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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09. 2020

13. 살아가며 고통을 마주하고 견디는 숙명

#13- 스쿠모 오시마 ~ 미나미 레구(南レク)오토캠핑장


빗소리, 가볍게 출렁이는 파도, 텐트 플라이가 바람에 서걱대는 소리. 가수면 상태에서 의식 속으로 밀려드는 소리를 들으며 밤새 잠을 설쳤다. 4시부터는 고깃배들이 출항하며 울리는 뱃고동과 엔진 소리 때문에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엎드린 채 집에 보낼 엽서를 썼다. 첫날 산 열 장의 엽서를 두 딸과 아내에게 틈틈이 써서 보냈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열 장 가운데 두어 장은 미처 도착하기 전이고 대개는 식탁 유리판 아래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텐트를 걷고 짐을 꾸렸지만  비가 제법 내리고 있어 처마 밑에서 비가 긋기를 기다렸다. 비가 내리는데도 여섯 시도 되기 전에 주민들이 빗속에 산책을 나왔다. 나카야마(62세)씨와 이웃에 사는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한국사람이라고 하니 이분들이 조금 흥분한 상태가 되어 말이 많아졌다. 나카야마 씨도 친구도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일본은 이혼이 많다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해주었다. 저 앞에 있는 섬까지 간조 때는 걸어갈 수 있어요.  한국에 진도도 그런 데가 있다면서요?  어? 진도를 아시네요?  텔레비전 방송에서 봤어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카야마 씨가 빗속으로 달려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세 개 뽑아 오더니 함께 마시자고 했다. 야영을 한 데다 비까지 내려 찬 커피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고맙게 마셨다.

그들은  여기가 고향이고 아침마다 산보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으니 이제 은퇴했다고. 고양이 한 마리와 살며 새벽같이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지만 딱히 출근할 곳이 없다고 했다. 역시 쓸쓸한 얘기다. 자전거 순례 초반에 만났던 야마시타상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이혼하고 장성한 자식들은 이미 품을 떠난 상태에서 시코쿠 순례를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우리가 자랄  때 당연시되던 남성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쓸쓸하고 외로운 사내들이 남았을 뿐이다. 비판받을 소리겠지만 솔직한 마음은 남성에게는 내게 익숙한 남성이 남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남성들이 피부 관리와 미용에는 관심이 높지만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하거나 자기 말이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태도는 부족한 것 같아 무엇인가 허전하다. 남성에게도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성역할이 요구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변화에 걸맞게 이제 남자아이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독립과 자활에 필요한 마음과 기술을 더 습득시켜야 할 것 같다.


7시 50분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아 출발했다. 어제 넘어온 국민호텔 (국민숙사國民宿舍 야자椰子) 앞 고개 쪽이  아니라 오른쪽 해안길로 섬을 빠져나왔다. 대나무보다 큰 갈대들이 비바람에 휘어져 길을 막고 있었다. 먹을거리들이 줄어든 탓에 짐이 많이 가벼워졌다. 비가 내리고 있지만 잘하면 80km가량 떨어진 기타 우와지마(北宇和島)에 있는  41번 류코지(龍光寺) 42번부츠모쿠지(仏木寺) 까지 순례하고 인근 해변 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요일인 데다 비까지 내려 수쿠모 시내는 한산했다. 우선은 26~7km가량 떨어진 미나미우와(南宇和)군의 40번 사찰 간지자이지(観自在寺)까지 가야 한다. 길은 해안을 따라 나 있는 7번 지방도로와  내륙으로 나 있는 56번 국도 어디를 선택할지 잠시 망설이다. 7번 도로를 택했다. 그러나 잘못한 결정이었다. 해안가 낙타등 같은 오르막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8시 50분경 드디어 에히메 현(愛媛県)으로 접어들었다. 고치 현(高知県)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처음에는 완만한 경사였다. 비도 거의 그쳐 가고 있었다. 언덕위에서양식장이 펼쳐진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우리 남해안의 풍경들과 비슷했다. 곳곳에 '어업을 지키는 숲'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바다와 숲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길은 어느새 가파른 등산 코스로 바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맥이 빠졌다. 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었다. 길에는 칡넝쿨이 뒤덮여 있고 인적마저 끊긴 길을 오전 내내 올라야 했다. 아침을 좀 더 배불리 먹지 않은 것, 7번 해안 도로를  택한 것을 내내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나간 일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오후 한 시쯤 지겹게 올라온 고도를 단 몇 분  동안의 내리막길로 탕진하고 56번 국도를 만났다. 그렇다고 뭐 대단히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길가에 이 지역 특산물인 귤밭들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었다.


아침에 서울에서 온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몇 달 전 전,  예전 일하던 단체 동료의 아들이 갑자기 목숨을 끊었다. 인물도 좋고 가끔 만나면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 싶게 속 깊어 보이던 아이였는데 그랬다. 그 아이의 49재가 오늘인데 참석할 수 있는지  다른 동료가 연락을 한 것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이었다. 상가에 가서도 뭐라고 변변히 위로의 말도 건네지도 못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갈 수 없는 사정을 짧게 설명하고 순례를 하며 들르게 되는 절에서 그 아이의 명복을 빌겠다고 답을 했다.


고개를 내려선 뒤 만나는 미나미우와(南宇和)시의 풍경은 차분했다. 40번 간지자이지(観自在寺)에 가서 한국에서 49재를 치르고 있을 그 아이와 선량하기 그지없는 그의 부모들을 위해 향을 사르고 합장을 했다. 사별한 가족과 친구들 때문에 이 섬을 떠올리고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침에 받는 연락은 내게 사는 일과 고통을 면나고 견뎌야 하는 숙명에 대한 생각을 다시 곱씹게 했다.

간지자이지(観自在寺)는 1번 절 료젠지(霊山寺)에서 가장 멀리 있는 절이라고 했다. 지도를 보면 정말로 도쿠시마에 있는 1번 료젠지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지점이다. 절 앞에는 오랜 전통이 느껴지는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승용차를 타고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산을 넘어온 피로감도 있고 몸과 마음이 지쳐있어 어딘가 들어가  남이 차려준 밥을 먹어야겠는데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대형마켓 'A・MAX 에이난(愛南) 점' 이 있길래 들어가서 주먹밥, 장어덮밥, 커피우유 단팥빵 등을 샀다. 어딘가 차분한 자리가 나오면 도시락을 점심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주먹밥과 빵은 운행 중에 행동식 비축했다 그런데 좀처럼 마땅한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로변에 앉아서 밥을 먹기는 싫었다.

오전 내내 고통을 준 7번 도로 정도는 아니지만 56번 국도 역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다리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도 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비는그쳤지만 언제 다시 쏟아질지 모르게 음습한 날씨였다. 

또다시 큰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라면집을 만났다. 랙 팩 안에 도시락과 먹을거리가 잔뜩 들어있었지만 더 이상 못 가겠다 싶어 들어갔다. 알아서 미소라면과 밥 한 공기를 갖다 준다(700엔). 주인 내외의 정성이 느껴지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먹고 나니 몸도 마음도 회복되는 것 같았다.


무리하지 말아야겠다 싶어 조금 타고 오르다가 고개 중턱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서 고개를 넘었다. 고개 너머에서 오사카에서 왔다는 예순 살, 도보 순례자를 만났다. 그와 20 분 가량 왼쪽으로 펼쳐진  해수욕장(室手海水浴場)을 바라보면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도 역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나의 대답은 예의 남북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적대적인 긴장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는 식의 답변을 했다. 무슨 이야기 끝엔가 '시바 료타로 (司馬 遼太郎)' 같은 사람은 한국과 일본이 천 년 전에는 국경이 따로 없는 한 나라였다고 주장하던데, 지금은 두 나라의 개성이 너무 다른 것 같다고 했더니  한국에도 시바 료타로가 알려져 있느냐고 물었다. 우연히 오래전에 한국에 번역돼 출판된 그의 책을 두어 권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호오, 한국에도 그의 책이 출판됐다고요?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나라였는지, 민족의 뿌리가 어디서 갈라졌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일본과 한국만큼 사람들의 개성도 집단의식도 다른 민족이 있을까.

그와 헤어진 뒤 다시 속도를 냈다. 그러다가 결국 넘어졌다. 우와지마 시 (宇和島市)를 향해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 부담스러워 보도 겸 자전거 도로로 올라타는 순간 작은 턱에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내리막길 시속 30km쯤 속도를 내고 있었기에 충격이 컸다. 무르팍이 깨지고 바지도 찢어졌다.  자전거 핸들이 훽 돌아가 있고 핸들바 테이프도 찢어졌다. 그립 부분의 브레이크도 손잡이도 틀어져 있었다.  계속 운행을 할 수 있는지 걱정이 됐다. 일어나 어디 부러진 데가 없는지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 손목에 충격이 있었지만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자전거도 틀어진 부분들에 힘을 주니까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굴리면서 변속을 해 보니 제대로 작동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잖아도 침울하던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오후 네시. 더 전진하는 것은 무리다 싶었다. 지도에 보니 시내에서 3km가량 바다 쪽으로 들어간 언덕 위에 오토캠핑장(미나미 레구(南レク)이 있어 그리로 가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야영을 하게 됐으니 일단 마을 입구 대형마트에 들러 부탄가스와 옷을 꿰맬 반짇고리, 소고기 등 먹을거리를 좀 더 샀다.아침에 목표로 정한 기타우와지마(北宇和島) 41번 류코지(龍光寺)나 42번 부츠모쿠지(仏木寺)에는 한참 못 미친 지점이었다. 레구(レク)가 무슨 뜻인지 한참 갸웃거렸는데 레크리에이션의 일본식 축약인 모양이었다.

일요일 오후라 오토캠핑을 한 주민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관리인 한 사람이 당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정을 말하니까 숙박계를 쓰라고 했다. 1박에 2500엔. 자동차든 자전거든 똑 같이 한 구획 이용료가 그랬다. 샤워는 코인 샤워 200엔, 세탁도 건조기도 모두 200엔씩 600엔. 모두 합하면 3천100엔. 차라리 시내에 호텔을 잡을 걸 그랬나. 빗방울까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캠핑장 시설은 훌륭했다. 텐트를 치고 의자를 빌려서 잠시 쉰 뒤 샤워를 하고 빨려를 돌려놓고 열심히 먹었다. 소고기를 굽고 새로 산 김치와 맥주도 한 캔, 배불리 먹었다. 

집을 떠난 지 이 주 가량 지났다. 지친 모양이다. 오늘의 가벼운 사고는 쉬어가라는 신호 여겨졌다.그나마 크게 다친 데도 없고 자전거도 멀쩡하니 다행이었다. 새벽녘 텐트 위로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방수가 잘 되는 텐트라 걱정할 건 없었다. 힘내자! 약해지려는 마음을 향해 격려를 보냈다.


#13- 스쿠모 오시마 ~ 미나미 레구(南レク)오토캠핑장

운행거리  61.2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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