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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Mar 08. 2020

24.예술가들이 되살린 나오시마

#24 - 나오시마(直島)

#24 - 나오시마(直島)

날이 밝았다. 딱히 갈 곳이 없는 아침.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린 듯 마음이 허전했다. 무엇을 할 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아침을 먹고 자전거에 핸들바 백과 리어 패니어 하나만 달고  하릴없이 다카마쓰 시내로 나섰다. 출근 시간이 지나 시내는 한적했다. 태양은 뜨겁고 바람은 소슬했다. 목적지 없이 시내를 배회하다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는 아케이드를 구경했다.


나오시마(直島)를 떠올렸다. 2년가량 일본에 파견 근무를 했던 후배가 내 여행 계획을 듣고는 그 섬에 가 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여유가 생기니 그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망가져 내비게이션도 없고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어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작정 부두에 나가보았다. 일본에 도착한 그날 밤, 들뜬 마음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객 터미널은 부두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개가 있었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터미널에 가 보았다. 나오시마(直島) 가는 배편이 안내판에 있기는 한데 요일마다 있다 없다 하는지 오늘은 가는 배편이 없었다. 체념하고 있는데 여행 차림의 서양사람들 여럿이 승합차에서 내려 왼쪽 건물 터미널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 나오시마행 배가 있었다. 한 시간쯤 뒤에 떠나는 12시 배표를 끊었다. 자전거를 싣기 위해서는 따로 50엔을 더 내야 했다.

역 앞에 있는 A마트에서 도시락과 음료수를 사 와 부둣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순례 기간 내내 하루에 보통 80km, 어떤 날은 100km 이상 달렸다.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고 어떤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대관령 같은 고개를 몇 개씩 넘어야 했다. 그런 숨 가쁜 여행은 이제 끝났다.


잠시 후 배가 출항했다. 자전거는 배 밑바닥 화물칸에 결속을 해 놓게 돼 있었다.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면서 시코쿠 섬의 산들이 거뭇한 실루엣으로 조망되었다. 저 능선과 골짜기 어딘가를 헤매고 다니던 순간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이제 또 다른 산맥들이 펼쳐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매표소에 '나오시마는 6월 13일까지 휴일(休み)'이라고 안내돼 있었다. 섬이 휴일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 싶었다. 나오시마는 원래 구리 제련소와 염전이 있던 섬인데 공장들이 떠나면서 황폐해진 것을 안도 다다오 같은 예술가들이 예술적으로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지추(地中) 미술관, 호텔과 미술관 등이 함께 있는 베넷세하우스, 우리나라 출신 미술가 이우환 미술관이 있고, 마을 안에 있는 집들을 설치미술 작품으로 되살린 '이에(家) 프로젝트, 안도 다다오 뮤지엄 등 미술관과 야외 설치 미술품이 많았다. 부둣가에 설치된 야요이 쿠사마의 ‘호박’이 이 섬의 분위기를 상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섬에 도착한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나눠주는 간략한 약도만 들고  섬의 지형이나  거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상태였다. 완만한 언덕길이 있었지만 짐도 싣지 않은 가벼운 차림이라 전혀 무리가 없었다. 나오시마는 자동차보다 자전거로 돌아보기에 적합한 규모였다. 섬을 감상하기에도 자전거의 속도가 적합했다.

지추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그리고 호텔과 전시장이 함께 있는 베넷세하우스 등 대부분의 미술관은 모두 휴관이었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정비를 하는 기간인 모양이었다. 섬이 휴일이라던 말은 이런 의미인 모양이었다.


야외에 설치된  낯익은 미술품들은 미술관 휴관과 무관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베네세하우스 마당에 낯익은  니키 드 생팔의 작품들이 미술관들에 입장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야요이 쿠사마도 니키 드 생팔도 정신병을 앓으며 환상의 세계를 작품으로 구현했다고 한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가 떠올랐다. 우리는 제도 교육을 받으면서 끝없이 '정상(正常)'에서 벗어나면 어쩌나 겁에 질려 살아왔다. 동네마다 정신을 놓아버린 이들이 있었다. 초점이 나간 눈으로 하루 종일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거나 몸은 우리 곁에 있어도 어딘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이 두렵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떤 무엇이 그들을 이 세계도 저 세계 아닌 상태에서 떠돌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온통 미쳐 돌아가는 현실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일은 과연 정상인가. 늘 규범적인 인간. 어지간한 고통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 어쩐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넥타이 매고 반복적으로 출퇴근하는 삶. 가계부를 쓰고 적금을 붓고 집을 늘려가며 새끼들과 볶고 지지며 사는 삶도 숭고하지만 미치지 않으며 도달할 수 없는 그 경지가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2,30대를  사는 동안 나는 미치지도(及) 미치지 못하지도 못하면서 우왕좌왕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활동한 문예반은 가을마다 문학의 밤을 열었다. 어느 핸가 선배가 낭송한 시구에 '사랑이여, 취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그대' 하던 감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문예반 선후배들 상당수는 정작 문학보다 그런 말투와 분위기가 좋아서 토요일마다 '합평'을 마치면 학교 앞 중국집에 몰려가 마실 줄도 모르는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런 식의 일탈과 공모자 의식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미술관들이 있는 섬의 오른쪽 해안 언덕을 넘어서면 부두의 반대편에 있는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집 앞에 화분을 내놓고 장식을 한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행인들을 위해 꽃을 놓아두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100호도 넘어 보이는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다. 이름도 모토마찌(本町)다. 마을에는 카페 식당,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 그리고 식료품 등을 파는 생협 모토무라점도 있었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생협법에 의해 '비조합원 이용금지' 규정이 있지만 유명무실한 것 같았다. 일반 상점과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슈퍼마켓에 뜻밖에 생협 간판이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비조합원은 물론이고 나 같은 외국인들도 이용하는데 아무 제한이 없었다.

쉴 겸 카페에 들어가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가게 한쪽에 기념품도 팔아 몇 개 샀다. 안도 미술품들을 일상용품으로 만든 기념품, 작은 새를 날렵하게 만든 레터 나이프, 가족들에게 줄 엽서 몇 장과  귀이개 같은 소품들.

'집(이에 家) 프로젝트'티켓(1000엔)을 사 몇 집 들어가 구경을 했다. 낡은 집을 개조한 일종의 설치미술인데, 어떤 경우는  필연성을 공감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위기가 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어떤 카페는 50년대에 지은 낡은 집을 지붕 골조가 다 드러나게 뜯어내고 군데군데 시멘트 블록을 그대로 노출하고 바닥에도 투명한 에폭시만 발라 놓은 것을 인테리어라고 해 놓았는데 묘하게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떤 집은 1층과 2층이 이어지게 뚫려있는 거실에 난데없이 흰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자유의 여신상이 들어서 있고 이층 전시실에 올라가면 자유의 여신 얼굴과 마주하게 돼 있었다. 마침 그 방에 들어설 때 데이트 중인 일본 젊은이들이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을 보면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인가?' 하면서 킥킥대고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행복이 있나니




어떤 집은 '어둠 속의 대화'였나? 완전히 캄캄한 어둠 속에 10여 분 동안 앉아  현실인지 꿈인지 싶은 기분으로 앉아 소리로만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게 만든 곳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 함께 일한 적 있는 후배가 우리 부부에게 ‘어둠 속의 대화’ 공연 티켓을 보내주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촌에 있는 빌딩 안, 캄캄한 어둠 속에서 40분 남짓의 낯선 체험.

‘눈으로 봤냐?’는 말을 습관처럼 하듯 우리는 시각에 지나치게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있다. 거리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보면 조마조마한 마음이 드는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다.

순례 기간 내내 읊조리고 다닌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감각은 실상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실제가 무엇이든 내 마음에 고통을 주는 현상들을 걷어내고 고요한 상태로 가고 싶다는 것이  그즈음 내 생각이었다. 어둠에서 벗어나니 골목길 토담 모퉁이에 밝은 햇빛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당연한 듯 누리며 느끼는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어쩌면 여행의 미덕은 그런 것이다.

마을 가운데 있는 안도 뮤지엄은 따로 입장권을 사야 했다.(500엔)  노출 콘크리로 지은  미니멀한 건물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무슨 특별한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 안 주민들이 살고 있는 어떤 집 앞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성경 구절을 써붙여 놓았다.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다 싶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원하는 사람이다"  아내는 한 동안 화장실 변기 앞에 세네카가 했다는 이 말을 붙여두었다. 이 때문에 아침마다 이 말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나오시마를 떠날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가족들과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생각했다. 다카마쓰에 숙소를 정하고 부둣가에서 배를 타고 나오시마로 건너와  네댓 시간 걸어서 섬을 관광해도 좋고 섬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좋을 것 같다. 천천히 자전거를 몰고 부둣가로 나왔다. 순례길에서 눈인사만 하고 마주쳤던 자전거 여행자가 부둣가에 앉아 점심인지 빵에 잼을 발라 먹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 당신 본 적 있다. 아시지리곶 콘고 후쿠지(金剛頂寺) 올라가던 언덕길에서 우리 마주쳤었다.' 그는 정말이냐며 무척 반가워하며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아이치 현(愛知県) 산다는 오가사와라. 그는 일본 전국을 자전거로 일주하고 있다고 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내 카메라 배터리는 방전되고 스마트폰은 망가져 있었기에 함께 찍은 사진은 그가 메일로 보내준 것이다.

오후 5시경 배를 타고 시코쿠섬으로 돌아왔다. 퇴근 무렵 시내에는 활력이 넘쳤다. 뉘엿뉘였 기울어 가는 햇살을 받으며 회사원들과 학생들이 탄 자전거 물결. 편안한 광경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맡겨둔 자전거 박스를 찾아 자전거를 분해해 포장했다. 별것 아닌 자전거 박스를 한 달 가까이 보관했다가 내어 주는 그 친절함이라니. 순서대로 바퀴와 핸들을 풀고 대체로 순조로웠는데 끝내 페달 하나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나사가 풀리지 않아 결국 박스 한쪽에 구멍을 뚫고 비죽 튀어나온 상태에서 테이프로 마감을 했다.

저녁 시간을 놓쳐 또다시 할인점에서 도시락을 사 가지고 왔다. 조금 근사한 곳에서 잘 차려 먹으며 여행 마무리 세리머니를 하려 했으나 아쉬웠다.


다음 날 아침 호텔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를 탔다. 자전거 박스를 포함해 짐이 너무 많아 호텔에서 바퀴 차를 빌려 짐을 옮겼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탑승을 하자니 우리말을 쓰는 승무원이 나의 여행을 짐작하고 하는 말인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길다면 길 수 있는 이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날 밤 가족들과의 재회는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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