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마지막 주말, 그날은 여느 토요일과 다소 분위기가 달랐다. 꼭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논현동에 위치한 현대 모터스튜디오는 화려한 강남 한복판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아늑하고 차분했다.
잔나비의 작지만 특별한 공연이 있다고 해서 찾아 가긴 했는데, 세상이 맨 앞자리였다! 공연 전에 함께 열린 포니 자동차 사진 공모전도 꽤 볼만했다. 현대자동차는 1974년 한국산 자동차 최초의 독자생산 모델인 ‘포니’를 출시했고 올해 그와 관련한 헤리티지 프로젝트를 하는 중이었다.
사진 공모전 수상자들은 저마다 포니와 얽힌 사연을 소개했는데 당시 아파트값과 비슷한 첫 차를 구입하고 좋아했던 가족들의 이야기, 꼼꼼히 적었던 차계부를 적어가며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연을 들으니 눈치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1970년대 빛바랜 사진들은 고생한 부모님 세대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드디어~! 기타를 둘러 매고 무대에 오른 잔나비는 유독 감상에 젖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날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비오는 날 잔나비의 어쿠스틱 ver.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지 몰랐을 뻔했다. 잔나비는 최근 이 회사와 헤리티지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신곡 ‘pony’를 발표했는데 최정훈이 쓴 가사는 예의 서정적이다.
“어디든 달려가야 해/헤드라잇 도시를 넘어/뒷자리엔 부푼 꿈을 숨겨주던/그녀의 젊은 자동차”
뒤에 돌아가는 투박하지만 오래된 올드카와 잔나비의 음악은 상당히 닮아있었다. ‘힙한 것, 쿨한 것은 싫다’고 선언하는 잔나비의 그들만의 진정성이 담겨있다. 그렇다고 다른 K팝 음악이 진정성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잔나비의 복고풍 음악에는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담겨있다. 원숭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인 잔나비라는 팀 이름, 그룹 사운드라고 소개하는 것부터 옛스럽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에는 한국가요의 유산, 즉 K-팝의 헤리티지가 담겨있다.
요즘 아이돌 음악은 비트와 리듬, 퍼포먼스 위주의 '보는 음악'이지만, 그들은 가사와 멜로디를 중시하는 '듣는 음악'의 계보를 잇고 있다. 물론 록음악을 하기도 하지만 빨리 돌아가는 K팝의 흐름 속에서 기꺼이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역행’을 선택했다.
잔나비는 1960년대 사이먼 앤 가펑클, 비틀즈, 70년대 퀸, 산울림, 90년대의 오아시스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등의 히트곡은 그래서 복고 느낌이 물씬 풍긴다. 무엇보다 곡과 잘 어울리는 솔직하고 따뜻한 가사는 듣는이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꾸미지 않고 감성적이며 귀에 꽂히는 가사는 듣는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들의 음악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음악적 ‘가교’ 역할을 한다고들 한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뜻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지 생각해본다.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을 관통하는 아픔과 행복이 있다. 지금의 중장년 시대도 누구보다 뜨거운 청춘의 시대를 지났다. 과거 그들이 듣던 노래와 비슷하면서도 요즘 색깔로 재해석된 노래는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중년 세대에게 친밀감을 불러일으키고 과거 추억을 소환한다. 세대를 뛰어넘어 노래로 연결되고 치유받는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콘서트에서 잔나비는 산울림의 노래들을 불러 박수를 받았다. 최정훈의 잔망스러운 댄스와 함께 부르는 '산할아버지'는 어느때보다 흥겹고 정겨웠다. 앞자리에 앉은 노신사 관객이 최정훈으 발랄한(?) 댄스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K팝의 눈부신 발전은 단단한 우리 가요의 뿌리 위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90년대 서태지와 듀스로 대변되는 힙합 댄스 음악 위에서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영향을 받았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인기를 끄는 BTS와 블랙핑크가 탄생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책임졌던 발라드의 계보는 잔나비가 잇고 있다.
음악은 시대를 막론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배가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과거 모든 음악이 완성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K-팝 헤리티지를 안고 하는 음악은 깊은 뿌리에 둔 음악처럼, 시류에 휩게 흔들리지 않는다.
과거의 음악을 촌스럽다고 치부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보편성을 바탕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히 상업적 '복고' 트렌드로 치될 수 없는 음악적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아이돌 뉴진스나 아이브도 복고풍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다양한 세대의 리스너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앞으로도 잔나비이나 뉴진스처럼 K-팝 헤리티지를 영리하게 이어가는 그룹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수 입장에서는 폭넓은 팬층을 확대할 수 있어서 좋고, 듣는이들 역시 선택지가 넒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가요의 헤리티지를 음악적으로 구현하는 잔나비의 음악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앞으로의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