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작나무 Feb 13. 2020

16. '도련님(봇짱)'의 도시 마쓰야마

# 16 - 구마코겐 캠프장- 마쓰야마 유스호스텔


 운행 60.60km


역시 다섯 시 전에 잠이 깼다. 아침 산책 나오는 이들에게 방심한 채 자는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잠시

텐트 지퍼를 열고 누운 채 강변 풍경을 감상했다.산 그림자마저도 물에 잠겨 젖어있는 것 같은 새벽 강의 적요. 새벽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서기’.


스무 살 무렵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함께 자는 일이 많았다. 그 시절 서울 장위동의 친구들. 고등학교 졸업한 뒤로 자취를 해야 했던 나, 서울로 유학 온 지방 출신 친구들. 우리는 만나면 헤어지지 못하고 장위동 친구들 집으로 몰려다니곤 했다.
밤 새 떠들다 한 낮이 돼야 일어나는 우리들이 한심했던지 어느 날, 친구 M의 아버님이 불콰하게 술이 오른 얼굴로 우리들을 앉혀 놓고 일장 훈시를 하셨다. " 우리 젊을 땐 말이다 새벽에 산에 올라가 몸도 마음도 단련하고 그랬지. 새벽 산에는 서기가 서려 있거든.... "  아버님의 취중 말투와 '새벽 서기'라는  말의 어떤 과장된 느낌 때문에  친구들은 쿡쿡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그 뒤로 한 동안 “어때? 요즘 서기를 좀 느꼈나?” 하는 농담이 친구들 사이에 유행이 되었다.

그 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무렵 우리들은 스스로의 불안한 미래와 불의한 권력에 억눌린 현실에 대한 갑갑한 심정을 서로 어울려 다니며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님이 우리에게 툭 던진 그 낯선 말씀에서 한 줄가 청량감이 느껴졌다. 아, 새벽 숲에는 '서기'가 있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방을 빠져나가 혼자 산길을 걷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며칠 전  슈퍼에서 사 둔 일본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렸다. 딴에는 부지런을 떨었는데 예상대로 여섯 시부터 주민들이 산책을 나왔다. 7시 30분, 짐을 모두 꾸려 45번 이와야지(岩屋寺)를 향해 길을 나섰다. 맑은 냇물을 따라 북쪽으로... 8km쯤. 강원도의 어디쯤이라고 해도 어색할 게 없는 산골 풍경이었다. 잠시 속도계가 말썽을 부려 센서의 위치를 조절했다. 이때까지 누적된 주행거리는 약 1,500km였다.

8시 15분 이와야지(岩屋寺)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순례자들은 없었다. 깎아지른 바위 산에 안겨있는 고풍스러운 절이었다. 일주문에서 본당까지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했다. 길가에 남무대성 부동명왕(南無大聖不動明王)이라는 휘장들이 늘어져 있었다. 귀의(歸依) 한다는 나무(南無)나 대성(大聖)은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는데 부동명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아 찾아보았다. 산스크리트어(Sanskrit) 아차라나트(아차라-움직이지 않는, 나트-수호자)를 번역한 말로, 주로 밀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오대 명왕 가운데 핵심이며, 그 기원은 힌두교의 시바신이라고 한다.
코보 대사가 부동명왕을 조각해 절 뒤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바위산에 넣어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는 북한산 인수봉처럼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진안 마이산처럼 콘크리를 부어놓은 것 같은 그런 바위였다.
부동명왕 아차라나트는 대개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올가미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우리는 늘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갈망한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지난 일을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한 시도 평탄하지 않다. 지나간 일 후회한들 무슴 소용이랴. 그러나, 그러나... 회한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나. 나는 왜 조금 더 따뜻한 아들이 되지 못했나. 아무 소용없는 회한에 가슴을 치곤한다.


순례자들조차 없는 고요한 절에서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질 자국이 절마당에 기하학 무늬 같은 흔적을 남겼다.

코보 대사가 직접 팠다는 굴이 있고 이끼가 뒤덮인 굴 안에 신령스럽다는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대화혼(大和魂), 힘내세요! ' 길가에 매달린 리본들. 대화(大和)는 우리의 '배달(밝달)'처럼 일본을 상징하는 말이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무 천황이 대화 지방에 최초의 통일국가 세웠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태백산 신시(神市)처럼 말이다.
아시아를 세계 전체로 인식하던 시대,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중국에서 유래된 문물을 재(才), 이에 대해 일본 특유의 정신과 방법을 화(和)라고 했다. 외래문물을 취하되 자기 정신과 가치관을 중심에 두자는 생각에서 화혼한재(和魂漢才), 근대에 와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슬로건처럼 내세웠다. 우리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일본이 민족을 강조하면 이웃나라들이 섬뜩해질까.야마토고코로(大和心)를 부르짖으며 그들이 저지른 침략전쟁 때문이겠지. 일본이 독일처럼 반성도 없이 2차 대전 당시의 슬로건을 외치는 광경이 우리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아닐 수 없다.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향을 사른 뒤 산길을 내려오던 고요한 마음은 대화혼을 보고 그만 복잡해지고 말았다.  


산 아래 정류장 앞 가게에 들러 빵 한 봉지와 레몬 음료를 사고 휴식소에 앉아 잠시 쉬었다. 다시 산을 넘어가야 한다. 12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결국 어제 들렀던 44번 다이호지(大宝寺)가 있던 구마코겐 마을까지 가게 되어 있다. 냇물을 따라 산속으로 난 길은 깨끗하고 풍경도 아름다웠다. 고개 하나를 넘기 전에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넘어오던 아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년에는 오토바이 순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반복해서 계속 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누군가 방명록에  '올해도 시코쿠 병원에 입원했다'라고 썼던 말이 떠올랐다. 일상을 견디다 짬을 내 자신의 내면과, 신앙이 있는 이들은 그 중심에 있는 코보 대사와 대화하면서 수십 일 걷는 일. 그것이 왜 병원이 아니겠는가.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 방문한 구마코겐 마을(久万高原町). 어제 저녁 잠자리를 찾아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달리던 일이 떠올라 웃음이 머금어졌다. 겪고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을 태산 같은 걱정을 미리 당겨서 짊어지는 게 내 깜냥인 모양이다.

편의점 같은 것은 없는 줄 알았는데 마을 북쪽 끝에 있었다. 화장실도 쓸 겸 들러서 늘 사서 마시던 500ml 카페오레를 가게 앞에서 마시고 있자니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오차 한 병과 주먹밥 한 덩이를 사 가지고 나오다가 내게 500엔짜리 동전을 오셋타이라며 건넸다. 아마도 오차와 주먹밥이 자신의 점심인 모양인 데 자신에게는 한 끼에 300엔도 안 쓰면서 순례자에게 500엔짜리 동전을 기부하다니. 엉겁결에 동전을 받아 들고 잠시 숙연해졌다.


10시 40분 다시 출발. 33번 국도로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열심히 오르다 33번 도로바이패스 구간과 옛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만났다. 이쯤에서 농수로로 맑은 물이 쏟아지고 있길래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발을 씻었다. 한결 피로가 가셨다.

점점 태양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비 걱정 해가 뜨면 더위 걱정. 이러니 부동명왕이 번뇌에 시달리는 인간들을 건지겠다고 올가미를 들고 서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굳게 각오한 탓에 오르막의 고통은 견딜 만했다. 미사카 고개(三坂峠, 해발 720미터) 마루. 자동차들은 새로 뚫은 터널로 바이패스가 나 있어 차량 통행이 거의 없었다. 잠시 뒤 반대편 고개 쪽에서 '푸파 푸파...' 무슨 짐승 신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자전거 한 대가 고개 위에 나타났다. 늘씬한 로드바이크였다. 그는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쉬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산 아래로 까마득하게 마쓰야마 시내와 그 너머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길이 자동차 도로와 합류하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화물차들이 옆으로 스쳐갔다. 이 때문에 잔뜩 긴장한 채 가파른 고갯길을 내려와야 했다. 절반쯤 내려온 지점에  다행히 숲으로 난 샛길이 있었다. 여기부터 33번 도로와 헤어져 다시 평화로운 산골마을로 길이 이어졌다. 산 아래로 내려올수록 기온이 높아졌다. 갑자기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고 기온도 종려나무 같이 식물들도 달라졌다.
드디어 마쓰야마(松山)에 들어섰다. 산을 넘어 도시에 도착하면서 무언가 한 과정이 마무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88개 사찰 가운데 이제  45개 절을 돌았다. 섬 전체로 보면 네 개 해안 가운데 세 개 해안을 모두 돌았다. 이제부터는 북쪽 해안을 따라 일본에 처음 도착했던 다카마쓰를 거쳐 88번 사찰까지 가면 이 여행도 마무리될 것이다.


마쓰야마 시(松山)는 에히메현의 현도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봇짱)’의 무대인데 소설에서는 시코쿠와 마쓰야마가 외딴 오지로 묘사돼 있다. 도쿄에서 마쓰야마 시골 학교로 전근 온 주인공이 좌충우돌, 더러 교활하고 속된 주변 인물들과 맞서고 부딪치면서 겪는 일들이 이 소설의 뼈대다. 중고등학교 때 읽던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 무렵 읽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 '데미안' 같은 성장소설 같기도 했지만, 번역 때문인지 봇짱의 메시지는 어색하기도 하고 뭔가 감정이입이 잘 안 됐다.

마쓰야마 시에는 46번 죠루리지(浄瑠璃寺) 47번 야사카지(八坂寺) 48번 사이린지(西林寺), 49번 죠도지(浄土寺), 50번 한타지(繁多寺), 51번 이시테지(石手寺),  53번 엔묘지( 円明寺)까지 무려 8개의 절이 시내에 흩어져 있다.

시내에 산이나 험한 고개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첫날 도쿠시마에서 10개의 절을 순례 한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다 돌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리석게도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누가 억지로 시킨 숙제를 해치우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뭔가 그간의 고생을 보상 받아야 한다는 식의, 전장에서 돌아온 상이군경 같은 심리.


46번 죠루리지(浄瑠璃寺)에 도착한 것은 12시 20분경이었다. 절은 산에서 내려와 시가지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맑은 유리. 절의 이름은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약사여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절에는 천연기념물인 1000년도 더 되었다는 고목이 있었다.


47번 야사카지 (八坂寺)는 죠루리지에서 1km 이내에 있었다. 12시 50분. 집들이 오밀조밀한 골목을 따라 달리다 보니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어떤 면에서는 도회지가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서운한 기분도 들었다. 고적한 산속 마을들과는 영영 이별인가. 그럴 줄 알았으면 그 순간을 더 누렸어도 좋았으련만,  서늘한 산중에서 늘 잠자리 걱정을 하며 종종걸음을 치던 게 아쉬웠다.


야사카지(八坂寺)라는 이름은 여덟 개의 경사지를 개간해서 절을 앉힌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절은 신도와 불교가 융합된 절이라 해서 오래도록 번성했는데 여러 번 불타고 다시 세우면서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다.

일본은 1868년 국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는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을 발표하고, 시코쿠 지역에서도 불교배척 운동이 벌어져 1875년까지 수많은 불교 사찰이 불타고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여파가 미쳤던 모양이다. 그동안 거쳐온 사찰들 주변에는 더 큰 규모의 신사들이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48번 사이린지(西林寺)까지는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완만하게 내려가며 주택가 골목길을 달렸다. 오랜만에 핸로미찌 스티커를 따라 달렸다. 절에 도착한 것은 1시 20분경이었다.  시내에 들어와 약간 들뜨기도 했고 뭔가 식당에 들러 제대로 된 밥을 사 먹고 싶기도 했다. 사이린지는 주택가에 있었다. 그러나 산문은 고풍스러웠다. 산문 안에는 예의 손과 입을 씻는 미즈야가 있고 본당과 대사당도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본당에 모신 부처님은 참배객들이 볼 수 없게 가려져 있고 뒤로 돌아앉아 있는 탓에 본당 뒤쪽으로 돌아가서 참배를 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이 절에는 주로  원만한 가족관계를 기원하며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점점 찾는 이들이 늘어가는 추세가 아닐까.


49번 조도지(浄土寺)까지는 제법 큰 도로를 따라 시내를 질주해야 했다. 차가 많은 도로도 많은 사람들과  집들도 어색했다.  며칠 산길을 달렸을 뿐인데도 그랬다. 마땅한 식당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조도지를 향해 달릴 때까지만 해도 시내에 있는 모든 절을 다 순례하고 어디 바닷가 야영장을 찾아봐야지 싶었다. 갑자기 진도가 빨라지니까 오히려 마음이 빠져졌다. 차량에 뒤섞여 골목을 돌아 들자 불과 2~3 km도 달리지 않았는데  다음 절이 나왔다.

50번 한타지(繁多寺).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이미 오후 2시 반이 넘었다. 배가 고프니까 슬슬 기운도 빠지고 기분도 나빠지고 있었다.

51번 이시테지(石手寺)는 국보급 문화재가 많은 큰 절이었다. 절로 향하는 길목에 양쪽으로 회랑이 있고 이 안에 수공품을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시테지 본당은 국보라고 했다. 규모가 크고 방문객이 넘쳐났는데 인근에 '도고온천'이 있어 그 영향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온천이 생겨날 만큼 일본 3대 온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유명한 곳이다.  수백 년 전통이 있어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아오고 주변에 유서 깊은 절도 있는 것이다.

평등이라고 굵은 붓으로 써 놓은 글씨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스무 살 무렵에 '교육과 의료'만이라도 사회가 책임지는 그런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부할 수 있고, 아픈 사람이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1980년대에 비해 소득은 늘었지만 교육과 의료 불평등은 더 심해진 것 같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식들이 비정규직이 되고 못 배운 부모의 자식들이 어지간해서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워진 사회라면. 과연 희망이 있나? 입으로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도 수단껏 자식을 해외에 보내 스펙을 쌓게 하고 소위 '일류 대학'에 들여보내는 뒷바라지를 할 뿐 입시와 교육제도 개혁에는 침묵하는 현실.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는 않다.    

 
마쓰야마에 입성한 기념으로 맛있는 밥을 사 먹겠다던 결심은 실현되지 못했다. 겨우 절 앞 우동집을 발견해 요기를 했다. 밥을 먹으며 가이드북을 넘겨보니 가까이에 마쓰야마 유스호스텔이 있었다. 엊그제 길에서 만났던 순례자가  마쓰야마 유스호스텔을 이용해 보라던 말이 생각났다.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남자분이 반갑게 전화를 받더니 지금 당장 와도 체크인할 수 있다고 했다. 오후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이제 그만 달려야겠다.  숙소를 정하고 시내에서 느릿느릿 관광도 하기로 했다.


유스호스텔은 도고온천 인근 언덕 위에 있었다. 지도에 진입로 표시가 모호해 잠시 길을 헤맸다. 이발소에 들어가 물어본 뒤 진입로를 찾아 언덕 위로 숨 가쁘게 자전거를 몰고 올라가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리셉션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위해 가뿐 숨을 몰아 쉬고 땀을 뚝뚝 떨어트리며 숙박 신청서를 쓰고 있자니 여자분이 유리컵에 얼음물을 담아와 권했다. 잠시 감동. 방은 세 사람이 함께 쓰게 돼 있었다. 일박에 2100엔. 다음 날 아침식사는 따로 500엔을 내고 예약하게 돼 있었다. 와이파이, 세탁기와 샤워실 등 편의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다.
보조배터리 등을 충전시켜 놓고 자전거에 패니어 한 개만 달고 시내 관광을 했다. 온천을 먼저 할까 하다가 밤 11시까지 입욕이 가능하다고 해 우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며칠 전 페달 한쪽이 깨진 것이 있어 자전거숍에 들어가 교체했다. 양쪽 3천엔.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별로 비싼 게 아니었지만 숙박비를 2천100엔 지불한 게 의식돼 비싸게 여겨졌다. 페달 교체만 요구했지만 미케닉은 바퀴, 스포크, 곳곳의 볼트 등 전반적으로  꼼꼼하게 점검해주었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것 같아 멋져 보였다.


에히메 현 현청 앞 겐죠마에 역 인근 마쓰야마 성이 올려다 보이는 공원. 퇴근 무렵 한가롭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 뒤섞여  느릿느릿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거렸다. 신호가 바뀌자 물결처럼 길을 건너는 인파. 밀집한 상가, 화려한 간판들. 생전 도시에 살아본 적없는 사람처럼 낯설고 어리둥절했다. 도쿠시마를 떠난 뒤 이렇게 번화한 도시를 처음 만났다. 벌써 2주 이상 시간이 지났다.
미쓰코시 백화점이 보이길래 구경삼아 들어가 보았다. 백화점 지하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자전거들을 따라가 보았다. 지하 1층은 자전거 전용 주차장이었다. 지상으로 오르는 경사로 중아에는 자전거 전용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돼 있었다. 2시간까지는 무료인 자동 주차시설. 자전거 위주의 교통 환경이 부러웠다. 명동 롯데백화점에 자전거를 타고 간 적이 있는데, 뒤편 주차장 빈 공간에 어정쩡하게 자전거를 세워 놓고 무슨 금지된 일탈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어색하게 매장에 올라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백화점에 '주차'를  해놓고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백화점 앞 아케이드에서 조금 이른 저녁(우나기동 680엔)을 , 식당 옆  아만다 커피숍에서 아이스라테와 초코크림 케이크 (530엔)를 먹었다. 도시에는 지불만 하면 얼마든 달콤한 소비가 가능하다. 황석영 소설 '오래된 정원'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장기수인 주인공이 풀려나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비로소 감옥 밖을  실감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는 달콤한 기호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지 허기 때문에 먹는 음식은 아닐 것이다.

느긋하게 시내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도고온천과 유스호스텔 근처로 돌아왔다. 마쓰야마는 곳곳에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도시 브랜드로 설정해놓고 있었다. 소설 속 시대에나 다녔을 법한 증기기관차가 이끄는 전철이 가끔씩 시내들 돌아다니는가 하면  노면 전차가 딸랑딸랑 아날로그 경적을 울리며 달리곤 했다. 전차들과 뒤섞여 물결을 이루고 달려가는 자전거로 퇴근하던 수많은 직장인들. 대개 흰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온천 앞에서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온천 안에는  커다란 돌 욕조가 있는 욕탕이 두 개 있었다. 간결하고 소박한 실내.  일본의 대중탕 욕조들은 대개 감탄할 만큼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다. 머잖아 아내와 관광을 위해 마쓰야마에서 온다면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전차로 오즈 시에도 가 교토 칸 유스호스텔에서도 하룻밤 묵어보고 싶었다.  

온천욕을 마치고 나오니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느긋한 기분으로 온천 옆에 있는 카페에서 생맥주도 한 잔 천천히 마셨다. 카페 앞 광장 쪽에는 예의 '도련님'의 등장인물 모형들이 진열돼 있었다. 고집스럽던 봇짱(도련님), 교활한 교감 선생 등등.

편의점에서 500cc 캔맥주를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도쿄에서 관광차 휴가를 내 혼자 왔다는 37살 오오츠카상이 옆 침대에 짐을 풀고 있었다.
와이파이를 쓸 수 있는  휴게실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는데 유스호스텔 주인아저씨가 뭔가 신나는 일이 벌어질 것처럼 기대에 찬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마지꾸'를 보러 오라고 했다. '마지꾸? 그게 뭔가요? ' '마지꾸가 뭔지 모르냐?' '글쎄요...'마지꾸?  아하 매직?

투숙객 가운데 한 사람이 풍선아트와 함께 간단한 '마지꾸' 공연을 했다. 호텔이나 민박집과는 또 다른,무엇인가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 이들이 내게 마쓰야마에 대한 이미지를 이렇게 남겨주었다.


이전 15화 15. 동화에서 현실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