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시코쿠주오 시 ~간온지 시(観音寺市) 해변 고토히키공원
운행거리 67.53 km
5시쯤 잠에서 깼다. 아침밥이 없는 호텔이라 로비 자판기에서 카레맛 컵라면을 사다 삶은 계란, 감자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맛을 느낄 수 없는 메마른 식사지만 낮 동안 흘릴 땀을 미리 넣어둔다는 심정으로 삼켰다. 창 밖으로 항구가 내다보였다.
짐을 꾸려 7시 30분쯤 호텔을 나섰다. 패니어 4개와 핸들바 백, 랙 팩까지. 가방 여섯 개를 들고 내려가 매달았다. 시코쿠중앙이라는 지명은 섬의 북쪽 해안선의 가운데쯤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까? 왼쪽에 치우쳐 있는 마쓰야마와 오른쪽의 다카마쓰 사이 세토내해(瀬戸内海) 해안 중간 지점. 왁자한 활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단정하게 정돈된, 고층건물도 거의 없는 작은 도시. 낡고 휑하게 빈 곳이 많지만 깨끗한 거리.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상인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넘쳐났을 과거의 순간들이 그려졌다. 한국과 마찬가지지만 지역이 쇠락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가? 싶어 마음이 허전했다.
출발지점인 다카마쓰가 멀지 않았다. 섬을 거의 한 바퀴 다 돈 것이다. 훼밀리마트에서 우유 (110엔), 동네 빵집서 빵(450엔)을 사서 우유는 마시고 빵을 패니어에 넣고 길을 나섰다. 65번 산가쿠지(三角寺)까지 직선거리는 불과 8km 남짓, 물론 지도상에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표시돼 있지만 고도가 그다지 높지 않겠지 싶었다. 11번 국도와 나란히 뻗은 시내 도로를 따라 3~4 km 가량 달리다 산가쿠지가 있는 산 쪽으로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길머리를 못 찾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헤맸다.
해가 뜨면서 기온도 오르고 갈수록 호흡도 가빠졌다. 다음 사찰 66번 운펜지(雲辺寺)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내려와 해안을 따라 뻗어있는 11번 국도를 달려야 할 테니 끝까지 자전거를 가지고 올라갈 필요는 없응 것 같아 500미터쯤 남겨둔 지점에 자전거를 세워 놓고 걸어 올랐다. 걷기 시작하니 격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진정되고 기분도 생각도 평화로워졌다. 마치 딴 세상으로 갑자기 이동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사는 일에서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9시, 산카쿠지(三角寺)에 도착했다. 북한산의 또 다른 이름인 삼각산이 떠올랐다.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세 봉우리가 모여있어 삼각산인데 이 절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자료에는 코보 대사가 21일 동안 삼각형 '호마단'을 세우고 수행한 곳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호마(護摩, homa) '는 바라문교에서 전래된, 제물을 불에 던져 타오르는 화염이 하늘의 여러 신들의 입에 도달하고, 신은 이것으로 힘을 얻어 마귀를 항복시키고 사람들에게 복을 준다는 종교의식이라고 한다. 어떤 무서운 요괴들이 있었기에 21일이나 불길에 제물을 던지면서 '호마'를 해야 했을까.
무서운 전설과 달리 절은 아름다웠다. 꽃들을 잘 가꾸어 놓은 정원, 본당에 불상 대신 모셔 놓은 단정한 꽃꽂이. 배경에 창호지 바른 장식 없는 문이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에게는 설악산이나 지리산이 ‘병원’이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 봉정암도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빈 방석만 자리잡고 있었다. 숲으로 뚫린 유리창을 배경으로. 어느 가을엔가 설악의 불타는 단풍을 배경으로 놓여있는 빈 방석을 보았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봉정암 사리탑도 서북능선과 용아장성 사이 허공을 배경으로 서 있다. 텅 빈 충만? 조상들의 미의식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산카쿠지의 정원과 본당의 꽃꽂이 화병도 그랬다. 정원 구경도하고 잠시 한숨 돌리며 쉬었다.
산카쿠지에서 내려와 11번 국도를 따라 해안을 달렸다. 대형 트레일러와 트럭들이 질주하는 도로변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달렸다. 이 구간에는 자전거 도로가 없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틀 전 마쓰야마를 떠나 해안길 울 달리면서 보았던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쓴 채 휴게소 벤치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온몸이 새카맣게 그을러 만화 주인공처럼 특이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일본 일주를 하는 이들을 꽤 여럿 만났다. 남한 땅(99,720㎢)보다 네 배 가량 넓고(37만 7835㎢)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다를 건너기도 해야 하는 일본 일주는 몇 달 걸리는 대장정일 것이다. 인사를 나누었다. 내게 일본 사람처럼 생겼다고 했다. 로드 자전거를 타고 온 또 한 사내가 우리 곁에 와서 인사를 했다. 주말이라 자전거를 타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우동 많이 먹었느냐. 가가와현(香川県)을 일본에서는 '우동현'이라고 한다며 킥킥 웃었다. 실제로 이 동네는 라멘집보다 우동집이 많았다.
다시 66번 사찰 운펜지(雲辺寺)를 향해 출발. 해안으로 뻗은 11번 국도를 따라 미노우라(箕浦)역까지 달린 뒤 우회전해서 241번 도로와 8번 도로로 로프웨이 산로쿠(山麓) 역까지 올라가는 일도 힘겨웠다.
도중에 콘크리트 군사시설 유적지가 있어 웬일인가 싶었다. 이들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군대를 증강하면서 이곳에 포대가 들어섰던 흔적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살던 북한산 자락 정릉 인근에도 '토치카'가 많았다. 어린 우리들은 그것이 전쟁의 흔적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철부지들에게는 그저 전쟁 놀이터일 뿐이었다.
볼거리도 없는 완만한 오르막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민가는 거의 보이지 않고 개 훈련소나 '애완동물 묘지' 같은 곳만 보였다. 사람들끼리는 점점 더 외로워지고 빈 자리를 동물들이 채우고 있다. 미국의 애완동물 시장이 60조 원에 달한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다. 일본도 한국도 다르지 않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 경기도 광주의 산속에 살던 시절 골든리트리버 강이와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며 깊은 정을 나누었다. 아이들도 가족으로 여기며 함께 자랐다. 강이가 늙어 죽고 우리도 서울로 이사 온 뒤로는 반려동물은 들이지 않았다. 실내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일도 도시환경도 동물들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일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운펜지 산로쿠역에 도착했다. 로프웨이를 타고 88개 사찰 가운데 최고 지점(해발 1000미터)에 올라야 한다. 여기까지 오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운임 왕복 2천엔. 자전거는 주차장에 세워두고 올라갔다. 도착한 산록의 역에서 절로 향한 완만한 오르막 능선이 가가와현과 도쿠시마현의 경계였다.
길가에 오백 나한상이 늘어서 있었다.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표정과 자세가 각양각색이었다.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절 같았다. 로프웨이를 타고 오를 수 있기 때문인지 한가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드문드문 있을 뿐 산중 고찰의 정취는 느끼기 어려웠다. 절 곳곳에 '큰 소리 내지 마시오'.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 '만지지 마시오'. 금지와 금지의 말들. 어쩐지 절로 자존감이 낮아진 느낌. 지시와 금지가 많을수록 자존감이 떨어지고 사고와 행동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이 때문인지 별 감흥없이 절을 둘러보고 하산하기로 했다. 10여 분 로프웨이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찢어진 바지를 좀 더 야무지게 꿰맸다.
로프웨이 산로쿠 역에서 67번 다이코지까지는 직선거리 10.3km 다. 산 아래 휴식소에서 도시락으로 싸 둔 주먹밥을 먹고 15분쯤 벤치에 누워서 잠을 잤다. 주차장에서 보았던 자전거가 내리막길을 휙 스쳐갔다. 나도 다시 길을 나섰다. 3 킬로미터쯤 달려 2시 반 경 횡단보도에서 앞서가던 그 친구를 만났다. 마레나가 쓰요우. 야마구치 현에서 온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얼핏 60번 요코미네지 본당 앞에서 합장을 하고 있던 그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통성명을 하고 67번 다이코지(大興寺)까지 함께 달렸다.
평평한 들판 위에 드문드문 집들이 흩어져 있는 간온지 시(観音寺市). 토요일 오후의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마레나가는 자기가 사는 야마구치 현은 규슈 바로 위. 시코쿠섬과 마주보고 있는 지점이라며 지도를 펼쳐 설명명했다. 그의 자전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생활자전거, 여행 초기에 만났던 야마시타상이 타던 바로 그 자전거였다. 그는 이 자전거로는 순례를 계속하기 어려워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자전거 대신 스쿠터로 남은 순례를 마저 하겠다고 했다.
본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잠시 묵상하는 식으로 절을 도는 나에 비해 그는 본당과 대사당을 돌며 합장하고 기도하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그가 모든 의식을 마칠 때까지 벤치에 앉아 기다였다. 그는 자판기에서 자판기에서 생수를 두 개 사서 하나는 내게, 나머지 하나는 절 앞 뙤약볕에 앉아 탁발을 하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하는 하는 행동거지와 사려 깊은 말들에 감동했다.
68번 간온지(観音寺), 69번 진네인(神恵院)은 간온지 시 해안가에 함께 있었다.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꽤 오랫동안 달렸다. 도시 이름 때문인지 차분한 거리 분위기 때문인지 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마을이었다.
간온지(観音寺), 진네인(神恵院) 2개의 영장(霊場)이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특이했다. 메이지유신 당시 신사와 절을 분리하는 정책에 따라 고토히키하치만구(琴弾八幡宮)의 아미타여래를 진네인(神恵院)으로 옮기면서 한 울타리 두 절이 되었다고 했다.
저녁 다섯 시. 납경 시간도 끝나고 탐방객과 순례자들도 절을 빠져나가는 시간. 오늘의 순례를 마칠 시간이다. 마레나가는 내게 오늘 어디서 잘 거냐며 내 잠자리를 걱정해주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몇 가지 정보를 찾아주고는 자신은 가까이 있는 부두에 가서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헤어지며 내게 조심하라고. 건강하라고 몇 번씩 당부를 하고 그는 떠나갔다. 갑자기 허전해졌다.
야트막한 산기슭의 오래된 사찰과 그 앞에 펼쳐진 묘지, 그 너머로 이어진 마을.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이 그렇게 함께 있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떤 글에선가 사람이 죽으면 소멸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는 주장을 읽었다. 종교인이 아니라 과학자가 발표를 했다는 그 말을 어쩐지 그대로 믿고 싶었다.
순례자들이 많이 잔다는 절 뒤 산 위에 올라가 보았다. 바닷가 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화장실도 있었다. 자려면 못 잘 것은 없지만 주말이라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밤에 산속에 혼자 남아 있을 것도 꺼림칙하기도 했다.
산을 내려와 뒤편 바닷가로 가보았다.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날이 어두워진 뒤 공원 솔밭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모래밭에 모래로 쌓은 관영통보(寬永通寶)'라는 거대한 옛 동전 모양이 있었다. 관영통보는 1633년에 만들어졌다는데, 이것을 보면 무병장수 할 뿐만 아니라 금전운도 좋아진다고 믿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절 위에 있는 전망대도 이것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았다.
어두워질 때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오주시처럼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많았다. 상점들은 대부분 셔터가 내려져 있고 활력이 떨어져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별로 눈에 띄지 않던 미니스톱에 들렀다. 일본 의 다른 편의점들과 달리 우리나라처럼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도 충전을 시켰다. 옆 테이블에는 여고생들이 한참 웃고 떠들다 떠났다. 서울에 있는 우리 딸들이 떠올랐다. 저맘때 친구들은 어쩌면 가족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의지가 되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친구들과 의지하며 격랑의 시기를 건넜다.
주택가에 있는 ‘중화 소바'라고 쓰여있는 국숫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중국식 라멘과 유부초밥 세 개(740엔). 맛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순례자라고 얼음물도 한 잔 더 주고. 기념품 액세서리도 선물이라며 주었다.
어둠이 내린 뒤 해변공원으로 다시 갔다.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저녁도 먹었겠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쉬었다. 삼십 명쯤 되는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끌고 바닷가에 나타나 깔깔 대며 불꽃놀이를 했다. 불꽃들이 펑펑 튀어 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환호성. 어둠 속에 앉아 그 광경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완전히 어두워진 뒤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간단히 씻고 솔숲으로 들어가 조용히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간온지시 해변공원에서 스텔스 캠핑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