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간온지 시 해변~ 우탄구라
20. 간온지 시(観音寺 市) 고토히키공원(琴弾公園) ~ 78번 고쇼지(郷照寺) 젠콘야도 우탄구라
운행거리 46.45 Km
새벽 4시. 신문배달 오토바이가 새벽 숲의 적막을 깨트리고 지나갔다. 잠이 깨 다시 잘 수 없었다. 텐트를 정리하고 짐을 꾸렸다. 4시 반경부터 산책하는 이들이 나왔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어떤 가족은 다섯 시도되기 전에 어린 자녀들까지 함께 해변 산책을 하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 또 우리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기 전. 우리에게도 이런 아침이 있었다. 아이들이 입시에 내몰리면서 아침의 평화는 사라졌다.
예닐곱 살 때부터 동 틀 무렵 아버지와 정릉 약수터에 다녀오다 보면 맞은편 안암동 쪽 개운산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곤 했다. 아이들 유년시절, 곤지암 산속에 살 때는 아침 7시 반 첫 버스를 타기 전까지 개를 데리고 달리기를 하거나 마당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장작을 팼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다 보면 창밖에 새들이 지저귀곤 했다. 아침이 어찌 그리 길었나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 30년 새 국민소득이 수십 배 늘었다지만 소득과 행복은 비례하는 것 같지 않다. 아침밥상에 둘러앉아 가족들과 눈길 주고받는 일도 언제부터인가 힘들어졌다. 중고생 학생 때부터 학원으로 독서실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조금이라도 더 재우려고 부모들은 애를 태운다.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해 이런 세상을 만들어왔을까.
허준호 감독 영화 <행복>. 깊은 산속 요양원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은희와 영수는 감나무가 있는 작은 집을 얻어 살림을 차린다. 단지 함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두 사람. 영수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다시 클럽을 전전하던 도시의 삶을 기웃거린다. 권태로워진 것이다. 신문기사를 보며 ‘노후 자금으로 4억 7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는데 우리는 뭘 준비하고 있는가’ 푸념한다. 은희는 그런 영수를 암담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오늘 잘 살고 내일도 이렇게 살면 되지 무엇을 위해 4억 7천만 원이 왜 필요하냐'고 말한다. 영수는 네가 뭘 아냐? 네가 밥을 천천히 먹는 모습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알아? 윽박지른다. 은희는 영수가 떠나갈 것을 예감한다. 괴로운 마음에 자해를 하듯 산길을 달리다 쓰러진다. 슬픔처럼 아름다운 단풍이 배경에 있다. 결국 이들은 품 안에 있던 행복을 잃어버린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라고, 더 벌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세상은 우리를 다그친다.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면서 오늘 진행될 여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저녁 무렵 도달할 지점쯤에 마땅한 캠핑장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지니고 있는 현금도 이제 2만 엔 남짓. 불안해졌다. 아침은 미니스톱에서 도시락(398엔)과 커피(150엔). 매번 가이드북을 꺼내 확인하는 일이 번거로워 오늘 달릴 부분을 복사(55엔)해 형광펜(88엔)으로 루트를 마킹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작업인데, 편의점에 복사기가 있으니 새로운 욕망이 싹트고 소비가 발생한다. 대개의 소비가 그런 게 아닐까. 밥을 먹는 동안 핸드폰을 충전하고 7시 출발.
간온지시(観音寺 市). 이름부터 불성 가득한 조용한 도시. 안녕.
70번 모토야마지 (本山寺) 까지는 직선거리 5.7km. 평탄한 도로를 달리면 된다. 길에서 만나는 선거 포스터에 역시 야당들은 '평화헌법수호', '원자력 반대'를 정책으로 내 걸었다. 폐허가 된 후쿠시마 원전을 배경으로 군말 없이 써 놓은 한 마디. ‘강한나라보다 평화로운 나라’라는 카피가 울림을 준다.
자민당은 '강한 일본을 복구하자'다. 아베의 자민당 답다. 국가권력은 흔히 '부국강병'을 선동하지만 나라가 강해지면 개인도 행복해지는가? 나라와 개인은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 것'일까. 국가나 개인이 무장을 강화하고 완력을 기르면? 무력보다 '멘털'이 문제 아닐까. 아시아 나라들을 침략해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과거를 인정도 반성도 못하는, 그 나약한 정신으로 일본이 진정 강해지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러니 인정도 사과도 못하는 것 아닐까.
남의 나라 선거 포스터를 보며 이런 생각들을 곱씹다 보니 이내 70번 모토야마지 (本山寺)에 도착했다.
모토야마지는 16세기에 시코쿠 섬을 평정했다는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때문에 섬 안의 모든 절들이 불타고 무너졌는데 이 절은 보존 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절에 파괴하려고 몰려드니 절에 모셔둔 아미타여래 오른쪽 팔꿈치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6.25 전쟁 때 국군이 오대산 상원사가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것이라며 불태우려 찾아갔을 때, 주지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도 함께 태우라고 해서 소실을 면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본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한 뒤돌아서니 한 할머니가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기도를 마친 뒤 법당 주변을 청소한 뒤 절 앞 벤치에 앉아 가족들에게 엽서를 쓰고 있는 내게 와 오셋타이라며 작은 꾸러미를 건네고 총총 돌아서서 걸어간다. 달콤한 젤리와 비스킷과 사탕 몇 알. 순례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누려고 이렇게 준비하고 다니시는 모양이다.
71번 사찰 이야다니지(弥谷寺)까지는 11번 국도를 따라 비교적 순탄한 길을 따라 12.4 km. 코보 대사의 고향인 젠츠지 시 (善通寺市)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있다. 오르막이 벅찼지만 그리 길지 않아 견딜만했다. 이 지역에는 곳곳에 저수지가 많았다. 주변에 펼쳐진 너른 평야가 농업용수를 대려고 만든 것 같았다. 이야다니지
인근에 온천 휴양지가 있어 들렀다. 마침 일요일이라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했다.
온천파크 주차장 맞은편, 이야다니지(弥谷寺)로 오르는 길 옆 주차장은 한산했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올랐다. 우리 산과는 나무도 풀도 달라 어딘지 서먹한 일본의 산길. 습기 때문에 이끼도 많다. 산길 옆으로 예전 설악산 비선대 가는 길처럼 상점들도 몇 개 있다.
본당으로 가려면 108계단을 올라야 한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에 나오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을 떠올렸다. 모든 감각과 의식에서 받아들이고 피어나는 자극과 판단과 호오의 감정들로부터 108 번뇌가 빚어지지만, 그 모든 것에 실상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 나는 머리로는 그 말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몸은 번뇌에 사로잡힌 채 쩔쩔매며 삶을 밀고 가고 있다. 그런 수준이다. 하지만 반야심경을 나지막이 읊조리다 보면 당장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나를 이 여행으로 떠민 현실의 고통, 사별의 슬픔들도 이렇게 일상을 빠져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니 실상이 없다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도 같다. 어차피 눈물 세상을 견디며 걸어가는 게 우리들 삶 아닐까.
산 아래 저자가 아스라하게 내려다 보일 만큼 절은 높이 있다. 코보 대사가 나고 자란 동네 인근이다. 절에는 '사자의 돌집'이라는 코보 대사가 수행했다는 동굴도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위에 있는 본당은 신을 벗고 마룻바닥 안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게 되어 있었다. 휠체어를 탄 고령의 순례자 한 분이 오를 수 없는 계단 앞에 독송을 하며 무엇인가 간절히 눈빛으로 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중병에 걸려 생을 정리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렇게 영과 육을 정돈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절에서 내려온 시간은 11시. 점심을 먹기도 그냥 달려가기도 어정쩡한 시간이라 온천에 들러 쉬기로 했다. 제법 규모가 큰 휴양시설이었다. 깨끗한 온천욕장은 물론이고 편히 누워 안마기를 이용할 수 있는 수면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아이들을 위한 오락실과 기념품 상점도 있었다.
느긋하게 온천욕(입장료 1520엔)을 하고 밥(돈가스 840엔)도 먹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일본 사람들은 몇 번씩 온천욕장을 들락거리고 낮잠도 자고 식당에서 맥주도 마셔가며 휴일을 온종일 이곳에서 보내며 쉬는 것 같았다. 욕탕은 우리나라 대형 찜질방들과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무척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탕에 들어갈 때 무슨 결벽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땀 한 방울 남김없이 씻고 들어가던 사람들. 냉온욕을 할 때도 온탕에서 나와 땀을 완전히 씻고서야 냉탕에 들어가는 모습들. 일본 사람들 답다고나 할까.
오후 1시. 다시 출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뉴스가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씻고 쉬었더니 몸은 가뿐해졌다. 느긋하게 내리막길을 달려 젠쓰지 시(善通寺市) 방향으로 좌회전해 11번 국도를 만난 뒤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다. 30분 만에 72번 만다라지(曼荼羅寺)에 도착했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코보 대사가 가지고 온 만다라를 안치한 곳이라고 한다. 일요일 오후라 절은 한산 했다. 하늘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ㅕ
'오늘은 어디서 묵을 것인가'. 슬슬 불한 해졌다. 그런 나를 스스로 지켜보는 일도 또 하나의 수행이었다. 여행에서만 그런가.'지금 이 순간, 여기'를 살기보다 흘러가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게 우리 삶 아닐까.
73번 슈샤카지(出釈迦寺)는 만다라지 위쪽 산 위로 500미터쯤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가깝다고 마음을 놓고 올라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했다. 인근 묘원에 장례를 치르러 온 가족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몇 년 새 줄줄이 장례를 치러야 했던 나로서는 그런 가족들의 표정과 모습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 절에도 코보 대사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7살 때 이 절 뒤에 있는 벼랑에서 '불도에 입문해 대중을 구원하고 싶다. 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석가여래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주오.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목숨을 부처님께 바친다'라고 말하고 몸을 아래로 던졌다고 한다. 이때 연꽃 위에 앉은 석가여래가 나타나고 선녀가 어린 코보 대사를 받아 안았다고 한다. 대개의 신화는 사실을 과장하는 이런 식이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어머니와 작은누이와 국민대학교 뒤 북한산 기슭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해 서울로 올라온 뒤 형편이 쪼들려 늘 곤궁했던 시절인데 어쩐지 그날은 깨끗한 신록의 숲으로 소풍을 갔다. 숲에서 작은 개울을 따라 조금 올라간 곳에 십여 미터는 족히 되는 가느다란 폭포가 있었다.
우리는 그 위로 조금 더 올라가서 나무 그늘에 자리를 폈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도 먹고 어머니와 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숲 속으로 혼자 돌아다니다가 폭포 위에서 미끄러져 자칫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돌출한 홀드를 붙잡고 매달려있다가 간신히 기어올라오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스쳐갔다. 그날 일은 이제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한동안 절벽에서 미끄러지던 그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코보 대사가 7살 때 벼랑에서 몸을 던진 일이 사실 그대로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벼랑에서 떨어진 사고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점점 완결된 신화로 거듭난 게 아닐까.
서른이 넘어 정릉의 그 숲에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다. 등골이 오싹하던 그 찰나의 기억. 쓸쓸하고 체념에 젖었던 그 독특한 감정들. 그 아름답던 신록의 숲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1996년 어느 토요일 충무로에 있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찾아가 본 그 숲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는 크고 작은 암자들 연결된 시멘트 포장길들로 숲은 만싱창이가 돼 있었고 폭포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74번 사찰 고야마지(甲山寺)는 슈샤 카지로부터 3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리막길이라 편하게 달렸다. 인근에 코보 대사가 태어난 곳이 있다고 한다. 대사가 뛰놀던 동네일 텐데 실제로 절 마당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도 한가롭게 오가고 있어 여염집 같은 느낌을 주는 절이었다.
오후 2시 50분. 진언종의 총본산이라는 75번 젠츠지(善通寺)에 도착했다. 무척 큰 절이었고 무슨 잔칫날 같은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젠츠지가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에 있는 곤고 부사(金剛峯寺), 교토 토후 쿠지(東福寺)와 함께 3대 사찰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1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잉어들이 헤엄치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큰 사찰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회랑을 따라 가람들이 배치돼 있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규모가 상당했다. 기념품 가게에서 가족들의 띠 별로 용과 닭과 개와 쥐 작은 인형을 샀다. 석고 모형을 깨트리면 운세가 쓰여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용과 닭, 개와 쥐. 가족들 기질이 은근히 자기 띠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드넓은 절 마당에는 농기구와 모종, 분재를 파는 장터가 열려있고 무대에서는 가라데 시범과 공연도 벌어져 무슨 잔칫날 같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달렸다. 비 때문에 지도도 스마트폰도 확인하기 어려워 스티커를 따라가기로 했다. 76번 곤죠지 (金倉寺) 코보 대사의 조카인 치쇼우 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이 절에 머물면서 당나라의 쇼류우지를 본떠 절의 가람을 정비했다고 한다. 빗발이 굵어지고 있어 황급히 참배하고 절을 지나쳤다.
77번 도류지(道隆寺)는 바닷가 가까이에 있었다. GPS는 바닷가 철길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78번 고쇼지까지 간 뒤 시내에서 호텔을 찾아 묵어가야겠다 싶었다.
마루가메시 (丸亀市) 시내를 지나면서 은행이 나올 때마다 ATM에서 현금 인출을 시도해보았다. 2만 엔쯤 더 인출을 해두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 실패. 편의점에 들러 비도 피할 겸 커피 한 잔을 사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일본 ATM 가운데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만 비자, 마스터카드로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단, 휴일에는 안 되고 평일도 오후 두 시까지만 가능하다고.
78번 고쇼지(郷照寺). 저녁 다섯 시경 도착했다. 이제 순례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돈은 충분하지 않아도 오늘 호텔에서 자고 이삼일 이상은 더 버틸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조금 막막한 심정으로 순례자 무료 숙소 정보를 보았다. 78번 고쇼지 산문 앞에서 동쪽으로 200미터를 가면 우탄구라라는 젠콘야도가 있다고 적혀있다. 반신반의하면서 동쪽을 향해 고지식할 정도로 200미터를 세며 걸어간 뒤 곁에 있는 집을 살펴보았다.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작은 글씨로 '우탄 구라'라고 쓰여있는 집이 정말 있었다. 혼자 자전거 순례를 하며 야영장을 이용해온 나로서는 젠콘야도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쓰미마센...' 하고 불러 보았다.
인자한 인상의 노리코 상이 나왔다. '자전거 순례를 하는 한국 사람입니다. 미리 연락을 못했습니다만, 오늘 일박할 수 있을까요?' ' 지금 아, 다섯 시가 넘었군요. 네 가능합니다. ' 하면서 본체를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간 뒤 별체로 안내해 주셨다. 그날 투숙객은 나밖에 없었다.
우탄 구라는 이리에 무네노리, 이리에 노리코 두 분이 운영하는 젠콘야도다. 이 동네 이름인 우타즈 초 (宇多津町) 를 스페인어로 표기한 이름이라고 한다. 정갈한 다다미방 잘 가꾼 정원. 처마 밑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대. 오래 떠돌다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푸근했다. 노리코 상은 화장실과 욕실, 세탁기 등 사용법을 일러주고 모기향까지 피워주었다. 1박에 천 엔 아침은 여섯 시부터 , 저녁은 미안하지만 나가서 먹고 와야 한다는 안내. 민박집들이 대개 1박 2식에 6천5백 엔인데 비하면 거의 무료다.
짐을 풀고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다 돌려서 널어놓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느긋한 기분으로 저녁 먹을 곳 찾을 겸 동네 산책에 나섰다. 외출했다 돌아온 이리에 선생이 내 자전거가 복잡해 보였는지 자신의 가정용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오라고 했다. 조용한 마을길을 느릿느릿 달려가고 있자니 이리에 상이 따라오며 '한국 사람이 하는 식당에 가보겠어요? 조금 비싸지만 서비스가 좋으니까... ' 하며 안내를 자처하신다.
낙원(樂園). 제법 규모가 큰 고깃집이었다. 안수창이라는 동포가 주인이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 호방한 말과 행동. 오랜만에 한국 사림을 만난 것 같았다. 주문을 하려고 하니까.'그냥 앉아 계세요. 내가 알아서 줄 테니...'
그는 이리에 선생에게도 가지 말고 앉으라고 하더니 숯불구이, 철판구이, 갈비탕, 불고기를 골고루 내 왔다. 김치와 마늘도 썰어 주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한 저녁이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끝없이 내오는 생맥주 때문에 나도 이리에 상도 과음을 했다. 이리에 선생은 본의 아니게 술자리가 시작되니까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던지 노리코 상이 와서 남편에게 2만 엔을 찔러주고 가신다. 당연히 내가 밥과 술을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에 상은 오사카 미쯔비시에서 40년 근무하고 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우탄구라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운영한 3년 동안 1700명가량의 순례자들이 묵어갔다고 한다. 한국사람도 꽤 자주 온다고 했다. 자신도 순례를 14번 했고, 아내도 4번 순례를 했으며, 순례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센다츠(先達 ) 자격이 있다고 했다. 은퇴 후 이런 삶. 멋지다.
안수창 씨는 재일동포 3세였다. 할아버지가 일제 치하에서 경남 함안을 떠나 일본으로 온 뒤,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은 그나마 '조선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 그래요. 나도 얼마 전 조선학교를 다룬 우리 학교라는 영화를 봤어요'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를 어리게 보고...'여자 친구 있어요?' 했다가 큰 딸이 대학생이라고 하니 놀라며 나이가 같다고 하니 말을 놓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이것도 한국사람답다.
그는 일본에서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온 일들, 남과 북으로 찢긴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 성장기에 겪은 차별과 억압을 하소연했다. 나도 일본에서 성장한 부모님이 1945년에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같기도 했지만 말도 마음도 잘 통했다.
셋 다 만취한 뒤 안수창 씨는 우리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태극기를 사이에 두고 박지성과 북한의 국가대표 안영학의 유니폼이 양옆에 걸려 있었다. 디아스포라의 애환, 분단된 민족의 비극이 새삼 가슴 아팠다. '어떤 일본 사람은 막 욕을 하기도 해요. 일본 땅에서 왜 조선사람 티를 내냐고'
자정이 넘어 이리에 선생과 나는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우탄구라로 돌아왔다. 이리에 상은 이 집을 거쳐간 한국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준다며 방명록을 펼쳐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려고 했다.
' 너무 늦었어요.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지금 자지 않으면 안 돼요.' 방 안에서 자다 깬 노리코 상이 나지막한 소리로 제지했다.
또 하루가 갔다. 이런 만남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나. 여행은 이런 것이다. 인생 여정도 그렇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