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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쪽겨울섬 Jul 13. 2021

순례자의 거울

르퓌길을걷다2. Montbonnet>Monistrol d'allier_1

2018년  3월 23일 금요일, 순례 둘째 날



 근육통으로 고달픈 순례 첫날밤을 보내고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새벽 6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창밖에는 밤새 쌓인 어둠이 아직도 두텁게 머물러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여니 싸늘한 공기에 코끝이 시렸다. 하늘은 불 꺼진 천장처럼 캄캄해서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었고, 발아래 초록 잔디가 깔려있던 마당은 하얀 무언가로 뒤덮여 뿌옇게 빛났다.






 서리가 내렸나?

 쪼그리고 앉아 손을 대보니 차갑고 보송한 감촉이 손끝에 닿아서, 한 움큼 쥐었더니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밤새 눈이 내렸구나.

 단단히 껴입고 짐을 챙겨 응접실로 내려왔다. 커피를 끓이고 마리 아주머니가 마련해 둔 빵과 잼을 꺼내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어설프게나마 불어로 건네는 작별 인사를 적어 탁자에 올려놓고 동이 트길 기다렸다. 적막 속에 혼자 길 떠날 채비를 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삼킨 듯 마음이 울렁였다. 설렘이 빚은 구름에는 드문드문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그 조금의 두려움 덕에 오늘 나의 걸음은 그만큼 더 겸손히 조심스러울 수 있겠지. 조금씩 밝아오는 유리문 바깥에 구름을 닮은 푸른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침 일곱 시,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표식을 따라 흰 눈과 안개가 사위의 모든 경계를 지우는 들판으로 들어섰다. 1100m가 넘는 고원지대답게 눈 위를 스쳐온 바람이 매섭게 불었지만 마음에 구름을 삼킨 나는 힘든지도 모르고 안갯속을 건너갔다.

 들판을 지나 얕은 오르막을 올라 숲으로 들어서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산과 친하지 않아서 설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살았구나. 전나무가 빼곡하게 늘어선 산길, 눈꽃을 피운 나무 두 그루가 가지를 흐드러지게 늘어뜨려 문을 만들었다. 그 너머 눈과 안개에 휩싸인 겹겹의 신비로운 풍경으로 어서 들어가고픈 걸음을 붙잡고, 이 순간을 좋은 화질로 남기려 배낭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두껍게 껴입어 둔한 팔로 무거운 배낭을 내려서 카메라를 꺼내는 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지만, 생생하게 간직될 추억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귀찮은 건 아무것도 아니........

 쿵!



 


전원을 켠 순간 손에서 미끄러져 나간 카메라는 폭신한 눈 위로 소리도 없이 낙하했다. 쿵, 이 소리는 카메라가 아니라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다급하게 눈밭에서 집어 올린 카메라는 렌즈 오류라는 화면만 띄우고는 요지부동이었다. 속에 난 열불이 밖으로도 뿜어져 나왔으면 숲에 쌓인 눈이 다 녹고도 남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도로 배낭에 넣고, 약정 기간을 훌쩍 넘긴 핸드폰 카메라를 켜보았다. 몇 번이나 떨어뜨려 쩍 갈라진 금이 두 개나 있는 핸드폰으로 찍은 풍경은 역시 카메라만 못했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를 고칠 수 있을지 김이 푹푹 나는 머리를 굴리며 전나무 가지를 드리운 문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펼쳐지는 숲의 절경은 투덜대는 걸음으로 발자국을 남기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고장 난 카메라 생각은 접어두고 고운 비단결에 수를 놓듯 공들여 발자국을 그려 나갔다. 바람이 불어 가지 위에 쌓인 눈이 흩날릴 때면 걸음을 멈추고, 은가루가 둥근 유리돔 안에서 천천히 유영하며 가라앉는 스노우볼로 걸어 들어온 건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환상적인 순간을 고요히 만끽했다.







 숲과 평야를 빠져나와 도로 하나를 건너 작은 마을 Le Chir를 지날 때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숲길, 이번에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뿌연 안갯속에서 미끄러운 자갈 위를 조심스럽게 디디느라 카메라 생각은 까마득히 더 먼 곳으로 물러갔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오자 얕은 계곡물이 풀과 이끼가 자란 땅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물가 여기저기에 자리한 서너 채의 오두막을 나무다리와 돌다리가 잇고 있었다. 푸른 이끼 위 채 녹지 않은 눈, 안갯속에 아릿하게 번지는 새소리와 물소리.

 왜인지 모르게 르퓌를 떠나 길을 걸으며 감탄을 자아내는 광경을 마주할 때면 아름다운 풍경이 상영되는 스크린을 관망하는 기분이 문득 들곤 했다. 스치는 바람의 차가운 옷자락과 안개의 물기 어린 공기가 이렇게 생생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생각이 마음을 붙잡아 현실 속을 걷는 걸음을 쫓아오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이 순간을 좀 더 현실로 느껴보려 깊이 숨이 들이쉬고서 비탈길을 올랐다.  







 생 프리바 달리에는 산 중턱 솟아오른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집집마다 덧댄 알록달록한 창틀과 나무문이 흐린 날씨에 핀 색색의 꽃처럼 예뻤다. 이제까지 지나왔던 작은 마을들과 다르게 예쁜 카페며 상점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어제 나와 함께 미사를 드린 순례자들은 거의 여기 묵어 갔을 것이다. 몽보네도 평화롭고 아늑했지만 여기서 짐을 풀고 깊은 산세 너머로 떠오른 달을 보는 밤도 참 아름다웠겠다. 여행자였으면 골목을 구비구비 누비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실 텐데. 어설픈 초보 순례자로 길 위에 선 나는 그런 여유를 누리기가 왠지 편치 않았다. 내가 언제쯤 지치게 될는지도, 오늘 밤 어드메 묵어갈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막상 그 어드메에 도착했는데 문을 연 숙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한몫 거들었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치기엔 두고두고 아쉬울 풍경이 아닌가. 협곡 너머 시야를 가득 채운 주상절리를 마주한 전망대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절경을 배경 삼아 턱까지 올라온 숨을 가다듬었다.

 다음 마을을 알려주는 길의 표지는 또다시 오르막길로 향해 있었다. 턱에서 가슴께까지 내려간 숨이 도로 깔딱깔딱 차례였다. 길 양옆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목 위 농장과 농가가 드문드문 보였다. 힘들고 지칠 게 걱정되면서도 저 위에서 돌아볼 풍경이 기대되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면 지나온 길이 한눈에 보일지도 모른다. 이틀 동안 느리고 서툰 걸음으로 이룩한 내 작은 업적이.






 길의 경사면에 한 발 디디려는데 도로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금속판으로 된 표지판은 다음다음 마을인 모니스트롤 달리에 Monistrol d'Allier 로 바로 갈 수 있는 차도를 친절하게 가리켰다.

 '그 흙길을 오르기 전에 잠깐 아스팔트로 말끔히 포장된 이 길 좀 봐. 게다가 내리막길이거든.'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아랫입술을 잠깐 깨물었다가 시선을 거두고 르퓌길의 표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잠깐 사이 갈등으로 바빴던 마음을 들킬세라 더 씩씩하게 발을 디뎠다.





 초원 위 조랑말과 작은 집, 점점 멀어지는 생 프리바 달리에의 원경이 아름다운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 Rochegude에 닿았다. 길가 어느 집 마당 나무 탁자에 배낭을 내리고 그 무게에 눌려있던 어깨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찌릿한 근육의 통증에 저절로 찌푸려지는 눈에 마을 꼭대기 암벽 위 작은 성당이 들어왔다.

 자그마한 창을 낸 원기둥 모양의 벽에 돌기와를 아무렇게나 쌓은 듯한 지붕, 두 개의 종이 달린 종탑. 성당인 걸 모르고 봤다면 죄인을 가두는 독방으로 쓰였대도 믿을 만큼 삭막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 쓸쓸한 외양 때문에 오히려 못 본 척 지나치기 힘들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 안내판에 La Chapelle Saint-jacgues 라 쓰여 있었다. 산티아고에 잠든 순례길의 성인, 야고보의 이름을 지닌 성당이었다.





 나무토막을 괴어놓은 문을 열었다. 문짝이 삐걱, 소리를 내며 성당의 둥근 속내를 내보였다. 빛이라고는 작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스미는 한 줌 정도의 햇빛이 전부였다. 성당은 너무나 아담해서 문에서 다섯 걸음이면  제대 앞에 닿을 수 있었다. 제대 위엔 앞서 간 순례자들이 바치고 간 들꽃과 펼쳐진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창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종이 위엔 뜻 모를 글자들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없어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 마음과 다를 리 없는 글자들이라는 걸. 거기엔 기나긴 여정 속 보호를 청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을 기원했을 순례자들의 기도가 있었다. 아무런 치장 없는 한 뼘의 작은 성당에서 깔려 죽을 만큼 많은 재물이나, 세상을 발아래에 둘 권력이나 누구나 돌아볼 미모나, 일확천금의 행운을 청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글자들을 환히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흰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이 빛을 비추는 길을 걷는 순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마주본 순간 바로 여기에 들어선 게 우연일 리 없다는 확신이 그 어떤 언어와 공식보다도 명료하게 들었다.

 여기에 섰던 순례자들도 나와 같았을까. 창문의 순례자 그림을 보며 마치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비록 캄캄한 어둠 속에 서 있어도 보이지 않는 빛이 나의 길을 비춘다는 확신 속에 한없는 평온함을 느꼈을까. 그리고 그도 나처럼 이렇게 방명록에 다른 글자들의 의미와 다를 바 없는 기도를 써 내려갔을까.




 성당을 나오며 처음처럼 나무토막을 문에 조심스레 괴어놓았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나의 발자국은 울창한 숲과 산의 무수한 굴곡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보였다. 내 발자국이 이룬 과거의 업적 같은 건 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소망과 기도로 이루어진 순례자들의 연대와 우리가 걷는 길에 보이지 않는 빛이 늘 함께 하리라는 걸 발견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길이 나를 여기로 이끈 것이다.








 내려놓은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배낭을 을러메고 다시 표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직진하라는 나란한 두 줄의 표식을 따라 앞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인 화살표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 담벼락과 텃밭 사이에 난 좁은 길을 걸었다. 그 끝에 맞닥뜨린 것은 숲과 경계를 지은 철조망이었다. 길이라고는 왼쪽에 숲 속으로 고꾸라지듯 경사진 컴컴하고 좁다란 산길뿐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두 눈으로 길의 표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라, 이쪽으로 오라는 표지의  부재로 단 하나뿐인 길로도 발을 딛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놓친 표지는 없는지, 혹여 길을 잘못 들었는지 살폈다. 아, 나는 도대체 어디서 또 실수를 한 걸까!

 하지만 되돌아간 길모퉁이의 표지는 틀림없이 담벼락과 텃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길이 없는 걸 확인했는데도 숲으로 난 길로 들어선 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르퓌에서 여기까지 인도해준 하양과 빨강 페인트로 그려진 두 줄의 표식에 나는 무척이나 의지하고 기대어 왔구나, 자갈과 바위로 울퉁불퉁한 진흙길을 아슬아슬하게 내려가며 생각했다.







 어느 날 내 삶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린 유일한 존재의 부재로 무너져 아직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내 모습도 되살아났다. 방향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내 가슴을 치며 자책했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트르담 등 뒤로 떠오르던 일출에 흩어졌던 먹구름이 다시 피어올라 내 뒤를 따랐다. 마음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불안과 우울이 조용히 떠올라 천천히 회전하다가 점점 빠르게 더 크게 원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그 안에 휩쓸리지 않으려 눈물이 핑 돌만큼 어금니를 꽉 깨물며 바싹 다가온 먹구름을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결국 두 발로 서야 하는 건 나야. 그  대단한 무엇이 나를 이끌거나 말거나 이 망할 진흙길에서 고꾸라지지 않으려고 버티며 걸어야 하는 건 나라고!

 나를 삼킬 듯 커져버린 먹구름과 거세게 불어닥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버금가게 씩씩거리며 험한 골짜기 같은 길을 스틱을 푹푹 찍어가며 내려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꽉 다물었던 입술에 맥이 탁 풀리고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몇 발자국 앞 바위 사이로 솟아자란 소나무 기둥에 하양과 빨강의 줄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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