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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09. 2020

12. 은퇴하면 온전한 자기를 살게 될까?

#12 - 아시즈리 핫토민박 ~스쿠모 오시마 야영장

간밤에 운행 기록도 못 하고 골아떨어졌다. 5시에 잠이 깨 어제 운행에 대한 기록을 하고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주인아저씨가 웃통을 벗은 채 의자에 앉아 아사히신문을 읽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잠결에 깨어 보면 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계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일본 신문들은 여전히 세로짜기에 컬러 인쇄도 별로 없다. 여전히 종이 신문의 영향력이 센 것 같았다.
매체 환경의 변화는 우리나라가 무척 빠른 것 같다. 종이 신문이 몰락과 SNS 등 뉴미디어의 확대. 언론에 지사적 양식을 기대하는 이들은 이제 거의 없는 것 같다. 또 하고자만 하면 누구나 개인 매체를 발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기타다 상이 힐끗 인사를 하더니 아침은 여섯 시 반에 먹는다고 말해주었다. 

야영을 했다면 아침밥을 준비할 시간이지만 느긋하게 마을을 산책했다. 아침상은 저녁에 비해 소박했지만 흡족했다. 생선구이, 생선과 두부를 넣고 맑게 끓인 국, 김과 무즙, 단무지, 그리고 날 계란. 날계란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잠시 망설였는데 나카무라 씨가 밥 위에 탁 깨트려서 간장을 뿌려 비벼 후루룩 먹길래 따라 했다. '심야식당'에서 간장에 비빈 '버터라이스'가 일본 사람들 소울푸드라던 게 떠올랐다. 우리도 어린 시절 마가린과 간장에 밥을 비벼 먹곤 했다. 헤어지기 전에 나카무라(65세)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하일은 이미 길을 떠난 모양이었다.


39번 절 엔코지(延光寺)까지는 기필코 최단거리로 가리라. 직선거리로만 60km다. 실제 주행은 100km 가까이 하게 될 것 같았다. 기타다 상이 약도를 가지고 오더니 오르막 없는 길을 그려가면서 알려준다. 오른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가  우회전해서 토사시미즈(土佐清水) 가는 길을 택하라고. 그래야 오르막이 덜하다고. 그 마음이 고맙다. 기타상이 일러준 길의 핵심은 소로가와(宗呂川) 강을 따라 내륙으로 달려 스쿠모에 도착하는 것이다. 실제로 강을 따라 달리는 길은 내내 평탄했고 고요했다.


7시 45분 민박집을 나서서 곤고후쿠지(金剛福寺)에 들러 참배를 하고 납경을 받았다. 코우보오 대사가 823년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라 경내는 고즈넉했다.


태평양을 향해 탁 트여있을 아시즈리곶에서 바다를 보았다. 우리 동해의 수평선도 광활하지만 훨씬 아득한 느낌이다. 바다를 등지고 나카하마 만지로(中浜万次郞, 죤 만지로)라는 사내의 동상이 서 있다. 이 지역 사람인 만지로는 14살 때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무인도에 표류했고 미국 포경선 존하울랜드호 선장에게 발견돼 미국에서 가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근대화에 기여를 한 인물이라고 한다. 어쩌다 보니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이 된 만지로는 24세 때까지 영어, 항해술, 측량술, 포경술 등을 배우고 돌아와 1852년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막부 치하 일본에 근대 학문을 소개했다. 그는 도쿄대 전신이라는 개성학교(開城學校) 교수가 되어 영어를 가르치다 71살 때 죽었다고 한다. 소설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이 일본의 근대를 앞당긴 것이다. 


섬의 끝. 관세음보살이 사는 보타낙가(普陀洛迦)에 가장 가깝다는 전설의 아시즈리 곶(足摺岬).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곳 절벽에 와서 투신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것도 어쩌면 보타낙가에 이르는 길일지 모르겠다. 부산 영도 태종대의 절벽이 떠올랐다. 사는 일이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스무 살 무렵  몇 걸음만 곧장 걸어가면 수직 절벽 아래 흰 파도가 포말로 부서지는 졀벽을 보면서  삶과 죽음이 이렇게 맞붙어 있구나 싶어 괜스레 손에 땀이 고이던 기억.


민박집 인근에 있는 만지로 족욕탕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기에 들어가 보았다. 나카하마 만지로.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계단식으로 앉아 족욕을 할 수 있게 해 놓은 족탕은 일부러 찾아가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토사시미즈 시(土佐清水市)를 향해 해안도로에서 우회전 해 달렸다. 시내 편의점 쓰리에프에 들러 카페오레 5백 밀리(110엔)와 쵸코 빵 (152엔)을 샀다. 점원이 녹차 한 병을 오세타이(お接待)라며 꺼내 준다. 쓰리에프 편의점은 순례자들에게 그렇게 하기로 정해 놓은 모양이었다. 일 년에 15만 명 이상 순례자가 온다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가게 앞에서 고등학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도 강남스타일의 한 구절을 흥얼거리며 말춤 훙내를 냈다. 잠시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대다 보니 즐거웠다. 편의점 인근 우체국에서 간밤에 가족들 앞으로 써둔 엽서를 발송했다.  


격포 채석강을 연상하게 하는 해변과 터널을 지난 뒤 기타다 상이 알려준 28번 현도로 우회전, 소로가와(宗呂川) 강을 따라 달렸다. 인적조차 드문 고요한 길이었다.
작은 오르내리막과 터널을  지난 뒤 스쿠모 시(宿毛市)까지 18km는  줄곧 내리막이었다. 오후 2시경 스쿠모에 거의 도달한 지점에 있는 스쿠모 서니사이드파크  미찌노에키에서  도시락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찬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김에 싸서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다.

 


이 미치노에키 한 쪽 끝에 남아 있는 목조 누각(하마 다니 도마리야)은 고지현 서부지역에 남아 있는 전통과 관련된 시설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었다. 마을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마츠리 준비 등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할 일을 교육시키는 장소라고 했다.


한동안 조용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다시 해안도로인 321번 도로와 만나 스쿠모시에 들어설 무렵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고 날도 궂어졌다. 39번 사찰 엔코지(延光寺)는 강을 건넌 뒤 우회전해서 8.5km 정도 들어가야 한다. 맞바람이 거세져 속도가 나질 않았다.

잠자리로 예정한  오시마(大島) 휴식의 광장(憩いの広場) 캠핑장은 엔코지 반대쪽이라 갔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거센 역풍을 뚫고 엔코지에 도착했다.코보 대사가 지팡이로 땅을 치니까 샘이 솟아나 물 부족으로 고통받던 주민들을 구원했고 붉은 거북이가 용궁에서 범종을 가지고 왔다는 전설이 있는 절이다. 


참배를 하고 절을 나오다 은퇴한 회사원이라는 순례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어떤 의무감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어릴 시절부터 각별하게 지내는 친구 S는 나보다 두 해 전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앞 둔 내게 '결혼은  어떤 점에서 자기로서의 자기는 끝'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일면 수긍했고 일면 부정했다. 결혼을 통해 나로부터 새로운 가족이 출발하는 것이니 이전의 나는 소멸하는 것일 수도 확장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고 사느라 골몰하다가 아이들이 스스로 제 앞가림하게 되면  우리는 늙고 소멸해간다. 누구라서 그것을 피해 갈 수 있으랴.


어쨌든 오늘 목표로 한 순례는 모두 마쳤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스쿠모시로 달렸다. 엘마트라는 편의점에 들어설 즈음에는 비가 너무 쏟아져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여기서 장을 봤다. 고등어 통조림(147엔) 즉석카레 288 (엔) 식빵 (116엔)을 산 뒤  아르바이트생에게  오시마에 캠핑장이 있고 사용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친구도 기다렸다는 듯이 인근 약도를 꺼내더니 '네 캠핑 가능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바다 쪽으로 가신 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시면 휴식의 광장에 갈 수 있고, 거기서 캠핑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똘똘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러더니 약도는 가지고 가라고 했다. 다들 무척 친절하다.
오시마(大島)는 이름과는 달리 스쿠모시 앞바다에 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이었다. 비를 맞으며 언덕을 올라선 뒤 국민호텔(國民宿舍)을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바닷가에 공원이 있었다. 국민숙사라는 대중 호텔들도 대개 일박에 6천5백 원에 저녁과 아침을 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주말이라 호텔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야영을 하기로 했으니 그냥 지나쳤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 텐트를 쳐도 될지 조금 망설여졌다. 비는 계속 주룩주룩 내렸다. 관리동이랄 수 있는 건물 안에는 코인샤워장과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다만, 경찰관이 이곳을 관리하고 있으며 건물 안에서 화기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등 주의 사항은 조금 고압적인 어투가 느껴졌다.
아무튼 건물 뒤 바닷가 쪽 처마 밑에 텐트를 치고 동전을 넣고 더운물 샤워를 했다. 다행히 콘센트를 찾아 카메라 등 전기기구를 충전시키고 저녁을 지어먹었다.


빗소리와 차분하게 밀려오는 파도소리. 오늘도 캠핑장에는 나 혼자다. 이렇게 또 밤이 깊어가고 있다.


#12 - 아시즈리 핫토민박 ~스쿠모 오시마 야영장

운행거리  81.57 km

지출 : 쓰리에스 262 (카페오레 110, 쵸코 빵 152)  미치니에 키 꼬치구이 100엔,  스쿠모 편의점 엘마트 551엔(카레 288 고등어 통조림 147 식빵 116)  납경 2회 600엔  합계 1513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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