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국내 대중문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여성 서사'였다. 여성끼리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여성이 서로 연대해 함께 악에 맞서는 이야기들이 주류로 급부상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밀수'는 요즘 트렌드와 시류를 잘 짚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밀수'는 또다른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국내 영화계는 티켓 파워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남성 중심 영화 위주로 투자됐고, 블록버스터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극성수기인 여름 시장에 텐트폴 영화로 (사실상) 여성 투톱 영화를 내세웠다는 것은 일종에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었음이 분명하다.
베테랑 감독 류승원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쉽지 않은 도전을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처음 만드는 여성 서사 영화지만, 각 캐릭터를 조화롭게 지휘하는 영리한 지휘자로서 역량을 보인다.
줄거리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간단하다. 한 바닷가 마을 군천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잃은 해녀들이 먹고 살기 위해 바다 속에 던진 물건을 건져 올린다.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가 밀수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춘자와 진숙이 물질을 나갔다가 뜻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고, 진숙은 졸지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된다. 춘자는 혼자 살아남고, 감옥에 가게 된 진숙은 춘자를 밀고자로 의심하고 배신에 치를 떨게 된다.
서울에 가서 또다른 밀수품을 거래하던 춘자는 밀수계의 큰손 권상사(조인성)을 만나게 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장도리(박정민)와 함께 더 큰 밀수판을 키우게 된다.
사건과 캐릭터들을 소개하는 전반부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그동안 흔히 봤던 범죄 액션 영화의 존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 복고풍도 그동안 레트로 영화에서 많이 다뤄졌기에 새롭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스토리라인이 풀어지면서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춘자와 진숙의 화해다. 춘자에 대해 오랜 원한을 품고 있던 진숙은 자신을 감옥으로 밀어넣은 밀고자가 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극적으로 화해한다. 이후 춘자와 진숙, 고옥분(고민시)는 진짜 악당을 잡기 위해 함께 연대한다.
뜻밖의 빌런이 공개되고 거기에 맞서는 세 여성의 이야기가 좀더 정교하고 부드럽게 전개됐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함께 악에 대항하는 이야기는 카르시스를 안겨준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부분은 해녀들의 연대다. 해녀들은 생계를 위해서 차디찬 물속에 뛰어든다. 바닷속 유영하던 그녀들이 물밖으로 나와 생명을 확인하며 내는 '숨비소리'는 그래서 더욱 애절하게 들린다. 화학공장으로 바닷속이 오염돼 더이상 어쩔수없이 밀수품을 건져내지만 목숨을 걸고 힘든 일을 하는 그녀들에게 많은 돈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 속에서는 늘 예상밖의 위험이 도사리지만 오늘도 가족들을 거둬먹이기 위해 바다 속 깊이 잠수한다.
사실 처음에 춘자와 반목하던 진숙이 그녀의 손을 다시 잡게 된 것도 상어에 물려 한쪽 다리를 잃게 된 동료 해녀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진숙은 해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춘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후반부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수중 액션신에서 주인공은 해녀 군단들이다. 바닷속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어디보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기에, 힘을 합쳐 빌런들의 공격에 맞서는 모습에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은 성별의 문제라기 보다는 보잘것 없는 약자들이 힘을 합쳐 거악에 맞선다는 구조로 해석하는게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영화는 마침내 진숙이 빼앗겼던 아버지의 배를 되찾고, 다시 뱃머리를 잡는 장면에서 절정을 맞는다. 친구 춘자와 해녀들은 그 장면을 누구보다 감동적으로 바라보고 박수를 보낸댜.
하지만 '밀수'는 무조건적인 여성영화라는 이분법인 논리로만 볼 수는 없다. 악역을 맡은 장도리역의 박정민과 김계장 역의 김종수가 빌런 역할을 상당히 다이나믹하게 소화했기 때문에 해녀들의 이야기가 더 빛날 수 있었다. 남성 중에 유일하게 선한 역할로 나오는 조인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류승완 감독이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넓게 보면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다. 해녀들은 우리 사회의 힘없는 약자들을 대변하고, 춘자와 진숙은 친구 사이의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한다. 물론 갈등을 풀어내는 방식이 다소 거칠고 단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류 감독 특유의 속도감과 재치있는 편집은 단점들을 상당 부분 상쇄시킨다. 특히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몰입하게 하는 후반부의 수중 액션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이 영화는 류 감독의 기존의 내공들이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장도리와 권상사의 액션 장면에서 '베테랑', '베를린'의 액션 장면이 떠오르고 캐릭터 빌징에서는 '짝패'나 '부당거래' 등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블록버스터로 매끄러운 편집은 '모가디슈'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진짜 우정과 사람의 연대가 어떤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잇는 작품과 배역이 한정된다고 하소연한다. 누군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소외된 사람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주는 이 영화가 더없이 반갑게 느껴진다. 또한 영화계 밑바닥부터 다져온 류승완 감독이 도전한 여성 영화라서 더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