘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기어가 풀어져 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순간 착각을 하고  조절 나사를 돌려서 조였다.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손댄 것이다. 야영장을 빠져나올 때부터 기어가 헛돌며 미끄러졌다. 부자연스럽게 덜거덕 거리며 439번 도로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계곡을 끼고 완만하게 오르막이 이어졌다. 갈림길에서 방향이 혼동해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 지도상에 이치노마타계곡(一の又渓谷) 온천이 오른쪽에 있어야 하는데 표지판은 왼편에 있었다. 고갯마루에 있는 터널은 '이웃의 토토로'에서 메이네 가족이 시골로 이사할 때 통과한 뒤 뭔가 신비롭게 원시적인 자연 속으로 들어가던 장면이  떠올리게 했다. 군데군데 흙과 모래가 쌓여있고 부러진 나뭇가지들. 거의 통행이 없는 길 같았다. 해발 600m 지점까지 끌다 타다를 반복하면서 또다시 등산을 했다.

힘겹기는 했지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묵묵히 땀을 흘렸다. 그런데 앞으로 나가는데도 GPS가 가리키는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신호가 안 잡히는 것인가?  고개 마루까지 올랐다가 내리막길을 한참 달렸다. 지나온 길은 정규 도로가 아니라 임도(林道)였던 것 같다. 산사태로 무너진 산을 복원하는  공사장과 오가는 덤프트럭들을 만났다.

산을 다 내려와서야  드디어 마을을 만났다. 길가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다.  일본말도 서툰 데다 할아버지의 사투리도 심해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산에서 내려서면 시만토 시(四万十市)를 거쳐 아시즈리 곶 (足摺岬)으로 바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산을 돌다 내려와 방향이 헷갈린 모양이었다. 생각과 반대로  15km 가면 439번 도로를 만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진로와 무관하게 도로를 오른쪽으로 벗어나 산 하나를 괜스레 올랐다가 원점에 가까운 지점으로 하산을 했다는 말이다. 중력의 힘으로 내리막길에서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평지에 오니 밟아도 속도가 나지 않고 기어 변속도 거의 되지 않았다. 당시의 내 실력으로는 스스로 해결할 길도 막연했다. 덜그럭 덜그럭 소음을 내면서 느린 속도로 시만토 시(四万十 市)까지 달렸다.

12 시경 가까스로 시만토 시(四万十市)에 도착했다.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는 차분한 시가지. 우선 아케이드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별로 넓지 않은 카페테리아. 진열된 반찬을 골라서 가면 선택한 만큼 값을 치르는 곳이었다. 돈가스와 반찬 한두 개와  후식으로 커피까지 합해서 600엔.

밥을 먹고 텐진 바쓰라는 자전거숍에 가서 기어 변속기 텐션을 조절했다. 5분이나 걸렸을까. 기어 와이어를 풀고  천천히 조여가면서 장력을 조절했다. 그렇지 저렇게 하면 되는 거였지. 미케닉의 손길에 따라 페달을 돌릴 때마다 기어가 기분 좋게 착착 변속이 되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어떤 안정감이 차올랐다. 수리비는 1500엔. 시운전을 해보니 불구 상태에서 벗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여전히 38번 절 곤고 후쿠지(金剛福寺)까지는 아직 50km 정도 남았다. 편의점에 들러 우유를 사서 패니어에 넣고  2시쯤 다시 출발했다.


터널을 건너 해안도로로 막 접어드는 지점에서  걸어가는 순례자  한 분을 만났다. 뜻밖에도 그는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36번 쇼류지(靑龍寺)를 향해 우사(宇佐) 대교를 건너면서 왜 반대편  요코나미(横浪) 스카이라인 쪽으로 가지 않고 돌아 나오느냐고  물어본 그 사람이었다. 내가 이와모토지를 지나 야영을 하러 내륙을 헤매다 돌아 나오는 동안 그는 해안길을 걸어서 벌써 이곳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꾸준히 걷는 일은 이처럼 대단하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간다면 우리 삶도 목표한 어떤 지점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고개를 오르내리락 하다 보니 이미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또 마음이 바빠졌다. 또다시  방향을 잘못 택해 왼쪽 해안가로 접어들지 않고  우측으로 빠지고 말았다. 도보 순례자가 오르막 20km 라며 피해 가라던 그 길을 통해 도사 시미즈 (土佐清水) 시내까지 달렸다. 항구를 끼고 있는 시내에는 호텔도 여럿 보였다. 운행을 중지하고 여기서 묶을까 망설이다가 그냥 통과했다.

 

아시즈리 곶(足摺岬)을  꼭짓점으로 놓고 볼 때 왼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접근하는 도로를 따라 어둠이 짙어가는 도로를 달렸다. 일단 38번 곤고후쿠지(金剛福寺)까지는 가보자... 어딘가 잘 곳이 있겠지.

절은 이미 닫혀 있었다. 절 앞에 드넓은 주차장과 잘 관리된 화장실도 있었다. 잘 곳을 못 구하면  이 옆에 텐트를 쳐도 되겠다 생각했다. 전망대가 있는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니 장쾌한 해안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태평양이었다.

안내지도에 표시된유스호스텔을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는 잘 모르겠다면서 지나가는 승용차를 세우더니 물어봐 주었다. 과하다 싶게 친절한 이들이 많다. 차를 몰고 가던 아주머니는 안내할 테니 자기 차를 따라오라고 했다. 마을 안에 언뜻 보기에 가정집과 구분이 안 되는 주택이  유스호스텔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타카나로 유스호스텔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러나 예약 없이 숙박이 어렵다고 했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안내해준 아주머니는 내가 유스호스텔에서 나올 때까지 차의 미등을 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체크인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럼 자기를 따라오라며 마을 안쪽에 있는 민박집 '호토'로 데리고 가 주인 부부 에게  흥정도 대신해주었다. 우락부락한 인상이지만 마음씨 좋게 생긴 주인아저씨가 들어오라고 했다. 일박에 얼마냐고  물으니 6천5백 엔이라고 했다. 군말없이 지불하려고 하니 내 표정을 보면서  ' 왜? 비싸? 그럼 6천 엔만 받을게' 했다. 그냥 마주 웃을 수밖에.

주인아저씨 이름은 기타다 히로시. 식당에는 이미 독일인 미하엘(37세)과  일본인 나카무라(中村 65세)씨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게 다다미방을 안내하고는 빨랫감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하는데 각각 100엔씩이고,  저녁 식사가 늦었으니 밥을 먼저 먹고 목욕을 하라며 욕실위치를 알려주었다.


저녁상은  환상적이었다. 큰 고등어를 통째 회 떠 놓고 세 사람이 나눠 먹게 했다. 생선을 넣고 맑게 끓인 국과 생선구이, 샐러드. 일본에 와서 만난 가장 화려한 밥상이었다. 핸드폰도 카메라도 모두 방전돼 사진은 찍지 못했다. 맥주도 한 병 시켰다. 미하엘은 나보다 일본어 실력이 훨씬 좋았다. 독일 기업 일본 지사에 2년째 근무하고 있는데, 한 달간 휴가를 내 도보순례를 했고 이제 휴가가 끝나 내일 도쿄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내게 왜 순례를 하냐? 이전에 일본에 와 본 적이 있냐 물었다. 대여섯 번 와봤다고 하니 그게 언제 언제 인지 꼬치꼬치  다 물어보았다. 독일 사람 성격이 그런 것인지 그의 개성인지 모르겠다.

주인장 기타다 히로시는 내게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박근혜 대통령을 좋아한다 너도 좋아하냐? 저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왜?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서? 누구의 딸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말과 생각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니까 '호오... 그래요. 나는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박근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했다. 또 하나는 기타조센(北朝鮮)에 대한 이야기. 기타 조센 때문에 걱정이 크다. 한국도 걱정이 많겠다. 너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냐. 북한도 같은 민족이다. 이런 대결 상황이 해소되고 서로 사이좋게 오고 가고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사람 역시 북에 대해 화끈한 적대적 발언을 기대했지만 실망한 표정이 얼핏 스쳤다. 일본 언론의 시각도 그런 것이겠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가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니 일본도 무장을 해야 한다는 식의 여론몰이.
일본어 실력이 짧기도 하고 길게 말해봐야 생각의 차이만 확인할 것 같아서 나는 그 뒤로 입을 닫고 입맛이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맥주도 한 병 시켜서 천천히 마셨다. 분단국가의 현실이 새삼 서글프게 느껴졌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쏘아 올렸다는 인공위성이 아니라 후쿠시마에서 폭발한 핵발전소 사고. 거기서 다량 분출되고 있는 방사성 물질들이 아닌가. 그리고 아시아에서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고통을 준 나라가 어디였나. 
목욕을 하고 다다미방에 돌아와 조금은 울적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잠자리를 쾌적하고 방과 욕실은 깨끗했다. 밥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주인집 부부도 친절했고... 그런데도 울적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11- 리버파크 - 아시즈리 곶 (足摺岬), 38번 절 곤고후쿠지(金剛福寺) 인근 호토 민박

운행 95.78km

지출: 점심 600엔  자전거 수리 1500엔, 우유 150엔, 음료수 150엔,   민박집 60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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