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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11. 2020

14. 반딧불이가 아름다운 오즈 시

#14  미나미 레구오토캠핑장ㅡ오즈시(大洲) 교도칸 유스호스텔

간밤에 비가 쏟아졌다. 잠결에 떠내려 갈 것 같은 빗소리를 들었지만 침낭 안에 움크린 채 그냥 잤다. 매일 비가 내리는 걸 보면 장마철이 맞는 모양이다.
 

아침을 챙겨 먹고 7시10분 길을 나섰다. 잘 쉬었으니 오늘은 80km 가량 떨어져 있는 오즈시(大洲市) 캠핑장까지 달릴 수 있지 않을까. 텐트와 플라이가 비에 젖어 확연하게 짐이 무거워졌다. 다시 56번도로로 나와 북쪽을 향해 달렸다. 시가지를 벗어날 무렵 또 한 번 자전거가 미끄러며 지며 휘청해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비는 그쳤다. 아침에는 힘이 난다. 언덕 위 터널도 거뜬히 통과했다. 홈센타 다이키. 도시 초입에는 대개 이렇게 홈센터와 대형할인매장들이 있다. 도시라고 해도 우리처럼 성냥갑 아파트들이 밀집된 게 아니라 단독주택들이 이어져 있고 집들마다 작은 정원과 텃밭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인지 홈센터에는 정원용품과 농기구와 퇴비 등 원예용품을 갖춰놓고 있었다.

아이들 어릴 때 10년 가량 경기도 광주 산 속 마을에 산 적이 있다. 그 때는 수도나 보일러를 직접 수리할 일이 많았다. 봄이 오면 퇴비 섞어 밭 고랑을 만들고 토마토 고추, 고구마, 호박 등을 심고 텃밭을 일궜다. 집과 텃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사려면 건재상을 뒤지거나 광주나 양평에 열리는 오일장을 이용했다. 

귀농한 친구가 호미 한 자루 사러 이마트로 달려가야 한다며 푸념하던 게 떠올랐다.

도시들은 대형할인점이나 홈센터로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로손이나 패밀리마트 같은 편의점들이 점점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이를 징검다리처럼 건너 다니며 살아간다. 세탁은 코인란도리에서 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던 말이 실감난다..


일본은 그 무렵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일본 공산당은 ‘즉시 원자력발전 제로' 등 탈핵과 증세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고 있었다. 집권당인 자민당은 다분히 선동적이었다. "일본을 다시 강하게!" 이 지역에서부터 일본을 재건(재생)하자!  이런 식이다. 아베와 지역 의원후보의 얼굴을 극적으로 클로즈업 한 뒤 굵은 눈물을 흘리는 사진은 묘하게 호소력이 있다.

‘ 핵발전과 결별하자.' ‘아이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이렇게 이성에 호소하는 야당들에 비해 감정에 호소하고 읶는 자민당의 포스터 는 대조적이었다. 언뜻 보면 자민당이 당장 나라를 구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선동의 힘이다. 경기 침체와 쓰나미와 핵발전소 사고로 의기소침했던 일본인들은 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아베의 자민당을 선택했다.  일본은 오른쪽으로 마구 치닫고 있다. 실제로 일본이 다시 강해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들이 불안해진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순례자인 나는 이국의 선거 포스터를 일별하고 가던 길을 갈 뿐이다. 


기타우와지마 역을 지난 뒤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56번 도로와 헤어져 내륙으로 꺾어 들어가야 41번 류코지(龍光寺)쪽으로 갈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편의점 '싼쿠스'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오르막 앞 휴식소에서 어제 사 둔 단팥빵을 먹었다. 당분은 빠르게 흡수 돼 에너지가 되면서 심신을 편안하게 한다. 이제 류코지(龍光寺)까지 800미터 남았다. 아침부터 거의 세 시간을 달려온 셈이다.


41번 류코지 (龍光寺)는 오래된 마을 안, 까마득한 계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코보 대사가 벼를 짊어지고 가는 노인을 만나곤 그가 벼의 신 이나리(稻荷)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이나리를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요즘은 사업 번창을 기원하며 이 절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높은 곳에 있는 류코지 화장실에서 내다보는 풍경도 멋있었다. 참배를 마치고나니 10시가 됐다.류코지 계단을 채 다 내려서기 전에,  42번 부츠모쿠지(仏木寺) 로 이어진 도보순례길이 샛길로 연결돼 있다. 절제된 길 안내 마킹.미의식마저 느껴졌다.

빈집이 늘고 허물어져 가는 농촌의 현실은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42번 부츠모쿠지(仏木寺)까지는 자동차길로 돌아가도 4km 남짓 짧은 거리였다. 절은 도로에서 살짝 올라 앉아 있었다. 길가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우자니 아이스크림 노점을 하는 아저씨가 말을 건다. 어쩐지 라디오에서 '싱글벙글쇼'가 울려퍼질 것만 같은 나른한 오전이다. 부츠모쿠지(仏木寺)는 소와 말, 최근에는 애완동물을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코우보오 대사가 이 동네에서 만난 노인이 권하는 대로 소를 타고 가다보니 자신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던진 불구(보주宝珠)가 녹나무 위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전설은 곧이 곧대로 믿을 건 아니지만 그럼 어떤 상징이 담긴 이야기일까.


절 입구 게시판에 “나를 낳고 기른 것은 부모의 은혜.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두터운"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여행 내내 부모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던 내 가슴을 파고 드는 말이다. 이미 돌아가신 두 분을 위해 이젠 무엇도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소용없는 후회를 곱씹을 뿐.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성장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중학생이던 내게 어릴 때 일본에 건너가 보고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다. 고향인 경남 창녕을 떠나 부산을 거쳐 오사카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 일본은 모든 게 앞서 있었다고 했다. 논과 밭도 반듯하게 정돈이 돼 있고 거리도 집도 번듯했다고. 식민지 종주국과 수탈을 당하던 조선 사이에 격차가 어린 소년의 눈에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7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공장에 다니며 가족을 부양하며 독학으로 중고교 졸업자격을 획득하고 교원 자격 시험에도 합격해 해방이 되던 무렵에는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소학교 선생님으로 도쿄에서 근무하며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교사 자격시험은 과목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음악 과목만은 독학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을에 있는 소학교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 하니까 니시이라는 선생이  저녁마다 피아노 레슨을 해주었다고 한다. 니시이 선생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70년대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분이 가져온 소니 트렌지스터 라디오와 초콜렛 등응 보고 일본의 풍요를 짐작하며 부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1시 부츠모쿠지 참배를 마쳤다. 마을 뒤쪽으로 길은 말 없이 산을 향해 뻗어있었다. 또 등산이 불가피한가?  헨로미치 스티커가 고개 옆 완만한 샛길로 안내돼 있어  혹시나 고개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나 따라 가보았다. 2km 남짓이나 달렸을까, 길은 도보 순례자들만 갈 수 있는 산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도로 쪽으로  되돌아나왔다. 피로감이 느껴지고 흥도 나지 않는 오르막이 이어졌다. 오후 1시 반.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목적지와의 거리를 한탄하며 고개 중턱쯤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에 만들어온 주먹밥과 토스트를 먹고난 뒤 5분쯤 의자에 누워 잠을 잤다.

구불구불한 도로는 곳곳에서 도보 순례길과 만났다 헤어졌다릉 반복했다. 대개 고개 마루에는 터널이 있다. 끝나지 않는 오르막은 없다. 그리고 오르막은 언젠가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사는 일도 그렇다. 아무리 힘겨운 고난도 결국은 끝이 있다. 엘뤼아르 의 시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  


43번 메이세키지(明石寺)까지는 이제 7km 남았다. 큰 고개를 넘어왔으니 적어도 오늘만은  더 이상 고난은 없겠지. 이런기대를 품어본다. 산길 아래로 산 자락에 들어선 마을들이 적막했다. 일본에 와서 드물게 비탈에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43번 메이세키지(明石寺)는 시모우와 (下宇和) 라는 동네에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림처럼 깨끗한 동네였다. 어린 모들이 막 뿌리를 내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이 평화로웠다. 외진 시골인데도 일본의 목조주택들은 허술한 데가 없어 보였다.


2001년에 금강산에 갔을 때, 본 북녘의 집들은 더 대책이 없었다. 용마루도 반듯한 게 없고 어딘지 구부정하고 누추했다. 창틀도 아귀가 맞아보지지 않았다. 다 매서울 칼바람을 견디기에너무 허술해 보였다. 땔감 때문인지 산들은 예외없이 민둥산이었다. 남녘과 북녘의 농촌에  값 싼 태양광 발전 모듈과 방풍 단열이 뛰어난 건축 양식이 보급되면 좋겠다.

2시40분. 메이세키지(明石寺)에 도착했다. 본당은 공사중이라 장막에 쌓여있어 모습 전체를 볼 수는 없었다. 세계인류평화를 기원하는 표지판에 잠시 마음이 따뜻해졌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보니 이 나라에도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있고, 구호 역시  '강한 일본'과 '인류평화'로 나뉘어 있었다. 


절은 짙은 산 그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백년은 되었을 것 같은 삼나무 두 그루 앞에 '부부 삼나무'라는 표지만이 있었다. 나도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다. 부질없이 바쁘게 방황하기보다 땅에 뿌리박고 오고 가는 낮과 밤, 세월과 세월을 견딘 나무들. 어쩌면 나무는 평생 용맹정진하는 수도자들과 닮았다.

공사중인 본당과 달리 코우보오 대사를 모신 대사당에는 참배객들이 모여 있었다. 절 앞 매점에서 일본 순례자들이 들고 다니는 가이드북을 샀다. (2600엔) 붉은 점선의 도보 순례길과 도로의 구분, 가 마을과 상점, 민박이나 호텔에 대한 안내, 구간별 거리  등이 잘 표기된 안내서. 1번 료신지에서 못 산 것을 비로소 마련한 것이다.


절에서 내려와 GPS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대로 오주시(大洲市)로 가기 위해 좌회전해서 근 10km쯤 달렸을 때였다. 소형차가 옆으로 따라붙으면서 운전석에 앉은 아주머니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길이 없어요. 길이 없어요. 멈춰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놀라 자전거를 멈췄다.

마사코 미요시와 미요시 에미코 모녀. 만화에 나올 것 같은 케릭터였다. 과장된 표정과 행동이 무척 활달한 모녀. "이쪽으로는 길이 없어요. 돌아가 주세요." 아예 차에서 내려서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마쓰야마 자동차도로 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오주시로 이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중간에 길이 끊긴다는 것이다. 이들과 잠시 수다를 떨었다,
서울에서 왔다니까 딸인 에미코는 '우와 대단해요'를 연발하더니 캬라멜 한 통과 커다란 귤을 두 개를  오셋타이'라며 주었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엄마인 마사코 미요시가 대뜸 '결혼 했느냐'고 물었다. 했다고 답하니 집에 가서 혼나면 어쩌려고 여자와 사진을 찍느냐고 했다. 깔깔대며 단지 사진인데 뭐가 문제냐? 고 해도 양손을 엇갈려 엑스표시를 하면서 안돼 안돼(다메 다메) 하면서도 포즈를 취해주었다. 

   

다시 방향을 틀어  56번 도로를 따라 다시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도 정하지 못한 상태라 또 마음이 바빠졌다.  터널 하나를 통과하니까.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비핵평화 선언도시" 오주시. 시청에 내건 플래카드가 반가웠다. 단체장이 자민당이 아니라 사민당이나 공산당원인 모양이었다. 시내 풍경도 독특했다.  마치 오륙십년 전의 세상을 옮겨다 놓은 듯 오래된 목조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동화속 풍경같은 거리에 하교 시간이라 흰 교복에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새떼들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강변 언덕 위에 있는 오즈성도 풍경의 완성도를 높여놓고 있었다.


GPS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찾아간 오즈 가족여행촌 캠핑장은 강변에서 언덕 위로 1.3km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힘겹게 올라갔는데, 캠핑장 입구가 굵은 쇠사를 가로막혀있었다. 관리사무실 전화번호를 검색해 전화를 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캠핑장 안에 작은 트럭도 서 있어 관리인이 있을 것 같은데 연락할 길이 없었다. 다른 숙소를 찾아야 했다. 한글 안내지도 '오즈 유스호스텔'이 표기돼 있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아시즈리곶에서 예약 없이 찾아간 유스호스텔에서 거절 당한 경험이 있어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전화 통화가 되었고 예약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저녁식사가 안 되니까 먹을거리를 알아서 해결해야 하며 샤워는 되지만 욕실은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괜찮다고 고맙다고 하고 찾아갔다.

오즈시 (大洲) 교도칸유스호스텔(郷土館ユースホステル 81 893-24-2258  ). 

오즈성 뒤 아름다운 강변에 있는 2층 가옥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지하 차고에 젖은 텐트를 널어 말렸다. 주인 내외가 아래층에 있고 이층을 혼자 썼다. 짐을 부려놓고 시내로 달려나가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빵, 우유 등을 사가지고 왔다.

주인 할머니 아카마츠 레이코 상의 말대로 8시면 수퍼와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시청 근방에서 겨우 편의점을 발견했다. 전통가옥들이 늘어선 상가는 아름다웠지만 대개 이제 영업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지방도시의 쇄락. 더 이상 남의 일만은 아니다.   

유스호스텔은 낡았지만 세심하게 관리된 근사한 이층 목조주택이었다. 2층에는 잘 정리된 주방과 냉장고, 토스터도 따로 준비 돼 있고 창밖으로는 그림 같은 강변풍경이 펼쳐졌다. 집 전체가 미술품이나 골동품 같았다. 이 때문인지 체크인을 하고 (3천엔)난 뒤 레이코상과 마주 앉아 근 2~30분 가량 면담을 해야 했다.  할머니는 아이패드를 들고 와서 구글 번역기를 통해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타자가 너무 느려서 속이 탔다. 어제 어디서 잤냐. 내일 어디로 가냐. 한국에서 하는 일은 뭐냐. 이런 정도인데, 그 정도  간단한 일본어는 대답할 수 있어 말을 그냥 말을  하고는 이걸 묻고 싶은 거냐? 하니까 소녀처럼 천진하고 웃었다.


아름다운 오즈시까지는 마쓰야마(松山)에서 기차가 있으니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와 묵어가면 좋겠다 싶었다. 다시 찾아간다면 며칠 여유를 두고  어슬렁어슬렁 걸어보고 싶은 낭만적인 도시였다.


"여기 호타루(螢)가 살아요."

유스호스텔 앞에 있는 이 연못가에서 흰 교복을 입은 남녀 고등학생들이 수줍은 표정으로 두세 쌍 어울려 대화를 하고 있었다. 꿈속에서나 볼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니 안주인 레이코 상이 이렇게 일러주었다.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연못과 오래된 오즈성. 스트레스라고는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주민들과 자전거를 타고 노래하듯이 웃으며 등하교 하는 소년소녀들.  나는 어쩐지 어린시절에 이런 광경을 경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훼손되지 않은 삶의 원형이 있다면 이런 광경이 아닐까.  

우리는 다시 이런 세계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14  미나미 레구오토캠핑장ㅡ오즈시(大洲) 교도칸 유스호스텔

운행거리  86.6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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