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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Mar 26. 2020

25. 여행을 마치며

순례기를 마무리할 시점이다. 


여행, 순례  

떠나기로 작정한 것은 현실의 고통이랄까 허망함이랄까,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듯 여행으로 현실을 잠시 벗어난다고 고통스런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행은 현실과 거리를 둠으로써 과장을 걷어내거나 고통의 인과관계를 냉정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사실을 그대로 이해하면 극복이든 체념이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치유라면 치유랄 수 있겠다.  

당시 내가 겪은 일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만나는 현실, 소멸과 쇠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가족들과의 사별,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그리고 친구들의 죽음도 나이를 먹으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그 무렵 나름 열심히 일했다. 자면서도 일 생각을 하고 자다가 깨어 새벽에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늘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자책 했다. 몰두하던 그 일들이 세상에 보탬이 된다고 믿었다. 그 생각은 어떤 점에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소진되었던 것 같다. 부작용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기보다 예단하고 멋대로 짐작하는 일이 많았다. 상대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이해하기보다 스스로가 세운 가치 기준에 따라 분류해서 접수하며 '아하 그래서 그렇다는 말이지?' 하고 먼저 속단하는 일이 잦았다.

또, 이타적인 가치를 목청껏 외치면서도 속된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가슴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대개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다만 얼마나 노골적인가에 차이가 있을 뿐.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정치판뿐 아니라 작은 집단에서도 흔한 일이다. 그런 일을 지켜보는데 멀미가 났다.


말없이 온종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토록 혐오하고 미워하던 사람들 속에 내 모습은 없었을까. 그냥 무시하고 외면해도 될 일에 그토록 흥분했던 것도 '투사'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 스무 살 이후 내 삶을 밀고 온 어떤 동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학생 때나 사회에 나와서 사회변화에 참여한 일이 개인적인 보상을 바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허무감이 깊어졌다. 세상은 더 나빠졌고 아이들의 미래는 더 불안해졌다고 생각했다. 공동선 같은 말은 종종 희화화된 채 조롱거리가 된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왜?  이런 회의가 깊었다.

자전거

자전거를 그토록 오래 타본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근 한 달가량 매일 자전거 위에 있었다. 흔히들 자전거의 '엔진'은 심장과 근육이라고들 한다. 어떤 화석연료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거친 숨을 토하고 땀을 쏟으며 고개를 넘다 보면 자전거가 몸의 일부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낯선 일본의 소도시를 방황할 때 자전거는 인체의 능력을 몇 배 몇십 배 확장해주는 것 같았다. 마쓰야마에서 저녁 내내 시내를 유유자적 돌아다닌 일, 여행의 마지막 구간이던 나오시마를 돌아다닐 때도 자전거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모른다. 시간을 내고 '엔진'을 업그레이드한다면 유라시아나 아메리카를 횡단하는 일도 언젠가 해볼 수 있겠다.

사람은 예외 없이 삶을 밀고 가는 동력이 줄어들면서 소멸의 길을 걷는다. 산다는 것이 살라간다는 말과 같다던가. 다만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대로 사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절명하는 순간까지 잘 작동하도록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중 하나가 걷기와 자전거 타기다. 도시의 옹색한 삶에서는 그 정도가 다다.


코보(弘法)대사.

우리나라에도 원효대사나 도선국사 같은 고승들 전설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일본 불교에서 코보 대사의 의미는 이보다 더 큰 것 같다. 절마다 부처님을 모신 본당과 코보 대사를 모신 대사당이 같은 크기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코쿠 주민들은 순례자인 내게 순례자들이나 풀과 나무 세상 만물이 모두 코보 대사의 현신이라는 말도 했다. 일본의 진언종은 코보 대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대여섯 살 때 부모님과 도봉산 만장봉 아래 석굴암에 오르던 기억. 수첩 안에 작은 부처님을 모시고 틈틈이 독경을 하고 반야심경을 사경 하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절이든 교회든 정해놓고 다녀본 적이 없다. 1980년대 이후로 나에게 종교는 사회과학처럼 책으로 읽고 이해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아내는 작년에 큰 시련을 겪은 뒤로 어릴 때 다니던 성당에 다시 나가고 있다. 아내에게는 유년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주일마다 미사를 보러 가던 기억이 훼손되지 않은 삶의 원형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코보 대사나 부처님,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이든, 신들이 인간 개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다만 종교의 논리에 기대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매 순간의 삶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이 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에 대해 이 나이를 먹고도 한동안 자기 연민에 빠져 지냈다. 특히 어머니 생각에 툭하면 눈물이 났다. 이십 대 때 병약한 나 때문에 어머니는 무던히 속을 끓였다. 군대에 가서도 병이 재발해 국군 청평병원에 6개월가량 입원해 있는 동안 어머니는 매주 기차를 타고 면회를 오셨다. 면회소가 있는 매점 앞마당에서 봄볕을 등에 지고 돌나물을 뜯으시던 모습을 일본 여행하는 동안 노인들의 모습에 자꾸 겹쳐 보였다.

자식이 부모를 낳는다는 말처럼 딸들을 보면서 부모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되는 일이 많다. 부모님을 그리워하기보다 이제 자식들에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리라.



일본과 한국

시코쿠 순례기간 동안 일본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 엿본 것 같다. 65세 인구 비율이 26%가 넘는 초고령사회, 가족의 해체. 우리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미래다. 고치시 해안가 시골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외딴 바닷가에서 뚜렷하게 할 일도 갈 곳도 없는 모습으로 쓸쓸하게 해안을 응시하던 그는 잠깐 인사를 나눈 내게 젊은 시절 내내 교토에서 직장생활을 했다고 했다.

여행 초기에 만났던 야마시타상도 외로운 사내였다. 이십 대의 아들과 딸이 도쿄와 오사카에 따로 살고 아내와도 이미 오래전에 이혼을 했다.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외로움을 짊어지고 순례길을 계속 반복해서 돌고 있었다. 어른들에 비해 아이들은 건강해 보였다. 마을 운동장에서 방과 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와 야구를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는 중고생들은 우리나라 아이들에 비해 쾌활해 보였다. 속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핵발전소가 파괴된 바로 뒤라 그랬겠지만 일본은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선거를 앞둔 분위기도 그랬고 이런 상황을 발판으로 아베는 장기집권의 발판을 굳혔다. 한일관계는 꾸준히 악화되었고 최근에는 코로나 19 사태를 계기로 자유여행마저 중단되었다.


앞서가던 일본이 왜 지금처럼 되었을까. 경제대국이라던 말도 무색해졌다.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국가, 체념과 현실 순응에 익숙한 개인. 우리가 과하다 싶게 저마다 사회문제에 열을 올리는데 비해 지나치게 겸양을 떠는 사회적 분위기. 남에게 폐는 안 끼칠지 몰라도 자기 울타리 밖의 문제에도 좀처럼 나서지 않은 풍토. 과거를 정면으로 직시하지도 인정하지 못하는 용렬함. 그것이 일본을 점점 나빠지게 한 게 아닐까.  

시바료타로 같은 이들은 천 년 전에는 남해를 사이에 두고 한 나라였다는 주장들도 하는데 지금 두 나라는 어쩌면 이리도 다를까.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둘 사이가 조금은 회복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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