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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12. 2020

15. 동화에서 현실로

#15 오즈 시 - 구마코겐 미미도 御三戸) 캠프장


주행거리 69.71km


푹 자고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창밖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변을 산책을 하는 주민들,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두 량 짜리 작은 전차가 철교 위로 찰박찰박 달려가고 있었다.


게스트들에게 이용하라는 것인지 대리석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준비돼 있는 인스턴트커피와 녹차 사탕. 저녁에 사 둔 도시락을 먹고 빵은 구워 도시락으로 챙겼다. 아래 층 주인 부부의 아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발소리 죽여가며 걸었지만 마룻바닥은 계속 삐그덕거렸다. 짐을 꾸려서 마당으로 나와  지하 빨래 건조장에 널어 둔 텐트를 걷었다. 잘 말라 있어  마음까지 가벼워졌다.
 
인사는 하고 떠나야겠다 싶어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잠시 기다렸다. 얼마 뒤  레이코 상이 마당으로 나왔다. 방문자들 기록을 남긴다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당신 사진도 찍겠다고 하니 화장을 안 했다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찍어 달라고 해 웃었다. 식수를 받아야겠다고 하니 마당 수도에서 받아 가라고 했다. 수돗물에 대한 이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실제로 소독약 냄새도 없고 편의점서 사는 생수와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7시 반 오즈시를 떠났다. 단정한 마을과 거리. 그리고 사람들. 이 아름다운 도시에 언제 다시 찾아와 볼 수 있을까.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올 일이 또 있을까.


이 도시 외곽에도 여지없이 대형 쇼핑센터들이 도열해 있었다. 잠시 꾸던 꿈에서 현실세계로 소환당한 느낌이었다. 편의점 로손에서 카페오레(110엔)를 마시고  56번 국 도로 17km쯤 달린 뒤 내륙 쪽으로 뻗은 379번 도로 갈림길에 있는 우치코(内子) 미치노에키에서 잠시 쉬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산길이 또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스러야 했다.

미찌노에키(道の駅)는 주요 도로변에 있는 휴게소인데 순례자들에게도 반가운 장소다. 노숙을 하며 순례를 하는 이들은 주로 이곳에서 숙박을 한다. 물과 화장실, 피를 피할 지붕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게 이 정도 말고 무엇일까.

지차제에서 운영하기 때문인지 대개는 지역 농산물 판매장이 휴게소 중심에 있다. 매대에 마늘이 있길래 두 통(160엔), 그리고 홋카이도 산 우유200ml 90엔)를 샀다.


일본 사람들이 '닌니쿠'라고 부르는 마늘을 쇼핑센터 등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생각해보니 마늘이야말로 한국음식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버지도 생전에 생마늘을 좋아하셨다. 일본에서 갖은 고생 끝에 운명을 개척했어도 억눌린 심정이야 오죽하셨으랴. 해방되기 무섭게 부모님은 미련없이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인 교사들은 아버지의 귀국을 한사코 말렸다고 한다. 어릴 때 떠나와 조선에 아무런 삶의 기반이 없으니 일자리가 있는 일본에 남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늘 냄새가 난다며 조선인을 멸시하던 보통의 일본인들 시선을 벗어나고 싶으셨을 것이다. 어릴 때는 마늘을 날로 드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가. 스무 살 넘어서는 나도 그렇게 됐다. 군대에서는 대량 급식 찐 밥에 물려 입맛을 잃을 때면 취사병 후배들에게 마늘 한두 쪽을 얻어 고추장에 찍어 먹곤 했다.


산을 향해 뻗어있는 379번 도로는 일단은 하천변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져 있었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상쾌했다. 잉어들이 한가롭게 헤엄치는 강에서 투망질을 하는 아저씨도 뭐 하나 급할 게 없어 보였다. 적막감마저 느껴지는 길을 한동안 달렸다.  차르르...체인 돌아가는 소리마저 고요한 산골에 선명하게 울렸다.


11시, 길가 휴식소에서 쉬고 있자니 도보 순례자 하야시 미츠오 씨가 도착했다. 예순이나 되었을까? 집은 요코하마에 있고 자기 딸이 서울대학교에 유학해 박사 학위를 했다고 했다. 간밤에 어디서 잤냐고 묻길래 오즈시 유스호스텔이라고 하니 교도칸 유스호스텔은 자기도 안다고 했다 그는 줄곧 노숙을 하면서 순례 중이며 전에 자전거로 순례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후에 마쓰야마(松山) 시에도 유스호스텔이 있으니 이용해보라고 알려주었다.


다시 한 시간 남짓 달린 뒤 379번 도로에서 다시 42번 도로로 우회전하는 지점에 있는 작은 휴식소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12시 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때부터 해발 600미터 고개를 공사장 트럭들을 피해 꾹 참고 고개를 올라야 했다. 해발 570 미터 시모사카바(下坂場峠)고개. 그야말로 산판길에 나무를 실어 내리자고 뚫어 놓은 고개인 것 같았다. 육중한 덤프트럭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르내리는 것 말고는 지나다니는 차들도 없었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44번 다이호지(大寶寺)를 만나게 되는 것인가? GPS 지도상으로는 조금 방향이 모호했다. 고개를 내려가 바로 절이 있는 게 아니라 다시 산이 가로 놓여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불안한 마음으로 어쨌든 다운힐.


곳곳에 빈집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이제 낯설지도 않다. 일본도 우리도 바로 다음 세대 농촌의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지도는 작은 마을에서 또다시 산 하나를 넘어가도록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 앞서 가던 도보 순례자에게물어보니 자전거는 가기 어렵겠다고 했다. 가이드북에는 도로 표시가 돼 있었지만 비포장 산길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우체부에게 물어보니 조금 멀고 길이 험하지만 갈 수는 있다고 했다.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길이 험해 페달을 밟아봐야 헛돌기만 해 끌고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토기타고개(해발 770m)는 좀 전에 오른 시모사카바보다 더 높았다.

고갯마루에서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이젠 정말 내려가기만 하면 되겠지. 그것도 착각이었다. 안내 책자를 꺼내보기 귀찮아 내처 타고 달리다가 갈림길을 지나치고 말았다. 저류조로 만들어 놓은 호수 앞에서 길은 끝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전거를 끌고 고개 정상 부분까지 올라가서야 갈림길을 찾았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쿠마코겐(久万高原町) 마을에 도착했다. 까마득하게 높은 산들을 넘어왔으니 고원이라는 지명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44번 다이호지(大寶寺)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편의점도 없는 산속 마을. 놀랍게도 토키타 고개 입구에서 만났던 도보 순례자가 이미 절에 도착해 있었다. 비포장 산길을 넘는 데는 자전거가 교통수단이 아니라 짐일 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44번 다이호지(大寶寺)는 701년 백제에서 온 스님이 12면 관음보살상을 산중에 묻어둔 것이 발견돼 그것을 모시며 세운 절이라고 한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것은 성왕 때인 533년이다. 백제에서 건너 간 불교는 코보 대사로부터 비롯된 일본 밀교와는 다른 불교였을 것이다. 코보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간 것은 804년. 이 다이호지에 관음보살상을 전해주었다는 백제 스님의 전설보다 백 년쯤 뒤의 일이다.


해가 지고 있어 마음이 급해졌다. GPS에 표시된 캠핑장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캠핑장인가요?" "캠핑장은 아닌데요..." 이게 무슨 소린가 급 당황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반, 못 알아듣는 말 반. 힘겨운 전화 통화가 이어졌다. 캠프장은 아니지만 캠프는 할 수 있다. 여기 텐트는 없다. 캠핑을 하기에는 너무 춥다. 내게 텐트와 슬리핑백이 있으니 문제없어요. 잠시 기다려봐라. 지금 있는 데가 어디냐. 다이호지 앞입니다. 10분 뒤에 다시 전화해라.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 일박에 얼마인가요? 무료다. 아.. 그래요?

그런데 먹을 게 없었다. 캠핑장까지는 직선거리 8.5 km. 이미 다섯 시 시보가 울렸다. 절에서 내려와 좌회전을 한 뒤 다시 33번 도로로 좌회전해 강변을 따라 7km쯤 달렸다. 다행히 고개 같은 것은 없었다.  지도에 표시된 미가와 미치노에키도 이미 문을 닫았다. 다시 한번 좌회전해서 212번 도로로 꺾어진 뒤 캠핑장 바로 위에 도달했다. 캠핑장은 도로 아래 있었다. 길가에 가게가 있어 들러보았다. 먹을 수 있는 건 다 사 보기로 했다. 정어리 통조림과 꼬막 같은 조개 통조림. 계란 한 줄 (열 개). 작은 참기름 한 병(작은 건 이 것밖에 없었다) 식빵 하나. 아사히 맥주 작은 캔 하나,  닭고기 200g (합 1500엔).
 
별 기대 안 하고 강변으로 내려섰는데 뜻밖에 범상치 않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반에 거대한 수석을 담아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구마코겐(万高原町) 미미도(御三戸) 캠프장. 강변 유원지 정도라고 해야 맞겠다. 전화로 캠핑을 허락해준 곳은  캠핑장 바로 위에 있는 마을 사무소였다.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무사히 잠자리에 도달했다고. 인적 드문 산을 두 개나 넘으며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다.  텐트를 설치하고. 팩을 박을 수 없어 돌들을 주워다 플라이를 당겨 놓았다.  밥을 짓고 마늘을 볶다가 닭도 함께 볶은 뒤 양파 고추장을 넣고 끓이다 라면 사리를 넣어서 잡탕 전골을 만들었다. 비교적 맛도 괜찮았다. 의식해서 그런가 마늘 향이 반가웠다. 맥주도 곁들여 나름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어둠과 함께 추위가 밀려왔다. 짙어지는 어둠 속 고원의 강물은 소리 없이 흘렀다. 이를 닦고 강변에 내려가 수건을 적셔 몸을 닦았다. 어둔 강물에 몸을 담그려고 했는데 너무 추워서 그럴 수 없었다.  땀이 식으며 몸이 덜덜 떨렸다.

밤 10시경 침낭 속에 눕기 무섭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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