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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16. 2020

18.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하나 ...

# 18 -  이마바리 해변공원- 시코쿠주오 시 비즈니스호텔


운행거리  85.52 km


텅 빈 바닷가. 새벽 세 시도 안 돼 잠에서 깨었다. 약간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화장실에  다녀온 뒤 더 자고 싶어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텐트 지퍼를 열고 조금 더 누워 게으름을 피우며  동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무척 더울 것 같다.


저녁에 삶아둔 감자와 저녁에 먹다 남겨 둔 밥에 후리가케를 뿌려 주먹밥을 만들고 빵과 함께 도시락을 준비했다. 아침은 커피와 감자 몇 알, 토스트를 먹었다. 세토내해 (瀬戸内海)는 혼슈와 시코쿠 사이 호수처럼 닫힌 바다라 일출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딘들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랴. 

 

외딴곳인데도 산책을 나온 사람이 있었다. 이미 짐을 다 꾸려 놓고 양치질까지  마쳤기에 야영을 한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6시 반 출발. 한 동안 한적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가 다시 196번 도로 쪽에 합류해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내리며  10km가량 달렸다.

도요(東予)항 부근에서 섬 안쪽으로 우회전해서 마주 보이는 거대한 산군을 향해 달리게돼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번 요코미네지(橫峰寺)는 해발 745미터 지점에 있다. 과연 자전거가 어느 지점까지 갈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 산 위에 있는 요코미네지에 가기 전에 길목에 있는 61번 고온지(香園寺)에 먼저 들러 가기도 한다기에 가서 길을 묻기로 했다.


해안에서 48번 도로로 2km가량 달려가다가 다시 좌회전 해 전형적인 농촌 들판. 6월. 양파 수확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시기가 비슷했다. 경북 의성 쌍호 마을에 갔을 때 6월 첫 주에 양파를 캐내고 그곳에 다시 모를 낸다고 했다. 경북 의성의 '양파'나 시코쿠의 '다마네기'나 그것을 길러내는 자연의 힘은 똑같다. 햇살과 바람 그리고 정직한 땀. 국경을 긋고 나와 남을 구분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일.

금강경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모든 상을 가진 것이 다 허망하니 만약 상을 가진 모든 것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면 여래를 보게 될 것(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라 했다.


아침 8시 반, 출근시간이 지난 한가한 시간.  61번 고온지(香園寺)는 마을 한쪽에 있었다.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낯설었다. 무슨 강당 같은 건물 안에 본당이 있었다. 극장삭 접이식 의자도 낯설었다. 본존불은 한 손으로 다른 손의 엄지를 감싸고 있는 '대일여래' 불이었다. 순례길에 안 것이지만 일본 진언종에서는 이 대일여래가 가장 중요한 부처이며 우리 불교에서는 비로자나불로 이라고 한다. 태양처럼 온 세상에 불법을 비추는 대일여래. 이 때문에  '다이니치지(大日寺)'가 많았는데 무지한 나는 단순히 일본의 국수적인 생각 때문에 정하 이름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두 손을 하나로 모아 엄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중생과 부처, 깨달은 경지와 미혹의 경지가 본디 하나라는 것이라고 했다. 쉬운 경지가 아니다. 그러나 새겨 읽다 보면, 적금을 부어서 차를 사고 집을 사는 일처럼 당대에 덕을 쌓아 당장에 성취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조바심을 내는 나 같은 자들의 천박함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절이 거대한 현대식 건물로 '부흥'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코보 대사가 이 근방에서 괴로워하는 임산부를 보고는 향을 피워 기도를 올리자 아이를 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탓에 아이를 무사히 낳기 원하는 이들이 시주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건물은 어쩐지 종교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다. 강남의 위압적인 대형교회들을 보면 어쩐지 이곳에 예수가 깃들기 어렵겠다 싶던 것처럼 말이다. 종교가 세속을 뺨치는 일이 흔하다. 자식 일류대학 합격이나 집값 오르게 해달라거나 사업이 '대박나게' 해달라는 일에 종교의 효용이 있다면 우스꽝스럽다. 그렇게 불려 다닐 부처님과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하다.


참배를 하고 납경소에 갔더니 머리를 파랗게 깎은 젊은 비구니 스님이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60번 사찰 요코미네지 가는 길을 물었다. 11번 도로에서 좌회전해서 3.5km , 이와네(石根) 우체국 근방에서 훼밀리마트를 보고 좌회전 한 뒤 산을 향해 난 147 도로로 끝까지  올라간 뒤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147번 도로는 처음에는 완만하게 시작해 점차 가팔라졌다. 경사가 급해도 차도 없고 날씨도 맑아 산길을 오르는 기분은 상쾌했다. 이 아침 이 토록 고요한 풍경을 느릿느릿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 중턱에 직접 커피를 볶는다는 커피숍도 있었지만 닫혀 있었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몸 안의 세포들이 간절하게 원했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다. 물통에 남아 있는 물과, 도시락으로 싸온 빵을 먹고 다시 기운을 내  산을 올랐다. 

10시 30분. 자전거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해발 330미터 지점에 도착했다. 샘물과 휴식소가 있어 숙박도 충분한 장소였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산길을 걸어 올랐다. 60번 요코미네지까지  왕복 4.4km. 걸을 만한 거리다. 수통에 물을 담고 핸들바백만 어깨에 걸치고 걸었다. 

'악로 통행주의' 표지판. 산사태로 무너진 흔적. 조금 긴장하게 되는 분위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험로(險路)라고 했을 텐데 싶었다. 악(惡)은 아무래도 상태의 좋고 나쁨보다는 선(善)의 반대, 가치 판단의 의미가 강하다.
마치 지리산의 백무동 같은 들머리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숲 그늘이 짙고 곧게 뻗은 삼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 길가에 '인생 즉 헨로'라는 글을 달아놓았다. 사는 일이 그렇지. 끊임없이 내면에 물음을 던지며 걷는 일이겠지. 공감하면서 고사리가 무성한 습기 많은 산길을 걸어 올랐다. 적막하고 고요했다. 고독감 때문이었을까 어느 지점에선가. '아...!' 하고 짧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메아리라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외침에 놀란 듯  갑자기  앞쪽 수풀 속에서 불쑥 사람이 나타났다. 회색 전통 전통 의상을 입은 60대 중반쯤의 순례자. 나도 그도 서로 놀랐다.  
도요타시에서 왔다는 그는 먹물 염색 전통 복장에 적잖은 세월이 느껴지는 삿갓, 금강장을 짚고 있어 경륜이 느껴졌다.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자신의 배낭에 달고 있던 작은 나무 조각을 기념품이라며 내게 주었다. 자신이 직접 붓글씨로 썼다는 청정(淸靜) 두 글자. 이 역시 상당한 미의식이 느껴졌다. 


11시 30분. 한 시간 만에 드디어 해발 745미터 요코미네지(橫峰寺)에 도착했다. 가파르긴 했지만 숲 속으로 난 등산로는 무난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이시즈치산(石鎚山 1982m) 중턱이다. 일본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여유가 된다면 산 아래 짐을 두고 이 산을 등정해볼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순례 일정에 집중하면서 막상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독경을 하고 오사메후다에 한 마디 적어 넣고 납경소에 들렀다. 눈이 커다란 젊은 스님이 걸어서 왔는지 물었다. 자전거로 순례 중이고 산 아래부터는 걸어왔다고 대답하니 호오 그래요? 하면서 관심을 기울여주었다. 요코미네지 위쪽에 코보 대사의 수행처 호시가모리가 있다는 것도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가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가게 된다면 이시즈치 산정, 호시가모리에도 올라가고 싶다.

 
11:50  하산 시작. 큰 근심거리였던 요코미네지 참배를 마쳐 마음이 가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여전히 사찰순례를 숙제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스스로 마음을 내어 찾아가는 길인데 무슨 업무 스트레스처럼 여기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럽다 싶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의 시가 떠올랐다.


시코쿠를 떠올리고 떠나올 때의 내 심정은 슬픔에 겨워 참담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이어 사별을 하고 있었고 쇠락해가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비애. 삿된 욕망을 좇아본 적도 없는데 삶은 늘 고달팠고 정열을 바쳐온 일들은 점점 가망이 없어져 보였다. 세상이 점점 더 불의하고 불평등하며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생각.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성의 힘으로 짐승의 욕망을 제어해온 과정일 텐데 최근에는 국내외 할 것 없이 역진하고 있다는 생각.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삶이 허망해졌다. 여전히 유년기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지, 그동안 무엇인가를 성취할 때마다, 내심 어머니께 인정받고 싶은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갑자기 내 안에 세워 놓은 무엇인가가 하나가 툭 꺾인 기분이 들었다. 


오후 한 시. 자전거를 세워 놓은 지점으로 돌아왔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오전 내 혀를 빼 물고 올라오던 길을 휘파람 불면서 불과 10분 만에 내려왔다.

오후 2시 20분.  62 번 호쥬지(寶壽寺)에 도착했다. 아침에 들렀던  제61번 고온지(香園寺)에서 11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3.2km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본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휘장으로 둘러놓아 접근이 어려웠다. 살갗을 태울 만큼 볕이 따가웠다. 기온이 34도쯤 되는 것 같았다. 절 입구에서 늘씬한 로드바이크를 탄 사내가  내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었다. 미처 알아듣지 못해 그냥 어색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의 반응이 실망스러웠는지 그는 뭔가 조금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스쳐 지나갔다. 본의 아니게 미안했다.


63번 기치죠지(吉祥寺)는 호쥬지에서 불과 1.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11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만날 수 있었다. 호쥬지에서 만난  로드바이크 사내는 여기서도 함께 참배를 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아내인 듯한 여자가 꽤 비싸 보이는 렉서스를 절 앞에 대 놓고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음 절까지는 자전거로 달려가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줄곧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음 절에서는 앞바퀴를 분리해 뒷 트렁크에 싣고는 승용차를 타고 가버렸다. 남편의 자전거 순례를 아내가 이런 식으로 뒷바라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치죠지((吉祥寺)는 우리 발음으로는 '길상사'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떠올랐다.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길상사는 '대원각'이라는 요릿집이었다. 삼청동 저택에 살던 문예반 동기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해 따라가던 중에 불쑥 대원각에 들어가 갈비탕을 사준 적이 있다. 고등학생의 씀씀이도, 서울 복판에 그토록 자연이 간직된 요릿집이 있다는 점도 내게는 놀랍기만 했었다. 1990년대 말.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대원각 주인이  법정스님에게 그곳을 통째로 시주해 '길상사'라는 절이 되었다는 뉴스도 놀라웠다. 


금강경에서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보화를 시주하고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많은 갠지스강들의 강변에 있는 모래만큼 많은 보화를 시주하는 것의 복덕이 크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금강경)의 이치를 깨닫고 잘 지닌 채 타인들에게 전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던 말씀이 떠올랐다.


64번 마에가미지(前神寺)도 3.2km가량,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1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 잠시 우회전한 지점이었다. 마에가미지(前神寺) 참배를 마친 시간은 오후 2시 40분경이었다. 숙소를 찾아가기도 어중간한 시간이고 65번 산카쿠지(三角寺)까지는 48.5 km.  꽤 먼길을 달려가야 한다. 빠듯한 시간이다.  열심히 달리면 두 시간이면 가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착각이었다. 시코쿠 섬의 북쪽 해안에서 길쭉한 한 면을 다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먼 길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몸은 지쳐 있었다.
꼬마들이 학교 파할 시간이었다. 11번 도로는 새로 낸 자동차 길이라 이면에 오래된 옛길이 거의 나란히 뻗어있었다. 사람들 얼굴만 보아도 반가워 일부러 옛길로 달렸다. 평탄한 길이라 한동안 줄곧 시속 30km 내외를 유지했다. 조금씩 페이스가 떨어지고 피로감이 높아졌다. 
도중에 규동 체인점이 있어 몸도 식힐 겸 들렀다. 에어컨을 틀어 놓아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었다. 밥을 먹고 사막 같은 길을 두 시간가량 달렸다. 시코쿠주오시(四国中央市) 경계에  완만하지만 꽤 긴 고개가 있었다. 내려서 끌고 가자니 더 지칠 것 같아 기를 쓰고 페달을 밟으며 올라갔다. 이미 다섯 반이 넘어 있었다.

언덕 마루 앞에서 앞서 가는 자전거 순례자를 만났다. 뒤에서 볼 때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여자였다. 그는 걸어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라... ' 같은 순례자인 것을 확인하고 무척 반가워했다. 근 30분 이상 언덕길을 걸어내려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다찌 사토미 상은 '도쿄에 사는 20대'라고 했다. 내 딸도 스무 살이라고 하니 깜짝 놀랐다. 도대체 몇 살인데 딸이 스무 살이냐고. 꽤 많다고...

자전거 순례 출발한 지 24일 째라고 했다. '왜 순례를 하고 있나요? ' '작년에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면서 순례하고 있어요.' '아... 할아버지가 제일 중요한 분이었군요. 부모님이 아니고? ' ' 부모님은 이혼해서 함께 살지 않아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요.'

기억을 되살려보니 26번 곤고후쿠지에서 택시 기사가 '예쁜 여자가 혼자 자전거로 순례를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와이 온나'가 바로 아다찌 상이 었다. 오늘 어디서 잘 계획이냐고 물으니 자신은 시코쿠주오시에 있는 5천 엔짜리 비즈니스 호텔을 예약해두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하니 사토미는 자기가 예약을 해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전화기로 인터넷에 접속해 일본 여행 숙박 예약 사이트 자란넷(www.jalan.net)을 통해  1박 3,600엔짜리 리브 마크스 호텔을 찾아 예약을 해주었다. 저녁도 함께 먹자고 했다. 감사의 뜻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하니 당신은 손님이니 자신이 사는 게 맞다고 했다. 

각자 호텔에 가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려 놓은 뒤 역 앞에서 만나 이자카야에서 여러 안주와 함께 맥주를 무척 많이 마셨다. 한류 드라마 펜이라는 가게 주인 부부도 합세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안 주인은 핸드폰도 당시 신제품이던 삼성 노트2를 쓰고 있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묵언수행을 하듯 입 다물고 지내다 떠들썩한 술자리에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 일이 낯설지만 즐거웠다. 계산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반씩 '분빠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11시가 다 돼 술자리가 파했다. '김상 내일 몇 시에 출발하세요?' '보통 7시쯤 떠납니다.' '아, 저는 8시쯤 출발해요.' '네... 힘내세요.' ' 아마도 또 만나게 될 거예요. 가는 길이 같으니'


길에서 아는 이를 만나면 반갑겠지만, 그보다는 혼자서 호젓하게 달리고 싶었다. 그 점은 어렵게 계획을 세우고 순례에 나섰을 아다찌 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600엔짜리 비즈니스호텔은 토요코인에 비해 떨어질 게 없었다. 다만, 아침밥이 없었다. 대신 로비에 컵라면 자판기가 놓여있었다. 취하기도 했지만 야영보다는 호텔이 편한 것은 사실이다. 신경 쓸 일도 없고. 무척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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