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카마스 토요코인호텔~도쿠시마 료젠지 앞 게스트하우스
운행거리 88.68km
오늘이 순례 마지막이 될까?
역시나 새벽에 잠이 깼다. 여섯 시까지 침대에 누운 채 게으름을 피웠다. 지나온 일들이 꿈같았다. 안온한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도 감사했다. 7시에 로비에 내려가 밥과 미소된장국, 늘 같은 밥.
짐을 꾸려 8시 반 출발했다. 분주한 출근길을 거슬러 야시마(屋島)로 향했다. 편의점에 들러 500 ml 카페오레를 마셨다. 적지 않은 양인데도 단숨에 마셨다. 20일 넘는 동안 내내 잘 먹고 속도 편했다. 감사한 일이다.
어제 야시마를 한 바퀴 돌아보았기에 경로를 고심할 필요는 없었다. 곧장 시내를 가로질러 야시마 가타모토(潟元)역에서 멀지 않은 등산로 들머리로 갔다. 어제저녁, 역에서 쏟아져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련한 향수 같은 게 느껴졌다. 나도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야시마지(屋島寺)는 섬의 산록에 있다. 고토덴야시마(琴電屋島)역 앞에 버스(100엔)도 있지만, 다카마쓰 시내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등산로로 올라가기로 했다.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간 뒤 주택가 골목에 묶어놓았다.
아침 등산객이 많았다. 더러 순례자들도 있지만 대개 주부와 노인들이다. 남산이나 북악산처럼 시내를 조망하면서 느긋하게 오르는 도시의 산이다. 관광차 다카마쓰에 온다면, 야시마 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버스를 타고 산정에 있다는 전망대에 올라 세토내해를 조망하면 되겠다.
야시마지는 당나라 간징(鑑真) 화상이 754년에 세운 절이라고 한다. 규모도 크고 분위기도 차분했다. 한 순례자는 나를 추월해 번개처럼 달려 올라가 참배를 하고는 눈길도 안 주고 달려 내려갔다. 참 다양하다. 섬 중턱 일주 도로를 횡단해 도보 순례길이 이어져 있었다. 85번 야쿠리지(八栗寺)로 도보 순례길이 이어져 있다. 야쿠리지까지는 걷는 길로 6.3km.
10시 30분. 참배를 마치고 하산하다가 사토미 아다찌와 마주쳤다. 시코쿠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 사흘 만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그는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순례자 상의(하쿠이白衣)를 입고 거침없이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달리던 해안가 11번 국도, 울 듯이 징징거리며 올랐던 수많은 고개들을 저 어린 여자가 고스란히 거쳐왔겠지 생각하니 놀라웠다.
"아다찌 상, 반가워요. 괜찮으세요? "
"어라! 김상 반가워요. 그렇잖아도 다시 만나면 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 "
"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 세 곳의 기념품이에요."
아다찌는 매고 다니던 힙색에서 나무로 된 작은 기념품을 꺼내 내게 주었다.
순례자들은 순례에 나서기 전에 교토에 있는 도지(東寺) 등 대표적인 사찰 세 곳에 들러 순례자들의 필수품인 지팡이와 삿갓 등을 장만한다고 한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이 작은 기념품, 세 절에서 사서 모은 작은 나무 패찰 받고 조금 당황했다.
"아다찌, 나는 아무것도 줄 게 없네요. 어쩌죠. " "아, 김 상, 괜찮아요. 오늘 88번 사찰 오쿠보지(大窪寺) 순례 마치면 오후 서너 시 경일 텐데 거기서 1번 료젠지까지 갈 생각인가요? " 생각 못한 문제였다. 아, 비로소 오늘 순례가 끝나는구나...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순례가 끝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순례자들은 대개 순례를 마친 뒤 다시 1번 료젠지에 가서 코보 대사께 무사히 순례를 마쳤다고 보고를 하고, 다시 도쿠시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카야마에 있는 고야산에 가서 참배까지 해야 비로소 순례가 완결, '결원(結願)'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글쎄, 몇 시에 마칠지 몰라서 아직 정해 놓은 건 없어요." "그래요? 저는 오늘 료젠지까지 갈 예정입니다. 절 앞에 순례 시작할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요. 원하시면 거기서 묵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요?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이용할 수 있을까요?" " 오헨로상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니 아마도 괜찮을 거예요."
사흘 뒤 돌아갈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으니 고야산까지는 못 가더라도 료젠지까지는 가야겠다 싶었다. 오늘을 빼면 이틀의 시간이 남는다. 오늘 밤 료젠지에서 자면 내일 다시 다카마쓰까지 80km가량 달려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단 하루 여유가 있다.
아다찌와 다시 작별 인사를 하고 자전거로 돌아왔다. 내려오다 보니 아다찌의 자전거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시코쿠주오시에서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아다찌는 도쿄에서는 도둑 때문에 자전거를 길에 세워둘 수 없는데 시코쿠에서는 걱정이 없다고 하던 말이 기억났다.
84번 야시마지에서 85번 사찰 야쿠리지(八栗寺)까지는 5.5km. 11번 국도를 따라 시내를 달리다가 전차 야쿠리(八栗) 역 인근에서 야쿠리지 표지판을 보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가면 된다. 야쿠리지는 산 중턱에 있지만 언덕을 조금 오른 뒤에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된다. 자전거는 케이블카 코겐잔(五劍山) 역에 세워두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우리가 아는 케이블카는 공중에 매달려 가는, 일본 사람들이 로프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케이블카는 급경사면 바닥에 설치된 굵은 쇠줄을 감으며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야쿠리지(八栗寺). 코보 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떠나기 전에 이곳에 밤톨 여덟 개를 묻어두고 떠났다고 한다. 돌아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일본 불교에서 토착신의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자오곤겐(蔵王權現)'이 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은 신령한 땅'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코보 대사가 그 칼들을 다섯 개의 산봉우리 묻었고, 자오곤겐은 승복했다고 한다. 그 다섯 개 중 산봉우리 한 개는 3백 년 전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한다. 설명만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코보 대사가 토착신들을 굴복시키고 불교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는 정도로 이해해도 될지.
절 안에 '동일본 부흥기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후쿠시마가 있는 동북지방의 복구를 염원하는 것이겠지. 후쿠시마는 이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파괴된 핵발전소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방사성 물질. 온 인류가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미 후쿠시마에서 분출된 방사성 물질이 체르노빌 사고 때의 열 배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다. 핵폐기물은 보관하는 것 말고는 근원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 없는 상황이니 핵발전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비극이 아닐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에너지를 덜 쓰는 노력,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 정도뿐이다. 어쩐지 무기력하다.
재난이든 질병이든 사고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핵발전소가 있는 곳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 일 것이다. 발생 시점이 문제일 뿐...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일본의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12시 15분 참배를 마쳤다. 다행히 하늘도 파랗고 날이 맑다. 도보 순례자들은 곧장 산을 걸어 내려가면 된다.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자전거 곁으로 돌아왔다. 야쿠리지 역에서 86번 시도지(志度寺)까지는 8km. 오르막 없는 평탄한 시내 도로를 달리게 된다. 내려오면서 어쩌면 아다찌와 또 마주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마주치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일들을 피하고 싶었다. 순례의 마지막 구간을 침묵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것은 아다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생의 큰 프로젝트일 텐데 우연히 자꾸 마주치는 외국인 아저씨 때문에 어수선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길을 찾고 도로를 주행하는 능력에서 아다찌는 나보다 더 우월한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엔가 나를 추월한 것 같았다. 엊그제 저녁을 먹을 때 '당신 운동선수냐? '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역 잎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86번 시도지(志度寺)를 앞 건널목에서 앞서가고 있던 아다찌와 다시 만났다. 이 여자는 점심도 안 먹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야시마지에서 간식으로 해결했는지 모르겠다. 여행 중에 깨달은 것은 먹지 않으면 기운이 나지 않는다는 것, 먹지 않으면 기분이 침체된다는 것.
86번 시도지(志度寺). 먼 옛날, 당나라로 시집갔던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 中臣鎌足 614~669)의 딸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오빠에게 여러 보물을 보냈는데, 사도만에서 폭풍을 만났다. 이 때문에 보물들 가운데 구슬 하나를 바닷속 용왕에게 빼앗겼다. 오빠인 후히토는 이것을 찾으러 이 마을에 왔다가 해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이 낳은 사람이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房前).
해녀는 남편이 누구고 왜 이곳에 왔는지 알게 된 뒤, 아들을 후지와라 집안에 정식으로 들여달라고 부탁한 뒤 을 자신의 몸에 밧줄을 감고 용궁으로 갔다. 후히토가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밧줄을 건져 올렸으나 이미 해녀의 몸은 참혹하게 물어뜯긴 모습이었다고 한다.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어머니는 이런 존재인가 보다. 자신의 몸이 물어 뜯기는 한이 있어도 자식을 조금 더 나은 삶으로 보내 놓으려고 하는.
학생운동 관련해 한겨울에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안산 공단 주변 내 자취방에서 불도 안 피우고 주무시면서 매일 면회를 오시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눈물이 났다.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경했다.
87번 나가오지(長尾寺)까지는 곧장 북쪽으로 뻗은 3번 국도를 따라 섬의 내륙 쪽으로 7.3km가량 달리게 된다. 다시 길이 산을 향해 나 있다. 수확을 앞둔 황금빛 밀밭이 있길래 일부러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도 밀과 보리를 베어내고 모를 심는지는 모르겠다.
일본에 와서 여러모로 감탄했다. 도로와 주택가 어느 허투루 방치하지 않고 잘 관리되고 있는 점. 공중 예절을 잘 지키는 사람들. 순례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오셋타이 문화. 외견상 일본은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초중고 학생들의 맑고 쾌활한 모습. 방과 후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노는 아이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른들은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외롭고 지쳐 보였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농업에 관한 한 일본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농업을 포기하고 제조업과 수출에 기대 경제를 급격히 발전시켜온 탓에 식량자급률은 25% 내외에 불과하다. 그나마 농촌을 지탱하고 있는 고령인구들이 죽고 나면 미래는 더 막연하다. 핵발전을 기반으로 무역에 의지해 경제 규모를 부풀려 가는 식으로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식량을 자급하지 못한 채 수입에만 의존해 살아가는 일은 허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허망하고 아슬아슬한 일이다.
오후 2시 반. 87번 나가 오지(長尾寺)에 도착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햇볕에 하얗게 달궈진 텅 빈 절 마당. 순례가 막바지에 달했다는 어떤 홀가분한 심정, 그리고 아쉬움.
덴표(天平11년, 739년) 쿄 키보 살(行基菩薩)이 열었다는 설. 쿄키 보살이 어떤 버드나무를 보고 신령스러움을 느껴 거기에 관세음 보살상을 새겨 이 절에 본존으로 안치하고 법상종(法相宗)을 창건했다는 전설. 그 후, 코보 대사가 당나라로 떠나기 전 이 절에서 새해 7일 동안 기도를 하면서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 풍습이 지금도 이어져 매년 정월 칠일, 큰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코보 대사는 다시 이 지역을 찾아와《대일경(大日經》(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을 돌 하나에 한 자씩 새겨 공양탑을 세우고 법상종에서 진언종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제 88번 오쿠 보지(大窪寺)만 남았다. 직선거리 22km. 계속 오르막이다. 도중에 있다는 헨로 교류 살롱까지는 5Km 남짓. 거기서 오쿠보지까지 또다시 15Km 남짓. 계속 산을 올라야 한다. 나가오지를 빠져나오는데 아다찌가 막 도착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먼저 길을 떠났다.
86번 시도지에서 87번 나가오지까지는 거의 평지였고 나는 GPS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평속 30km 가까이 빠르게 달려왔는데 그는 나와 별 차이 없이 도착한 것이다. 역시 대단하다.
이제 선거가 임박했고, 역시 포스터가 자주 눈에 띄었다. 정치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듯 외치는 저 공허한 말들. 현실정치에서 투표 행위는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덜 나쁜 선택을 하는 정도가 아닐지.
우리 세대처럼 극적인 변화를 겪은 인류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03달러. 1966년 수출 1억 달러. 세계 최빈국에서 '1천 불 소득 100억불 수출'을 노래로까지 부르던 유년시절에서 1인당 연간 소득 3만 달러까지. 유래 없는 고속 성장의 이면에는 자살률, 이혼율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 살고 싶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짙은 그늘. 돈과 물질이 해결할 수 없는 갈증. 마음을 살피는 일. 이웃과 함께 사는 일. 이제 서서히 이런 일에 눈길이 가고 있다.
2,3 km 가량 올라간 지점에 제법 큰 인공호수가 있고 그 주변에 마에야마 오헨로 교류 살롱 (前山おへんろ交流サロン)과 나가오 미찌노에키 (道の駅ながお)가 있었다. 오헨로 교류 살롱은 안내센터, 자료관 역사관이었다. 전사관 중앙에 88개 사찰을 표시한 섬 모형이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저 험준한 산과 계곡들. 때로 비에 젖은 채 페달을 밟으며 밤길을 달리던 순간들.
고승들의 유적. 절들마다 전해오는 전설들을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화로도 설명해 놓았다. 30분가량 구경을 마치고 나와 맞은편 휴게소(미찌노에케)에 들러 음료수를 사 마셨다.
이제 산길을 15km 꾸준히 올라가야 한다. 3번 도로를 따라 꾸준히 오르다가 한 차례 377번 국도로 좌회전해서 5km 남짓 달리면 88번 사찰에 도착하게 된다. 도보 순례길과 자전거 길은 간간이 만나기는 하지만 대부분 겹치지 않는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자전거 순례자를 위한 안내 스티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외진 산중 도로, 아다찌는 앞서 갔는지 뒤쳐졌는지 보이지 않다가 절을 1km 앞둔 지점에서 만났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기어를 기어를 모두 풀고 신음소리를 내며 언덕을 올라가면서 그를 추월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후 4시 40분. 드디어 '결원(結願)의 성지' 88번 오쿠보지(大窪寺)에 도착했다. 해발 782m 도봉산 정상만큼 높은 곳. 산중이라 해가 빨리 져 이미 어둑하게 산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본당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미즈야에서 죄업의 근원이라는 손과 입을 헹구고 본당에 가서 향을 사르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벅찬 마음이 들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
가자! 가자! 저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저 온전한 깨달음의 높은 곳으로!
반야심경은 한 번에 독송 하기에 부담 없는 짧은 양이지만 불교의 정수가 모두 응축돼 있다. 한 자 한 획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는 완벽한 시처럼 여겨진다. 현실에 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저 높은 경지로 가자는 이 마지막 진언이 특히 가슴을 친다.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지. 이 말을 되뇔 때면 살면서 겪는 비루한 일들쯤 아무것도 아닌 듯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특별히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틈틈이 반야심경을 베껴 쓰면서 폭력이 난무하던 공간의 절망스러운 시간들을 견뎠다. 그 뒤로도 틈틈이 그랬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그 겨울에도 반야심경을 사경 하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납경소 앞에 순례를 마친 이들이 순례길 내내 함께 걸어온 지팡이(금강장, 즈에)를 봉납하게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 지도교사이던 국어 선생님. 특이한 분이었다. 어느 날 수업이 시작되자 칠판에 한자로 '묵언의 날'이라고 쓴 뒤 한 시간 내내 말 한마디 없이 판서만 하다가 나가시는가 하면, 하루는 학과 진도와 무관하게 반야심경을 한 줄 한 줄 쓰면서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수업시간에 다른 책 읽기가 특기였던 나로서는 그분 수업에는 빨려 들어갔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지만, 아버지도 생전에 틈틈이 반야심경을 독송하곤 하셨다.
경내에는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불길이 보존돼 있었다. 불씨를 살려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일본은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에 피폭된 나라다. '평화'나 '평화헌법'은 정쟁의 이슈가 아니라 절박한 요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염없이 거꾸로 가고 있는 일본의 정치현실이 안타깝다고나 할까.
평화의 불 앞에서 동전을 보시하고 잠시 묵상을 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지구 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향해 핵폭탄을 투하하는 그런 야만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했다.
본당 참배를 마칠 즈음 아다찌가 도착했다. 그도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김상 잠시 뒤에 참배 마친 뒤에 함께 사진 찍어요." 나는 22일 만에 그는 나보다 오륙일 정도 더 달렸다고 했으니 거의 한 달만에 순례를 마친 것이다."아디 찌 상 축하해요. 당신 참 대단해요. 깜짝 놀랐어요." 함께 기념 촬영도했다.
그는 료젠지로 가겠냐고 다시 물었다. 이미 시간이 다섯 시가 넘었다. GPS 상으로는 40km쯤 떨어진 지점이었다. "지금부터 달려도 도착할 수 있겠나?" "내리막길이니까 빨리 달리면..."
젊은 여자가 순례를 마친 일이 일본인 순례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일인지, 남자 순례자가 아다찌에게 말을 걸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다는 20분가량 이어졌다. 출발도 그만큼 늦어졌다.
마지막이 될 일본의 산골 마을들을 시속 30km 정도 빠른 속도로 줄곧 달렸다. 산을 내려가면 도쿠시마 시가 나올 것이다. 속도가 너무 빨라 주춤주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정도였지만, 앞서 달리는 아다찌는 무서운 속도로 내처 달렸다. 덕분에 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었다. 아다찌가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나를 소개하고 예약을 해주었다. 산을 다 내려온 다음에야 사진을 찍을 여유가 생겼다.
도중에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투숙객들이 마트(마루나카)로 마중을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라는 젊은 친구(이름도 잊었다)와 젊은 여자 두 사람. 이들은 새로 순례를 떠날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들 장을 보길래 저녁을 같이 지어먹나 싶었는데 각자 자기 먹을 것을 고르는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대화를 이어갈수록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어쩐지 나를 빈정거리는 느낌도 들고 비열한 표정으로 흉보는 느낌도 들었다. '왜 이러지? '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게스트 하우스는 료젠지 정문 앞으로 곧장 뻗은 골목 안, 50m쯤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저녁 아홉 시가 넘었다. 마당도 있고 거실과 방이 서너 개 있는 꽤 넓은 집이었다. 우탄구라를 연상케 했다. 규모나 구조는 비슷했지만 젊은이들이 스스로 꾸려가는 게스트 하우스는 어수선하고 황량했다. 숙박비는 2천엔. 침낭이 있어 시트와 담요를 쓰지 않으면 2백엔 할인해 1800엔. 밥솥에 있는 밥은 무료. 밥이 떨어지면 자유롭게 쌀 포대에서 쌀을 덜어 밥을 지으라고 했다.
차례를 기다려 샤워를 하고 장 봐 온 반찬거리들로 저녁 끼니를 해결하고 거실에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출발한다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냘픈 여성들은 기어도 없는 생활자전거에 매사가 어설퍼 보였다. 그에 비하면 아다찌는 여전사에 가까웠다. 여행길에서 이들도 조금씩 단련이 되어 가겠지. 후지산 인근에서 왔다는 가와베 군, 나가노에서 왔다는 다카하시는 자전거 순례를 거의 끝 마쳐간다고 했다.
이들의 대화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젊은이들은 대개 여행 경험담을 나누며 질문과 답을 이어갔다. 주인장은 내게 계속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런 질문을 했다. 나는 어느 정도 상대의 의중을 읽고 조심스럽게 '외교적인' 발언 수준의 대답을 했다.
'과거사 문제가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웃이니까 발전적인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식으로. 그런데 그 자는 끝내 속내를 드러내고 도발을 했다. 유튜브에서 나치나 군국주의 일제 시대를 연상케 하는 웅변조 연설 영상을 틀어주면서 보라고 했다. '제군들... ' 하면서 악을 쓰는 사내는 대화혼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었다. 70년 도쿄대 강당에서 운동권 학생들과 혼자 맞서 토론을 하고, 군중들을 향해 연설을 한 뒤 할복자살을 한 미시마 유키오를 연상케 하는 그런 광적인 분위기.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랐다." 그는 마침 한국인 잘 만났다는 식으로 내게 말을 툭 던졌다. "뭐가 달랐냐? " "일본은 조선에 학교를 세워 교육도 시키고, 철도와 전기도 부설해 조선을 도왔다. "
하도 어이가 없어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일본 학교에서 역사를 그렇게 가르치냐? 일본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조선에 전기나 철도도 없었을 것 같냐? "
나는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일본은 조선 사람 수십 만 명을 전쟁과 징용에 끌고 갔다. 수십 년 동안 식량과 자원을 수탈했다. 독일은 과거를 참회하고 철저히 반성했지만 일본은 반성이 없다. 못하는 것 같다."
일본 친구들이 오히려 주인장에게 '듣기 싫은 사람들도 있으니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주인장의 극단적인 의견 피력도. 다른 투숙객들이 주인장에게 노골적으로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도 이전까지 알던 일본인들의 태도와는 달랐다. 화가 치밀어 그냥 짐을 꾸려서 그 집을 나올까 하다가 그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그냥 꾹 참고 자기로 했다.
나는 평소 국가나 민족을 강조하는 데 반발심 마저 가지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기본은 개인 간의 소통이어야 하지 않을까. 국적이나 피부색,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 안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생각이 시험받을 기회는 그간 별로 없었다.
자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타자를 차별하고 침략과 수탈도 정당화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뜻밖에도 마지막 날 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십 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올라 자칫 그놈의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다 무슨 소용이랴. 이것이 일본 소시민들의 인식 수준이라면.
나는 떠들썩한 그 방을 빠져나와 침실로 쓰는 다다미방에 와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애써 잠을 청했다.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일본 총선은 어쩐지 해보나 마나일 것 같았다.
날이 밝으면 빨리 이 집을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여행의 마무리되는 것이 유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