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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15. 2020

17. 아들노릇 아비노릇

#17 - 마쓰야마~이마바리 시 사쿠라이 해변

마쓰야마 유스호텔~이마바리시(今治市) 사쿠라이해변 만남의 광장(桜井海浜ふれあい広場)


주행거리 79.81km


'모두는 개인을 위해, 개인은 모두를 위해'

유스호스텔 복도에 낯 익은 구호가 붙어 있었다. 협동조합의 슬로건이기도 한 이 말.  세상이 나이질 수 있다는 낭만적 기대를 가진 사람들의 언어다. 화장실에는 지구를 위한 고지함율 100% 재생지이니 아껴 써 달라는 당부. 모든 홍보물을 재생지로 만들려고 노력해온 내게는 반가운 메시지였다. 사실 홍보물에 쓰는 재생지는 일반 용지보다 싸지도 않고 수급도 원활하지 않아 인쇄소에서 꺼리기 때문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아침 7시. 1층 식당에서 전날 예약(550엔)해 둔 아침을 먹었다. 비지니스호텔들처럼 뷔페식으로 차려둔 음식들도 만족스러웠다. 현미밥에 햄과 샐러드와 채소 미소 된장국. 옆에는 토스트와 시리얼. 커피. 짐을 꾸리고 여덟 시가 다 돼 숙소를 나섰다. 하룻 동안 후방으로 휴가를 나왔다가 전선으로 돌아가는 병사만큼이나 마음이 비장해졌다. 어슬렁 어슬렁 한가롭게 관광한 마쓰야마. 봇짱 기관차가 달리고 퇴근 흰옷을 입고 자전거를 탄 인파가 밀려가던 거리.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시민적 교양이 넘치던 유스호스텔도.


52번 다이산지(太山寺)로 가려면 출근길 시민들과 뒤섞여  해안쪽으로 달려야 했다. 컨테이너 차량들과 부두가 창고와 산업시설들을 지나친 뒤 다시 북쪽으로. 절은 도고온천 인근 마쓰야마 유스호스텔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내에서 조금 헤매다 오전 9시쯤 절에 도착했다. 본당까지는 일주문에서 500 미터 가량 산을 올라가야 한다. 신음소리를 내며 오르막을  오르는 내게 승용차를 타고 가던 아주머니들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서울서 왔다니까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1305년 마쓰야마의 성주인 고노(河野)가 기증했다는 다이산지의 본당은 일본 국보라고 한다.


53번 엔묘지(円明寺)는 다이산지에서 불과 3Km 근방 시내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이한 건 없었는데 이 절에는 1924년에 순례를 하던 미국사람 스타르가 발견했다는 가장 오래된 동판 오사메후다(納札)가 유물로 보존돼 있다고 한다. 오사메후다는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주소, 기원하는 바를 적어 본당과 대사당 앞 함에 넣는  것이다.  순례자들끼리는 이것을 명함처럼 주고받기도 했다.  


엔묘지를 참배하고 나니 9시 30분. 당분간 해안선을 따라 이마바리시(今治市)까지 줄곧 달려야 한다. 54번 엔메이지(延命寺)까지 직선 거리는 36km다. 엔묘지에서 나와 건널목 사진을 찍으려 돌아섰더니 옆집 할머니가 나와서 엔메이지 가는 쪽은 이쪽이 아니고 저쪽 교각을 지나서 곧장 가라고 알려주신다. 갈림길에서 주춤하는 나를 지켜봤던 모양이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소풍이라도 가는지 조잘대며 곁을 스쳐갔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시인성 높은 노란 모자다.

시가지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달렸다. 시코쿠 지도를 보면 좌우로 조금 길게 뻗어 있고 북쪽 바다를 향해 양 끝에 뿔 두 개가 혼슈 쪽으로 솟아 있는데, 오늘은 왼쪽 뿔을 돌면서 196번 국도, 이마바리가도를 달려야 한다.  이마바리시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 참배하고 뿔의 오른쪽 사면에 있는 바닷가 사쿠라이 해변공원에서 야영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해안 도로지만 태평양에 면해 있는 남쪽 바다와 달리 북쪽 세토내해는 파도도 없고  바다다운 호방함고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자동차 전용도로가 분리된 곳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뒤에서 달려오는 트레일러들을 의식하면서 긴장한 채 달려야 하는 구간이었다. 보행자나 자전거를 위한 도로가 구분 돼 있지만 하수관로가 밑에 깔려 있거나 요철이 심해 불편했다. 그래서 그냥 자동차 도로로 빠르게 달리다보면 엄청난 속도로 추월하는 트레일러들에 한 번씩 휘청 몸이 흔들리고 나면 위축돼 다시 자전거 도로로 피해 들어가는 일이 반복 됐다.


보행자나 자전거 통행이 많지 않아 갈대와 풀들이 앞을 가로막는 곳도 있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가다가 풀들에 부딪쳐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다. 더러 호조(北条)같은 작은 마을들을 관통하기도 하지만 오전 내내 인가가 없는 해안길을 달렸다.마쓰야마 시와 이마바리 시 중간쯤에 있는 가자하야노사토후와리(風早の郷 風和里)  미찌노에키에서 잠시 쉬었다. 해안을 향해 자리잡은 널찍한 휴게공간. 처마 밑으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제비들응 넋놓고 구경했다. 어릴 때 살던 돈암동 집 처마 밑에 봄마다 제비가 집을 짓곤했다.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제비가 새끼를 낳고 길러 가을에 남쪽으로 떠나는 걸 응원하던 추억.

제비가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휴게소에 로드령 자전거를 타고 들렀다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가끔 보이던 도보 순례자들을 해안길에서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줄곧 시속 30km 가량을 유지하며 빠르게 달리는데도 다소 지치는 길이었다.구름에 가려 해가 '쨍하게' 비치지 않으면서도 뭉근하게 달아오른 날씨 때문에 더욱 그랬다.

김동리는 '역마'라는 소설에서 화개장터 인근 섬진강 길을 묘사하면서 아무리 걸어도 '길멀미'가 나지 않는 길이라고 했었다. 쌍계사 쪽으로 지리산에 갈 때마다 그 구절이 떠오르곤 했다. 어쩌면 그렇게 적합하게 묘사했을까. 그러나 어쩐지... 이마바리가도를 달리며  길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바다쪽에서는 상쾌한 바람 한 자락 불어오지 않았다.

온종일 땀을 흘리며 달리다 보면, 내 몸이 자동차와 다를 게 없구나 싶어졌다. 탄수화물을 녹말화 하고 포도당으로 분해해 연소시키면서 달린다는 걸 잘 이해하게 된다. 에너지가 떨어지면 기분이 침울해지고 먹고나면 거뜬히 의욕이 솟곤 했다.

침묵 속에 달리다보면 의지와 무관하게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거의 어떤 기억들. 그리고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생각. 그 밖에는 뭘 먹을까, 어디 가서 잘까 이런 생각이 절반 이상인 것 같았다. 이렇게 단순해지는구나. 단순해지기 위해 떠나왔구나 이것도 축복이구나 생각했다.


12시30분, 길가에 있는'돈돈라멘'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이 그립기도 했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기가 미안해 주방과 마주 보고 앉는 바에 앉아 먹었다. 덕분에 라면을 어떻게 조리하는지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비닐 봉투에 든 생면을 뜯어 거름망에 담아 가스렌지 위에 올려둔 커다란 국물 솥에 몇 차례 토렴을 하고 돼지 뼈를 우려냈을 국물을 부은 뒤 양파와 숙주 같은 채소 등을 한 줌 올려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500엔). 식당 손님들은 대부분 연두색 유니폼 입은 근처 '태양석유' 직원들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와 라면집에서 만화책을 보며 라면을 먹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후다닥 회사로 돌아갔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다들 외로워 보였다. 라면집을 나와 태양석유 정유탑에서 불을 뿜는 광경을 지나쳐 다시 달렸다.

이마바리 시로 들어가기 전에 호시노우라 해변공원이 있었다. GPS에 캠핑장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공원 관리사무소는 비어있고 샤워 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국도변 자동차 소음도 시끄러울 것 같았다. 아직 숙박을 위해 멈추기는 이르다 싶었다. 가까이에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까지 연결하는 니시세토자동차도로(세토우치 시마나미카이도)가 있었다. 세토 내해에 있는 섬을 9개의 다리로 연결하는 약 60km 달하는 자동차 도로. 다리들에는 자전거ㆍ보행자 전용도로도 있다고 하지만 감히 넘어가 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길가에 에이코프(A Coop) 대형 매장이 보여 일부러 들러보았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생협의 역사가 20년 쯤 앞서고, 사업규모도 훨씬 크다. 그 가운데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생활클럽, 팔시스템,  큐슈 중심의 그린코프 같은 생협들은 '반전평화, 주민자치, 복지, 탈원전 운동, 제3세계 농민들과의 민중연대 등의 가치를 표방하면서 조합원들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비누파 생협'이라고 불리는 진보적인 생협들은 일본 역시 생협법에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어 따로 시민네트워크('네또')라는 준 정당 조직을 결성하고 시민후보를 지방자치단체 등에 출마시켜 단체장이나 시의원들을 상당 수 의회에 진출시키는 '대리인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리인 출마자들은  대개 조합원 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분들이고,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이들은 월급에서 200만원만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네또'에 내놓는다고한다. 개인의 경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협이 내세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개인의 출마도 2번까지만 허용되고, 그 뒤에는 후배 활동가에게 출마 기회를 양보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생협운동은 한살림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생협들에 비해 유기농, 친환경물품 둥 물품취급기준은 더 엄격하다. 일본 생협은 고베시 같은 곳은 전 주민의 80% 조합원일 정도로 대중적인 기반이 훨씬 넓어, 일반 시장에서도 생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시민단체나  생협 출신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경우는 소속 단체와의 관계보다 개인적 동기로 그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여를 단체에 반납하는 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생협 매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한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나를 따라오더니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오셋타이라며 주려고 했다. 도로에서 달리는 걸 보고 승용차로 따라온 것 같았다. 여전히 받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사양했더니 "실례인 줄 알지만 이걸 받아 주세요. 주스라도 마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오히려 정중하게 부탁하다시피 해 거절 하지 못하고 받았다. 시코쿠의 오셋타이 문화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에이코프  생협매장은 우리 한살림 매장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물품 구색 등에서 일반 마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는 저가의 중국산 생활용품까지 파는 백엔숍 (세리아)마저 함께 있었다. 한쪽에 접골원, 카페로 보이는 마마스키친 등도 함께 있었다.  매장에서 직접 만든 수제 도시락과 주먹밥(오니기리) 정도가 남달라 보이는 점이었다. 이곳에서 주먹밥, 쵸코칩쿠기,  우유, 순례중에 잃어버린 등산용 스카프, 아이이스크림 등을 샀다.(모두 750엔)


이마바리(今治) 시내로 접어들었다.  오후 2시 54분 엔메이지(延命寺)에 도착했다. 시내에 있는  규모도 그다지 크지 않은 사찰이었다. 해안을 따라 멀리 달려와 이마바리 시에 입성한 게  감격스러워 납경도 받았다.

여기도 드넓은 묘지를 끼고 있었다.죽음은 숙명이고 인간이 불안하고 나약하다 보니 종교가 필요하겠지. 불안의 근원에는 사멸에 대한 공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아예 죽음 뒤에 펼쳐질 상황들에 대해 나름의 종교적 내세관에 기대 불안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겠지.


20대 이후로 유물론적 세계관이 한동안 내 인식의 바탕이었다. 인간도, 인간의 정신 작용마저도 물질 작용의 과정이라는 논리가 어떤 면에서는 위안이 되었다. 죽어서 그저 바람과 흙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관계했던 사람들의 기억에나 잠시 흔적을 남길 뿐이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이성적 합리와 양심에 따라 앞을 향해 걸어가면 되겠기에 말이다. 설령 그것이 고난이나 죽음을 앞당길지라도.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후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이 때문일까. 세계도 인간도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영혼이나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힘에 대해 느끼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생명(이 역시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힘과 의지에 닿아 있는 부분이겠지만) 은 '물질의 합법칙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를 물질로만 보는 관점. 그런 신념이 근대를 열었고 이성에 대한 오만과 그에 바탕을 둔 산업주의 세계관이 거꾸로 인류와 지구 생태계를 위협 하고 있잖은가. 후쿠시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성물질들처럼.


이마바리 역시 차분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예의 시내 한 복판에는 언덕 위에 오래된 성이 있었다. 골목을 달리고, 물길을 건너며 시내를 헤매다 보니 절이 나타났다.  55번 난코오보오(南光坊). 오후 2시 50분에 도착했다. 88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 사(寺)자가 아니라 동네 방(坊)자가 붙은 절이다. 절 자체는 휑 하고 별 게 없는데 산문은 도로변에 거대하게 서 있었다. 이곳에도 예의 바로 옆에 더 큰 규모의 신사가 있었다.

두어 시간 내로 56번 다이산지(泰山寺)부터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 참배하고 해변 캠프장에 도달할 수 있을지.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한적하지만 잘 정비된 시내 도로를 3km 가량 달려 56번 다이산지(泰山寺)에 도착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절이었다. 인근에 있는 하천이 해마다 범람하자 코보대사가 주민들을 이끌고 제방을 쌓아 치수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실제로 다이산지는 축대 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57번 에이후쿠지(栄福寺)는 고속도로(196번도로 바이패스)너머에 있었다. 한 무리의 하교길 학생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티없이 맑은 표정. 그들의 내면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지만,삭발한 머리에 흰색 헬멧을 쓰고 흰색셔츠와 감색 바지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들은 대체로 쾌활해보였다. 심야까지 학원과 독서실을 전전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다.


오후 4시. 57번 에이후쿠지(栄福寺) 참배를 마쳤다. 절은 막 모내기 한 벼가 가득 찬 논들이 펼쳐진 들판 위에 살짝 올라 앉아 있었다. 대절 버스를 타고온 단체 순례자들이 오늘의 마지막 절에 들렀다는 듯 한가로운 표정으로 본당에서 내려서고들 있었다.


58번 센유지(仙遊寺)는 높은 산 위에 있었다. 완만한 언덕 위로 뻗어 있는 길을 느릿느릿 조금 한가한 마음으로 오르다 보니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산 위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도중에 생협매장에서 사 둔 주먹밥을 먹으며 기운을 차려야했다. 오를 수 있는데까지 간 뒤 결국 인왕문 못 미친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 올라야 했다.
절에는 온천도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잘 되어 있었다. 내려다보는 경치도 그만이라 하룻밤 묵어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내려가 자전거 끌고 올라올 일도 암담하고 예정에 없던 숙박도 내키지 않아 그냥 포기했다. 규모가 큰 현대식 건물도 있지만 본당은 제법 연륜이 느껴졌다. 절에서 진행하는 '공수도(가라테)' 강습 안내도 있고.규모가 상당한 절이었다.


지친 때문인지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회의감이 밀려왔다.혼자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갑자기 급습을 당한 듯,  밀려 든 회의감을 주머니속에 든 조약돌처럼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혼자 이렇게 침묵하는 순간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가.  말을 하지 않을 자유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게다가 순례길 내내 부모님을 깊이 만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베풀어 주는 사랑을 당연한 듯 받았고,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나의 내면은 조금 복잡해졌다. 삼국지류나 채근담 같은 책을 자주 읽던그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 자기 방어 논리가 필요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어른이 되었으니 스스로 아버지의 역할을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다'는 식의 자기 암시를 했던 것 같다.
이미 우리가 낳은 딸들이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나의 아버지보다, 내가 어떤 아버지인가를 더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과연 나는 딸들에게 어떤 아비일까. 사실 떠나올 무렵  대학 1학년 큰 딸 아이와는 말도 않고 불화한 중이었다.  갈등의 원인은 다양했다. 자정까지로 정한 잠정적인 귀가 시한. 입시지옥에서 풀려난 1학년이라고 해도 연일 술과 사교에만 몰두할 뿐 책 한 줄 안 읽는 것 같은 학업 태도. 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아도  얼굴에 쓰여있기 마련이라 딸 아이는 되도록 나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다시 이마바리 시내로 내려갔다. 일본의 조용한 소읍풍경.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았다. 산을 내려오는데  다섯 시 시보가 울려 퍼졌다. 마침 베르너의 '들장미'.  '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 중학교 음악시간에 친구들과 미소를 머금고  합창을 하던 광경이 생각났다. 해 질녘 귀가를 재촉하듯 울려 퍼지는 시보까지 더해지며 쓸쓸함이 깊어졌다.


59번 고쿠분지 (国分寺)까지는 9.3km 가량 떨어져 있었다. 센유지에서 산 중턱까지 내려와 우측으로 산간 도로를 한동안 달리다가 좌회전 해서 해안 쪽으로 한참을 달려 내려가야 했다. 이미 납경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지나 있었다. 동네 수퍼에 저녁장을 보러 온 주부들이 분주한 시간이었다.
시 외곽에 있는 고쿠분지에 도착해 이미 불이 모두 꺼진 향로에 향 세 촉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했다. 이렇게 오늘 하루 순례가 마무리 되었다. 온종일 침묵 하는 동안 마음 속에 무수히 피어나고 사라진 수많은 번민과 회억들. 허공으로 흩어지는 향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후 5시 50분. 서둘러 잠자리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다. GPS가 가리키는 해변 캠핑장까지는 5.6km. 시내를 벗어나자 마을도 집도 보이지 않았다. 먹을거리도 없이 야영을 해야 하나? 난감해하는 순간 작은 시골 구멍가게를 발견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이곳에도 소포장 쌀은 없었다. 사정해서 쌀 1kg을 샀다. 감자1kg 바나나 한 송이까지(모두 752엔)  쌀을 사고 나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어둠이 짙어가는 시 외곽 인적 드문 도로를 달려 바닷가를 찾아갔다.
'사쿠라이 해변 만남의 광장'. 이름이 무색하게 아무도 만나기 어려울 분위기였다. 종려나무가 길게 뻗어있고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하지만, 뭔가 인구가 줄어들며 퇴락해가는 서글픈 분위기가 느껴졌다. 조금 무섭기까지 한 해변이었다. 화장실은 낡았지만 역시 깨끗하게 청소 돼 있었다. 가까이에 시멘트로 지어놓은 배 모양의 어린이 놀이기구가 있길래 이 안에 텐트를 쳤다. 바람을 막아주었고, 배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세 칸 있어 걸터앉아 밥을 먹기도 좋았다.


내일 가야 하는 60 번 절 요코미네지(横峰寺)는 지도상으로도 아득한 산 위에 있었다. 해발 696미터. 이 역시 북한산 높이에 가깝다. 어떻게 갈 것인지...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가끔씩 퉁퉁퉁 고깃배들이  엔진을 울리리면서 잠을 깨웠다.  좀 더 쓸쓸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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