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TA Feb 27. 2018

자발적 경단녀

경력 대신 경험으로

"이직이 아니고 그냥 퇴사?! 경력이 아깝지 않냐?"


육아문제로 부득이 경력단절을 경험하는 여성들이 많아 사회적 이슈가 되는 시대라지만, 나는 '자발적 경단녀'가 되었다. 대학 4년, 기업홍보 7년... 육아와 상관없는 내가 지금껏 쌓아온 경력을 내려놓겠다고 하니, 나보다도 주변에서 너무 아까워해서 민망할 정도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경력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왜 경력에 대해 미련 없이 '단절'을 선택했는가. 그 물음 이전에, 왜 이 경력이 시작되었는지부터 생각해보기로 한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수업을 들으면서 홍보 분야에 흥미를 느꼈고, 공모전 수상을 하고, 홍보대행사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그리고 기업 홍보팀에 취업을 했다. 써놓고 보니 제법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적든 크든 간에 중간중간 노력에 대한 보상이 있었고, 이게 '나한테 잘 맞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질 만했다. 그랬던 내가, 막상 회사생활을 하면서는 '나한테 그리 잘 맞지 않고 잘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 공모전 준비. 참 열심히도 했다.


'나는 대학 때 뭘 (왜) 배운 거지?' 입사 초반에는 전공과 실무의 괴리감에 좌절했다. 대학 때 광고홍보전략이라던가 보도자료 쓰는 방법 같은 걸 배웠지만, 실제로 필요했던 건 기자의 비위를 잘 맞추는 방법, 소맥을 맛있게 타는 방법, 술 먹고 죽지 않는 법, 대행사에 무리한 요구를 뻔뻔하게 하는 법, 상사에게 잘 어필하는 방법 같은 것들이었다. 참신한 기획력이라던가 콘텐츠 제작능력 등은 중요한 평가 요소가 아니었다. 열심히 한다 해도 내 노력의 결과물은 결국 상사나 기자의 성과로 쌓이거나,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묘한 비웃음으로 돌아왔다.


"넌 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려고 하냐. 회사원이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어야 해."

4년 차쯤 되었을 때였나. 언젠가 상사가 나를 따로 불러 해준 조언이었다. 그의 요지는 내가 너무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친화력 100%를 자랑하는 옆 동료와 비교하면서, "그처럼 되려고 노력해봐라. 일 말고도, 단체생활에서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라. 네가 프리랜서냐." 이런 얘기들을 내 머릿속에 심어줬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굉장한 조언이었다. '회사에선 일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었던 나에게 정신 차리라고 한대 세게 때려준 것과 다름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줄곧 일 잘하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한번도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은 적이 없었고, 그랬으니 그러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회사원은 나에게 그리 잘 맞지 않는 옷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너덜너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의욕으로 가득 찼던 신입사원은 어느새 '적당히 잘 넘기는' 대리가 되어갔다. 남에게 밉보이지 않고 편하게 일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갔다. 자판기에서 음료 뽑아주듯 상사가 원하는 것만 뽑아주면 된다. 내가 해야 되는 일만 적당히 하자. 옆 동료한테 부탁 좀 하지 뭐. 일 벌이면 피곤해진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의욕마저 억누르며(?) 회사원이 가져야 할 '적당히 마인드'를 장착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을 때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과연 이렇게 쌓은 경력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경력이 많다는 건,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적당히 일하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중첩되다 보니, 점점 성취감이 사라졌고 흥미를 잃었고 회의감이 찾아왔다. 그러고도 얼마 간 회사생활이 중독처럼 이어졌다. '아, 이제 진짜 그만'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그리고 나는 그간의 경력을 내려놓았다. 비록 경력은 단절되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웠던 순간들은 물론이고, 맵고 짠 경험들까지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기에 소중히 여기고 싶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바통 터치하듯 내 경력을 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주변에서 많이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그것에 대해 조금의 미련도 없다. 내가 그동안 경험한 것들, 배워온 것들이 어떻게든 내 삶 한가운데 발현되리라 믿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인생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스위트 히어애프터>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성실한 인간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