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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25. 2020

21.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이 만든 시코쿠

# 21 우탄구라~다카마쓰 토요코인 호텔


운행 81.81km


과음 탓인지 갈증 때문에 잠이 깼다. 어김없이 다섯 시. 날이 완전히 개어 있었다. 씻고 짐을 꾸려 본채로 가 아침을 먹었다. 지난밤 '낙원'에서 이리에 선생이 예고한 것처럼, 노리코 상이 마련해준 8가지 반찬 황송한 아침상. 새벽 4시에 일어나 순례자들 밥을 차려주신다. 이렇게 덕을 쌓고 계시는구나.

순례자들을 자기 집에 재우고,  간식을 내밀거나  손에 돈을 쥐어주는 수많은 주민들의 오셋타이가 시코쿠를 시코쿠로 만들었으리라.

 

우탄구라, 노리코 상과 이리에 상 부부


쌀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상 위에 올라온 모든 것을 다 먹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듯 깨끗이 비웠다. 점심으로 두 덩어리 주먹밥까지 손에 들려주었다. 우탄구라를 기억하고 싶어 두 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탄구라 홈페이지에도 숙박하고 간 사람들의 기록을 남긴다고 했다. 6시 45분  또다시 출발. 옷도 빨아 말렸고 날도 개어 몸과 마음이 다 개운했다.

79번 사찰  텐노지(天皇寺)까지는  7.4 km.  출근길 바쁜 사람들 사이로 가방을 주렁주렁 매단 자전거를 타고달렸다. 철길을 따라 평탄한 길이었다. 절 앞에 신사 앞에나 있는 도리이(鳥居)가 세워져 있었다. 절 앞의 일주문, 성황당의 금줄이나 마을 입구 솟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 절에도 전설이 있다. 12대 천황의 아들과 부하들이 괴물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오히려 잡아먹혔다. 이 부근에 있던 요코나미묘진(横潮明神) 이라는 신이 ‘야소바의 샘물’을 먹여 모두 살려냈다.  코보 대사가 이 곳을 찾아왔을 때, 샘을 지키던 산신이 대사께 귀의하고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1156년 내전에서 패한 스토쿠 천황이 이곳으로 쫓겨와 죽었다. 장례절차를 상의하는 동안 동안 천황의 시신을 야소바의 샘물에 담가 두었더니 고스란히 보존되었다고 한다. 천황사라는 이름은 그렇게 붙었다고 한다.


절에서 엊그제 71번  이야다니지(弥谷寺)지 앞에서 만났던 순례자와 마주쳤다. 간단히 목례를 나눴다. 순례자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온종일 입 다물고 걷는 일. 비루한 일상을 떠나 불경을 독송하고, 일상에서 쌓아가는 업을 벗어나려는 마음,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돌이켜보면, 내게는 산길을 걷는 일이 그런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가까이 있는 북한산. 안산, 안양 인근에 살던 시절 수리산과 관악산. '병원'에 가듯 자주 찾는 지리산과 설악산. 캄캄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산길을 걷다 보면 살아갈 힘이 다시 고이는 것 같다.

들판에 양배추 수확이 한창이었다. 사질 토양에 비닐 멀칭이 없어는 밭들이 편안해 보였다. 일본 역시 농업 현실은 어렵다. 식량자급률도 25% 남짓. 우리도 일본도 농업과 농촌의 10년 뒤가 어찌 될지 암담할 뿐이다.

8시 10분. 다시 텐노지에서 출발. 80번 고쿠분지(國分寺)까지는 7.3 km 가량 도로를 따라 달리게 되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79번- 81번-82번-80번 순으로 가는 것이 길도 편하고 거리도 단축된다. 문제는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와  82번 네고로지(根香寺)다. 두 절 모두 고쿠분지가 등지고 있는 산봉우리 위에 있다.(시로미네산(白峯)과 오히라(大平)산) 두 봉우리는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고쿠분지에서 산을  올려다보면서 시계방향으로 되돌아 가야 오르막 들머리를 만날 수 있다.


9시. 일단  80번 고쿠분지(國分寺)에 도착했다. 고쿠분지라는 절 이름도 여러 곳에 있다. 741년 쇼무천황이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절들이 모두 고쿠분지라고 한다. 말하자면 국사당 같은 의미인 모양이다. 남산 식물원으로 오르는 길에 남아 있는 가지런한  돌계단도 일제가 남기고 간 흔적이다.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로 쫓아내고 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우리나라 무당들은 천대받고 있지만 적어도 일본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다. 신내림굿을 하는 무당들뿐만 아니라, 마을 성황당이나 집집마다의 터주, 조왕신 등 다양한 전통신앙을 박정희 정권은 '전근대'와 미신으로 낙인찍고 일소하려 했다. 일본 사람으로 자라 정체성도 그렇게 지녔을 박정희의 근대는 일본이었나?


고쿠분지는 무척 크고 오래된 절이었다. 납경을 받으며 다음 절까지 자전거로 갈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물어보았으나 도리없이 산 바닷가 쪽으로 돌아가서 산을 올라야 한단다. 걸어간다면 바로 뒤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81번 시로미네지로 갈 수 있지만  자전거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 81번 시로미네지까지는 14km가량이다. 마지막 6km는 쉼 없는 오르막이다. 자전거도 긴장했는지 오르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체인이 빠졌다. 비닐 같은 게 감겼던 모양인데, 떼어내고 정리하느라  40분가량 애를 먹었다.

짐을 다시 챙기며 살펴보니 우탄구라에서 받았던 주먹밥이 보이지 않았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옆에다 놓고 온 모양이었다. 시골길이라 편의점도 가게도 안 보이고 내리 등산을 해야 하는데 점심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됐다.  

대책 없이 오르막이 시작됐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멀리 세토대교가 내려다보였다. 12시경,  81번 시로미네지(白峯寺)에  도착했다. 해발 337m.  해안선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한 탓인지 꽤 까마득하게 올라온 느낌이었다. 이 곳에서 뜻밖에도 요코미네지 산길에서  청정(淸淨)이라는 나무패를 준 순례자를 다시 만났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 나오다 보니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걸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나 물으니,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시내 구간은 전철로 이동했다고 했다. 실례가 안 되면 이름을 여쭤봐도 되냐니까. '아무 아무개' 정도로만 알아두시라고 했다. 하기 이름이 무슨 소용일까.

납경소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취가 시코쿠의 길이 되었습니다.'  루쉰이 했다는 말처럼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아서 길도 처음에는 없었지만 누군가 많은 사람이 걸어가면서  길이 되었다' 던 말처럼 시코쿠를 시코쿠로 만든 것은 천 년 넘게, 저마다 사연을 안고 걸었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일 것이다. '청정 아무 아무개' 선생은 내게, 이 절의 산문은 다른 절들과는 다른 양식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솟을대문 양식의 문을 '고려 양식'이라고 했다. 어쩐지 정겹다. 이 절은  오늘 출발지였던 텐노지와 연관된 곳이었다. 텐노지에서 죽은 비운의 스토쿠 천황을 장사 지내고 이 절에 모셨다고 한다.

'청정 선생'과도 작별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었어야 하는데 자판기 음료수 말고는 먹을 게 없었다. 아침에 흘리고 온 주먹밥이 눈앞에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오히라 산을 향해 계속 올라가야 했다.  산록에  온천 휴양시설도 있었다.

"따.. 땅... 따... 땅..." 분명히 총소리였다. 사방에 군 시설이 있는 우리나라에서야 익숙할 법 하지만. 웬 총소리일까 의아했다. 산 위에는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근 자위대 훈련장이 있었다. 군인들은 매일 저녁마다 총을 꺼내 분해하고 기름걸레로 닦고 심심찮게 실탄 사격도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단단한 금속물질들에 응축된 살기가 늘 섬칫하게 여겨졌다. 가장 기능적으로 살상을 하겠다며 매일 분해해서 닦고 조이는 일에 꼼짝없이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병역이었다. 일본 땅에서도 이런 총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가는 곳마다 일본의 군사력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 일본 헌법 9조를 지키자는 시민사회단체들의 구호와  '강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아베 자민당의 선거 포스터가 부딪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 이해되었다. 말이 자위 대지 사실상 일본은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엄청난 플루토늄, 2차 대전 당시에 이미 항공모함을 만들고 운영한 능력, 인공위성을 스스로 발사할 정도로 동원하자고만 하면 얼마든 중국과 우리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군사대국인 것이다.

출발지점 다카마쓰로 돌아왔다

올라가다 지치면 내려서 끌고 조금 완만해지면 다시 자전거를 타면서 해발 500미터가 넘는 오히라 산정까지 올랐다. 정상 부근 갈림길에서  82번 네고로지(根香寺)까지 자전거를 타고 내려갈 것인지 갈등하다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결국 내려간 높이만큼 꼬박 다시 자전거를 끌고 올라야 했다.

오후 1시 반...  82번 네고로지(根香寺)에 도착했다. 코보 대사가 당나라에 가기 전에 초가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고, 832년 치쇼(智證)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천수관음상을 조각해 본존으로 안치했다고 한다. 나무뿌리로 조각한 본존불이 오래도록 향기를 내뿜어 근향'(根香)이 되었다고 한다. 절은 짙은 숲 그늘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인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중정을 둘러싸고 양쪽으로 회랑이 이어져 있었다. 회랑 안에는 신도들이 봉헌했다는 3만 개에 달하는 관음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본당까지 이어진 어두운 회랑을 빠져나오면 잘 가꾼 중정이 있었다. 나이 든 어머니와 딸. 침묵하며 기도하는 신도들도 꽤 많았다.

사탕 몇 알과 자판기 음료수 말고는 한 나절 동안 뭘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산을 오르느라 지쳐있었다.  산길로 접어든 뒤로는 식당도 편의점도  없었다. 다음 절로 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다시 고갯마루에 있는 갈림길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향으로 봐서는 다카마쓰(高松) 시내인 것 같았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지점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서 온 것이다. 산정에서 시내까지는 줄곧 내리막이었다.



산을 내려오니 기온이 높아졌다. 공기도 도시의 범상한 그것이다. 햇살 따가운 한 여름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88개 사찰 가운데  83번부터 88번까지 여섯 개가 남았다. 산 아래 마을들은 논농사 때문인지 저수지를 끼고 있었다. 다시 11번 국도를 만나 동쪽으로 달리다가 83번 이치노미야지 (一宮寺)를 향해 달렸다. 오후 3시쯤, 허기를 참을 수 없어  길가의 중화 소바집에  들어갔다. 주방에서 나온 주인은 왜 들어왔냐는 표정을 짓더니  오후 5시까지는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했다. 사실 이게 정상이지 싶었다. 점심도 못 먹고 허둥대며 산 아래 마을을 헤매다 보니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편의점 패밀리마트를 만나  컵라면과 오니기리를 사서  문밖 주차장에 선 채로 먹었다. 훼미리마트는 가게 안 취사가 안 된다고 했다. 아침에 흘리고 온 주먹밥이 보통 그리웠던 게 아니다.


순례기간 중에 스마트폰 GPS 앱 로커스프로(Locus pro)를 사용했다. 목표지점을 설정하면 방향과 남은 거리를 오프라인 지도상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인터넷 접속 없이 여행하는 동안 큰 도움을 받았다.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가지고 간 카메라 배터리가 빨리 방전돼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매번 자전거에 부착하고 떼고 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거리에 학교 파한 아이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아침  등교시간에 80번 고쿠분지에 들렀는데  학교가 파할 때까지 나는 밥도 굶은 채 산을 헤매고 다니 것이다. 일본 아이들 표정은 우리 아이들보다는 나아 보였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모습, 환하게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 속사정을 모르겠으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무섭게  학원을 전전하는 곳이 지구 상에 우리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4시 20분. 다카마쓰 외곽에 있는 83번 사찰 이치노미야(一宮寺)에  도착했다. 이치노미야(一宮)라는 명칭은 1679년부터 이 일대 신사들의 업무를 총괄하는 곳으로 지명되며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나중에 불교사원으로 바뀐 것이다. 이 절에 모셔놓은 약사여래 아래 지옥으로 빠지는 구멍이 있어, 죄가 있는 사람이 머리를 넣으면 빠지지 않는다는 전설.

참배를 마치고 나니 이미 오후 4시가 넘었다. 다음 절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다 싶어 인근에 있는 다카마쓰 시내에 있는 캠핑장 두 곳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GPS에 나타나는  미네야마(峰山) 공원 캠프장 등 두 곳에 전화했으나  모두 다 안 된다고 했다. 한 곳은 낮 동안만 개장을 하는 공원이고 한 곳은 다음 날인 화요일이 휴일이라서 안 된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젠콘야도 리스트에 나와 있는 '슬로라이프'라는 곳에 전화를 해보았다.  이치노미야지에서 북쪽으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고  이용료도 500엔으로 저렴했다. 전화를 걸 때 이미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슬로라이프는 옆에 붙어 있는 공장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전화로 슬로라이프냐고 하니까 전화를 몇 번 연결한 뒤에야 담당자인 것 같은 남자가 받았다. 사무적인 목소리로 숙박은 가능하지만, 6시까지 체크인해야 한다고 했다. 찾아가는 도중에 길을 헤매 여섯 시가 넘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며 체크인 시간이 지났다며  전화를 끊었다. 단 오분 지났을 뿐인데, 조금 야속했다.

더 이상 운행을 계속하기도 늦은 시간이었다. 84번 야시마지(屋島寺)는 이치노미야지에서 다카마쓰 시를  북쪽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지점, 야시마라는 섬 산 위에 있었다. 섬이니까 바닷가에 야영 가능한 해수욕장이라도 있지 않을까.  야시마지 인근 여관이라도 찾아보자 싶어 일단 달려보았다. 퇴근시간이라 흰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이 바쁘게 밀려다니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 툭 떨어진 사람처럼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로  어둠이 짙어가는 거리를 쓸쓸하게 달렸다. 야시마를 한 바퀴 다 돌고도 마땅히 잘 곳을 찾지 못했다. 야시마지로 오르는 들머리에 작은 여관이 있었지만 불도 꺼 놓았고 어쩐지 기분도 가라앉아 흥정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7시가 넘어 첫날 묵었던 다카마쓰 시내 토요코인 호텔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방이 있다고  오라고 했다.

호텔을 예약하니 느긋해졌다. 몸은 지쳤지만 잘 곳이정해진 것이다.

여덟 시가 다 돼  한 접시에 99엔이라고 내 건 회전 초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호텔 프런트 직원은 마침 첫날 만났던 사람이었고 나를 알아보았다. 순례가 어땠냐고  자전거 박스는 잘 보관해두었다고.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주니 울컥할 정도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또 긴 하루가 또 저물었다. 내일이면 절 순례를 모두 마치게 된다. 감개무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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